44화
한동안 집에 거하는 시간이 적었던 천일영은 혜령의 불어 터진 얼굴을 마주하자 아차 싶었다.
볼이 빵빵하게 부어오른 것이 이만저만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하루만 더 자리를 비웠으면 혜령의 볼은 아마 터져 나갔으리라.
하긴 그것도 그럴 것이 그동안 천일영은 혜령과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천일영이 오래 자리를 비우면 혜령이 토라지는 것이었다.
“삼촌! 흥!”
“하하하. 미안하구나. 그동안 예랑과 놀았느냐.”
그런데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혜령만 삐친 것이 아니라 예랑도 삐쳤다.
“예랑아, 우리 다 같이 산책 나갈까? 바다에 가자.”
“킁!”
혜령이 ‘흥’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린 것처럼 예랑도 똑같이 ‘킁’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린다.
그동안 나를 내팽개치고 어디에서 뭘 하다 왔냐는 듯한 표정이다.
그러자 천일영은 웃으며 예랑의 곁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는다.
초서복이 고용한 암기술사와 독술사가 나타났을 때, 제일 먼저 혜령의 곁으로 달려가 커다란 몸집으로 혜령을 가리고 지킨 것이 예랑이다.
짐승이 약하고 작은 아이를 제일 먼저 지키려 한다는 것이 놀랍기도 했지만, 그것은 또한 예랑이 보통의 늑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그러니 이 정도 토라진 것은 당연히 천일영이 풀어 주어야 한다.
“시장에 가서 당과도 사 먹고 바다에 가서 놀자.”
천일영이 미안한 마음에 뺨을 비비니 혜령은 까르륵 웃는 소리를 내며 웃다가, 금세 정색을 하고 다시 화난 척을 하려고 한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천일영이 다시 뺨을 비벼 대니 장원 안에서 혜령의 웃음소리가 그치질 않았다.
혜령은 삐진 척을 한 것도 잠시, 밝게 웃으며 천일영의 품에 폭 안겨 왔다.
그리고 예랑도 천일영의 곁에 붙어서 꼬리를 흔드는 것 역시 여전하다.
“빨리 나가자.”
“네에!”
항주 시내로 나가자 혜령은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리고 예랑은 잠시 천일영의 곁을 떠나 혜령의 주변을 경계한다.
오랜만에 밖으로 나온 혜령에게 항주의 시내는 여전히 신기한 것들이 많은 곳이다.
해맑게 웃는 모습과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혜령의 모습을 보던 천일영은 문득 이상한 것을 느끼고 가슴에 손을 올렸다.
‘살심은 없어졌지만 가끔씩 손이 떨리곤 했는데 지금은 그것이 없어졌군. 미친 듯이 불만을 표현하던 심장도 더 이상 울컥이지 않는다.’
언제나 심장을 뛰게 만들었던 불쾌한 피의 기억.
그리고 걷잡을 수 없이 손이 떨려 대던 살심의 기억.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평온한 마음.
이것은 분명 가족과 혜령의 덕이라는 것은 천일영은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작고 연약한 아이가, 피로 물든 과거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천일영은 혜령을 다시 안아 들고 뺨을 비비며 청명한 하늘 아래에서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다시 한번 천일영의 마음을 부드럽게 다듬어 준다.
이 웃음소리가 있는 한은 다시 피의 기억이 몸을 깨울 리는 없을 터였다.
* * *
해가 지며 노을이 항주를 가득 물들일 무렵.
항주 시내와 바다에서 돌아오고 난 후에도 한동안을 장원 밖에 있는 산에서 천일영과 뛰어놀던 혜령은, 오늘도 양손에 꽃을 한가득 쥔 채 졸린 눈을 비비고 누웠다.
천일영은 이부자리에 꽃과 풀물이 들기 전에 혜령의 손에서 조심스럽게 꽃을 꺼내 들었다.
혜령은 꽃을 유난히 좋아했다.
아마도 낙원촌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구석에 핀 작은 들풀조차 볼 겨를도 없이 살아와서였을 것이다.
