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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45화 (46/270)

45화

“나는 승선포정사사 유의선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분은 도지휘사 표호엽이라고 하시오.”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의선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현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능구렁이 세 마리쯤 들어 있다는 것을 천일영이 모를 리 없었다.

“현령을 탓하지 마시오. 우리같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누르면 그는 따라야만 한다오.”

“큼, 큼. 으흠흠…….”

분명 그럴 수 있다.

힘으로 누르면 현령은 말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현령의 울긋불긋하게 이리저리 독특한 자국이 있는 목이 눈에 띈다.

분명 어제만 해도 멀쩡한 목이었다.

‘이 망할 놈을 기루에 데리고 갔었군.’

분명 저 못생긴 현령 놈한테 기루의 기생 몇을 붙여 주고 추켜세우자, 술도 취한 김에 이것저것 묻는 대로 다 불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특히 아까 만났을 때 현령의 저 상쾌해 보이는 얼굴부터 의심해야 했다.

저 얼굴이야말로 어젯밤에 있었던 일의 증거니까.

“현령은 말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우리가 강권(强勸)을 하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오. 그 일은 우리를 탓하시고 현령을 원망하지는 마시오.”

“본론만 말하시오.”

천일영이 소리 내어 털썩 자리에 앉자 승선포정사사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아니라 오히려 웃음이 감돈다.

어지간히 급한 일이 벌어졌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눈치 없이 어젯밤의 일이 생각났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던 현령이 오히려 천일영의 행동을 보고 기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승선포정사사다.

그러나 유의선도 별반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공이 고강(高強)하고 적수가 없다는 말을 들었소. 또한 품성이 선하여 어려운 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고도 들었소이다.”

유의선의 말은 언뜻 칭찬하는 말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어려운 상황이니 무공이 강한 자네가 도와달라.’는 뜻이다.

즉 힘을 빌리고 싶다는 말.

천일영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비록 무공이 강하다고는 하나 천마신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몸이다.

그런데 군과 관의 인물들과 엮여서 눈에 띄는 것은 좋지 못하다.

또한 저들이 승선포정사사와 도지휘사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들은 황실의 윗선과도 줄이 닿아 있는 사람들.

잘못되어 황실 쪽과도 엮이게 된다면 그 운신의 폭이 더욱 좁아질 터다.

즉 이 자리는 벽력탄을 가득 안고 지옥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입구 같은 것이었다.

“공자께서 한 일을 전부 알고 있소이다. 그리고 저를 보자고 한 이유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지요.”

“나는 딱히 한 것이 없다.”

“어이쿠! 맞습니다. 제가 깜박했소이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시지요. 모든 것은 현령이 다 했습니다. 허허…….”

‘나는 공자가 한 일을 알고 있지만 기억하지 않겠다.’와 비밀을 지키겠다는 말.

그러나 능구렁이 유의선은 아직 진심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아마도 이제 본론이 나올 터.

어려운 일을 부탁하기 전에 상대편의 입장을 헤아려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자, 이 항주에 군항이 왜 있는지 아십니까?”

“이유를 알고 싶지도 않거니와 관무불가침이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천일영의 한마디가 유의선의 말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유의선의 다음 말은 오히려 천일영의 말을 멈추게 만들었다.

“이렇게 하시지요. 저희와 군항에 같이 가시는 것만으로 미흑천의 본문과 그곳에서 나온 도자기, 족자, 그림까지 모든 재산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천일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능구렁이 유의선이 천일영의 마음을 콕 집었다.

* * *

조선소의 높은 곳에서 군항을 내려다보니 그 규모가 거대했지만, 표호엽의 말대로 항주는 지리적으로 군항을 가질 만한 곳이 원래는 아니었다.

강을 따라다니는 수적은 남경에 있는 군항에서 나오는 배로 양자강을 따라 처리하고, 해적들은 해남도에서 해남파가 상당수 상대하고 있었다.

또한 복건성에서도 군항이 있어 이곳에서 왜구(倭寇)들이 북상하는 것을 막아 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복건성 바로 위에 자리 잡은 절강성은 왜구의 침략이 적어야 했거늘 군항이 들어서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는 했다.

“이상한 일입니다. 절강성은 왜구의 침입이 적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더욱 이상한 일은 왜구가 해적과 함께 행동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군.”

표호엽의 말에 흥미가 없는 듯 대꾸하는 천일영이지만 마음속이 편하지는 않았다.

또한 해적이 왜구와 손을 맞잡으면 그 수가 결코 무시하지 못할 만큼이다.

황실에서 급히 절강성에 군항을 지을 정도라면 이미 그 피해가 크다는 말이다.

녹봉을 받아먹고 사는 놈들은 언제나 사람들이 다 죽어 나간 후에 움직이는 법이니까.

“미흑천도 이 왜구들과 거래가 있었습니다. 미흑천의 본문에서 나온 귀한 도자기가 있었지요. 그것은 사실 고려국의 것입니다. 왜구들이 고려국을 침략해서 약탈한 물건인데 그것이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대협께서 도와주십시오. 은공에 대한 대가는 충분히 지불할 것입니다.”

표호엽의 말에 유의선도 거들고 나섰다. 그가 얼마나 이 일로 인해 왕부에서 추궁을 당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로 볼일이 별로 없는 관과 군이 같이 협력을 해야 할 정도라면 황실에서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는 자가 이 일을 배후에서 지휘하고 있을 터.

그러나 천일영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다.

천마신교의 천마가 군을 도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중원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었다. 관무불가침이 깨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대협, 사실은 이 각이 지난 후에 출항을 합니다. 왜구들과 해적의 배가 백여 척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대협의 마음 아니, 하다못해 항주에 살고 있는 백성만이라도 생각해서 같이 나가 주십시오.”

“거절한다. 관무불가침이다.”

천일영의 한마디에 표호엽은 크게 낙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자존심을 모두 내버리고 꺼낸 말이다.

아니, 자존심도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

이번 일을 실패하면 그는 더 이상 도지휘사의 자리를 지키지 못할 것이었다.

큰 패배를 두 번이나 겪었던 표호엽은 이미 벼랑 끝까지 몰려 있는 상태다.

“알겠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다.”

출항을 앞둔 표호엽을 뒤에 남기고, 천일영과 조선소 밖으로 나오는 유의선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자신이 능구렁이든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은 놈이든, 항주에 살고 있는 백성들을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전에 표호엽이 대패를 하기는 하였으나, 또한 항주에 왜구들과 해적들이 상륙하지 못하게 한 것도 사실.

그러나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많은 백여 척의 배가 오고 있다.

하지만 이 공자가 거절을 한다면 더 이상의 구실을 만들지는 못할 터.

“공자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마음은 절실합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야겠지요. 미흑천의 본문과 재산들을 모두 드리겠습니다. 다만 미흑천의 본문이 있는 땅과 산은 황제 폐하의 소유니 영원히 임대를 해 드린다는 것으로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하지만 받기만 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군.”

“약속은 약속입니다.”

깨끗하게 물러서는 유의선. 그러나 그가 이렇게 물러나기만 하는 사람을 아닐 터다.

분명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한 수를 마음에 품어 두었기에 물러서는 것.

또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천일영도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것으로 이번의 계약은 종료다.

“공자, 하나만 물어보겠소.”

“아는 것이라면 대답하지.”

“혹시 공자님께서는 지천번회(地天飜會)라는 이름을 아십니까?”

“지천번회?”

참으로 발칙한 이름이다.

하늘(天)이 있고 땅(地)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천지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것은 땅이 있고 하늘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것을 뒤집는다는 의미로 번(飜)이라는 글을 사용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늘은 황제이고 땅은 백성이다.

그런데 땅, 즉 백성이 황제를 뒤집어 버린다는 의미다.

그 말만으로도 반역죄로 참수를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이름인데, 과연 그것을 누가 사용한다는 말인가.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뜻이 너무 위험하군.”

“미흑천이 바로 이 지천번회라는 곳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미흑천이 처음 자리를 잡을 때 이 지천번회라는 곳에서 막대한 자금을 대어 주었는데, 이상한 것은 자금을 주기만 하고 이후 아무것도 받아 간 것이 없습니다.”

“그렇군. 그러나 승선포정사사, 나 같은 일개 객잔을 하는 사람에게 황실의 기관에서 조사한 비밀을 말하는 것만으로 죄가 될 터다. 그리고 관무불가침 역시 잊지 말았으면 하는군.”

“허허…… 이것 참……. 알겠습니다. 나중에 찾아뵙지요.”

다시 한번 물러서는 유의선.

그러나 이번 계약에서 유의선은 할 것을 다 했다.

천일영에게 지천번회라는 이름을 가르쳐 준 것만으로도 발목을 움켜쥔 것과 마찬가지.

즉 황실의 비밀을 일반인이 알게 한 것만으로도 개입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지천번회를 언급하여 천일영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후우……. 내 일은 다 끝을 냈으나 도지휘사가 걱정이군.’

원하는 것을 얻은 유의선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출항을 나가는 표호협의 등을 바라본다.

항주에 왜구들과 해적들이 들어서지 못했으면 하는 바람.

그러나 유의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일영은 발길을 돌렸다.

유의선과의 관계가 앞으로 이어질 것이 분명한 이상,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다.

유의선을 다시 상대하려면 눈앞에 쌓여 있는 일부터 처리를 해야 한다.

일단은 미흑천의 노인과 차 한잔하는 것부터다.

* * *

“으으으윽……. 내가 어찌 된 것인가. 여…… 여기는 또 어디고?”

깊게 파인 눈이 무겁게 뜨이고, 난생처음 보는 곳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자, 노병천은 문득 쓰러지기 직전에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길을 막아 내려 한 이후 기억이 끊어졌다.

“처…… 천주님!”

자신의 몸보다 천주의 안위가 떠오르자 노병천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급했던 마음도 잠시, 이내 노인의 마른 손이 이불 위로 툭 떨어진다.

처음 보는 장소. 지금 있는 이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는 그다.

미흑천의 간부였던 자신의 육신을 누이고 편히 잠들어 있는 장소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감옥도 아니고 미흑천에도 이런 장소가 없는데 과연 여기가 어디일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용 가치가 있으니 살려 둔 것인가. 허나 잘못 생각했군. 내 가치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을.”

자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회주 석태충이다.

그렇다면 나를 왜 살린 것인가?

협상의 재료? 그것 또한 아니다.

그만큼의 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다.

노병천은 일단 이곳을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키고 있는 사람도 없고, 문도 열려 있다.

심지어 사람의 기척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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