천일영은 혜령의 손에 있던 꽃을 예랑의 머리에 살포시 꽂았다.
제법 어울린다.
“네가 꽃보다 더 예쁘단다, 혜령아. 그리고 예랑이 너도.”
잠든 혜령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일영이 중얼거릴 때였다.
밖에서 현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계십니까.”
“들어오거라.”
잠든 혜령의 얼굴을 다시 한번 쓰다듬은 천일영이 장원 마당으로 나섰다.
생각보다 현령의 방문이 늦었지만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혜령과 놀 수 있었으니까.
다만 깊숙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태문탁이 조금은 낯설다.
전에는 뒤에서 몰래 노려보고 하더니 이제는 인사를 하는 데 저항감이 완전히 없어진 모양이었다.
“미흑천의 재산을 정리하고 현상금을 받아 오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괜찮다.”
태문탁은 어두운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원래 미흑천의 재산을 넘기고 공은 자신이 받기로 했지만, 미흑천의 본문에는 돈뿐만이 아니라 그림과 도자기 등 환전하기 힘든 재산들이 잔뜩 있었다.
실체가 있는 재산들은 몰수 목록이 작성되어 보고해야 하기 때문에 태문탁은 그것을 가져오지 못한 것이었다.
또한 공자가 이것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태문탁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미흑천의 재산이 금화 팔십 냥에 현상금이 총 금화 스물다섯 냥이라, 생각보다 적군.”
“그…… 그림하고 족자, 그리고 도자기 등 귀중품이 나왔으나 그것은 위에 보고를 해야 해서…….”
“음……. 그렇군.”
천일영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동안 태문탁은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저 인간이 ‘음……. 그렇군.’ 한마디로 끝날 리가 없었다.
저 잘생긴 얼굴 뒤에 얼마나 흉포하고 잔학한 모습이 숨겨져 있는지 지금은 너무도 잘 안다.
요즘도 온몸의 뼈가 부서져 문어가 되어 버린 석태충의 모습이 꿈에 가끔 나오고, 가끔은 저 잘생긴 얼굴을 노려보다가 들켜서 죽임을 당하는 꿈도 꾸곤 했다.
“상부에 보고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약조를 지키지 못한 것도 사실이구나.”
“예…… 그렇기는 한데, 그것은 제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니 됐다.”
태문탁의 입이 쩍 벌어졌다.
도대체 저 인간이 뭐라고 하는 것인가.
이렇게 쉽게 그냥 넘어갈 리가 없는데 순순히 알았다고 하니 내일 아침에 해가 아니라 별이 뜰 일이다.
태문탁은 천일영이 새삼 다시 보였다.
역시 잘생긴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었다.
자신도 이렇게 잘생겼고 현령이라는 훌륭한 일을 해 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작은 부탁 하나만 하지.”
“네……. 말씀만 하십시오.”
이런 망할, 그럼 그렇지.
역시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냥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 될 것이지 꼭 이해하는 척을 한다.
그러나 태문탁은 투덜거려도 순순히 따랐다.
그동안 날로 집어 먹은 공이 어디 한둘인가.
평생을 다해도 절대 세울 수 없는 공을 세워 준 사람의 은혜를 잊는 것은, 태문탁의 조금 썩은 기준으로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게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고 말이다.
“현령이니 승선포정사사(承宣布政使司)와 안면이 있을 것이다.”
“히익! 공자님, 승선포정사사는 제가 감히 뵙기 힘든 분이십니다.”
“매일같이 별유천지에 오면서 절강성 도지휘사(都指揮使)와 잘 알지 않느냐. 그를 통하면 될 것이다.”
퍽이나 작은 부탁 같은 소리다.
태문탁은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감히 현령 따위가 절강성의 총책임자인 승선포정사사를 만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게다가 그 무서운 도지휘사를 통하라는 것도 말이 안 됐다.
절강성을 책임지는 군의 책임자다.
별유천지를 오가며 안면이 트이기는 했지만 현령의 입장에서는 말도 붙이지 못하는 사람이다.
꿀꺽. 꿀꺽.
태문탁의 입으로 계속 침이 넘어갔다.
도대체 이것이 정말 침인지 아니면 식은땀이 입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지 구별도 가지 않았지만,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일단 계속 삼키고 봤다.
“그…… 언제까지 자리를 마련하면 될까요? 공자님.”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내일이나 모레까지가 좋겠군.”
“오늘…… 연통을 넣어 보겠습니다.”
태문탁은 서둘러 인사를 하고 장원을 빠져나왔다.
늦장을 부릴 여유가 없었다.
분명 모레까지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면 불벼락보다 더 한 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저 인간은 그러고도 남는다.
태문탁은 체면이고 나발이고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다.
최소한 석태충처럼 문어가 되기는 싫었으니까.
* * *
다음 날.
천일영은 태문탁이 길을 안내하는 대로 나섰다.
벌써 승선포정사사와의 약속을 현령이 잡은 것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승선포정사사의 약조를 받아 낸 현령의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실상은 본인이 생각해도 이렇게 빨리 만날 약조를 받아 내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현령이 제법 일을 잘해 냈군. 내가 판단한 것보다 능력이 있는 것인가.’
천일영은 생각보다 일을 잘해 낸 현령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라고 왜 고생이 없겠는가.
공을 세우는 자리라고 해도 무공이라곤 하나도 모르고 글공부만 했던 현령이, 미흑천의 본문에 따라나선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나중에 현령에게 진 신세는 꼭 갚을 것이었다.
빚을 지고는 살지 못하는 성격의 천일영이다.
“이곳입니다. 그리고 저도 같이 들어오라고 하셨습니다.”
“고생이 제법 많았구나. 들어가자.”
승선포정사사의 집무관사(執務官司)로 들어서자, 콧대 높던 현령의 발걸음이 조금씩 늦춰지더니 이내 두 걸음 정도 천일영의 뒤에 서서 걷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째 땅만 바라보고 걷는 것이, 수상쩍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설마 이놈?’
천일영은 기감을 펼쳤다.
그리고 현령이 왜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 즉시 알아차렸다.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던 참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토록 빨리 약속을 잡을 수 있었는지 의심을 하지 않고, 그대로 현령을 믿어 버린 것은 천일영 스스로 탓할 일이다.
게다가 이제 승선포정사사의 집무실이 바로 앞이었다.
이제 와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것이었다.
그리고 현령 놈에게 신세를 갚는다는 것도 당연히 취소다.
드르르르륵.
“어서 오시게.”
문이 열리자 승선포정사사가 그 직위에 걸맞지 않게 환한 웃음으로 천일영을 반겼다.
백발이 성성할 만큼 나이가 들었지만, 눈에 떠오르는 안광이 예리하고 총기가 가득한 사람이었다.
“어서 오시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오.”
넓은 어깨와 강인한 풍모의 또 다른 남자가 승선포정사사의 뒤를 이어 천일영에게 말을 건넸다.
그는 천일영이 절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바로 도지휘사였다.
절강성 군의 총지휘권을 가진 사람이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냥 만나 보고 싶어서 나왔습니다.’ 같은 게 아니다.
같은 절강성에 거하지만, 군과 관의 인물.
친하게 지낼 수는 있어도 공무상 겹칠 일이 없는 사람들이 왜 이 자리에 같이 있단 말인가.
“자리에 앉으시오. 편하게 계실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물렸소이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믿는 수하도 이야기를 듣지 못하게 하려는 수작.
결코 천일영이 편하라고 사람들을 물린 것이 아니다.
천일영은 현령의 힘으로 미흑천의 본문은커녕 지회 하나조차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강성의 상부에서 그냥 넘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부에서는 현령의 조사를 할 것이었고, 차라리 그렇게 될 바에는 얻을 것도 있는 천일영이 먼저 승선포정사사를 만나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런데 그것을 오히려 역으로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이 이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