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노병천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몸 상태가 무척이나 이상하다.
분명 온몸의 뼈가 비틀리는 장권을 세 번이나 맞았는데, 어디 하나 아픈 곳이 없다.
그뿐인가. 몸이 가볍고 날아갈 듯까지 하다.
심지어 고질병이었던 허리까지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매끈하게 움직인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아픈 곳이 한 군데도 없다니?”
아편이라도 먹여서 통증을 느끼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여 노병천은 급히 몸의 이곳저곳을 만져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편 따위가 아니다.
분명 정신도 온전하다.
노병천이 눈으로 육신의 마디 마디를 따져 가며 살펴보는 순간,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노병천의 눈앞에 이상한 흰 물체가 아른거리듯 보였다.
“허억! 까…… 깜짝이야. 이것이 무슨 동물의 박제인가? 아니면 짐승의 털로 상상의 동물을 만든 것인가. 흰색의 늑대인 것도 희한한데 이렇게나 큰 늑대가 있을 리 있나. 누구의 취향인지 참으로 고약하구먼.”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박제가 정말로 기가 막힌 솜씨로 만들어져 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저 눈하며 윤기가 흐르는 새하얀 털.
이 정도로 잘 만든 것을 보면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노병천이 천천히 다가가 박제 위에 손을 올렸다.
정말로 따뜻하고 부드럽다.
“응? 따뜻하다고?”
이것이 무슨 일인가? 체온이 느껴진다. 게다가 가만히 느끼고 있자니 숨을 쉬는 것에 따라 몸도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히익! 살아 있는 것인가?!”
노병천은 기겁을 하여 뒤로 나자빠졌다.
그런데 눈앞의 흰 동물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자신의 목덜미에 있는 옷깃을 물고는 느닷없이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이 아닌가.
그야말로 번개 같은 움직임이다. 노병천은 반항 한번을 못 하고 아등바등거리기 시작했다.
“이…… 이놈아, 이거 놓아라. 거기 누구 없느냐? 사람 살려! 이 짐승 놈아!”
그러나 눈덩이 같은 짐승이 끌고 나간 곳에는 하얀 꽃이 나무에 하나 가득 피어 있고, 깨끗한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다.
마치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듯한 모습.
하늘 가득 휘날리는 저 꽃잎이 이다지도 슬퍼 보이면서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곳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평상 위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모습이다.
“이제 깬 것이냐. 차 한잔 같이하려고 기다리던 참이다.”
“차?”
그때 흰 늑대가 노병천의 옷깃을 놓고는 차를 마시는 남자 옆에 앉는다.
꼬리를 이리저리 살랑거리는 것을 보니 분명 저자가 이 괴물 같은 짐승의 주인인 모양이다.
“누…… 누구시오. 나를 이곳에서 어찌하려고 이러는 것이오!”
“정말로 차나 한잔하려는 것이다. 뒤에 서 있지 말고 이리 오거라.”
노병천은 눈을 끔뻑였다.
자세히 들으니 분명 저 목소리는 자신을 두들겨 팬 젊은 공자의 목소리다.
그런데 저놈이 왜 이곳에?
아니다. 이곳은 저놈의 거처다.
분명 저 괴물 같은 짐승 놈으로 나를 감시하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려는 수작.
노병천은 눈을 돌려 옆을 보았다.
5장 거리에 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냥 가도 상관은 안 하겠다.”
“저…… 정말로 나를 그냥 보내 준다는 말이오?”
“이렇게 바람이 시원하고 흩날리는 꽃잎이 아름답지 않으냐. 이것을 보며 차 한잔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 뿐이다.”
믿기지 않는 소리.
그러나 저 공자의 무공이 어떠한지 잘 알고 있는 노병천으로서는 선택을 할 입장이 아니었다.
노병천은 천천히 다가가 평상 위에 몸을 올렸다.
쪼르르륵.
공자가 따라 주는 차.
용정(龍井)만큼 고급은 아니지만 절강성(浙江省) 임안(臨安)에서 재배되는 천목(天目)이라는 차다.
깊고 깔끔한 맛을 자랑하는 명차 중에 하나로 노병천 역시 무척이나 좋아하는 귀한 물건이다.
후릅.
한 모금 마시고 나니 마음이 진정되고 속이 개운해진다.
노병천은 마음이 진정되니 그제서야 눈앞의 풍경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진 공간. 평온하고 아름답다.
미흑천의 장원에서 침입자를 막기 위해 설치한 기관 장치들과 함께 살아온 노병천으로서는 오랜만에 보는 아름다움 그대로의 모습이다.
“현령에게는 이야기해 놓았다. 네가 마음껏 다녀도 그 누구 하나 너를 잡을 일은 없을 것이다.”
“어째서 저에게 이런 자비를 베푸는 것이오?”
“자비?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저 네 행동이 옛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다.
천일영은 분명 이 노인이 머뭇거리며 물어보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러 굳이 애가 타는 노인의 입으로 물어보게 할 만큼 천일영의 마음은 악독하지도, 비열하지도 않았다.
“궁금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 그렇습니다. 천주는 어찌 되었는지…….”
“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산 것도 아니지만.”
“그…… 그것이 무슨 말이오?”
“목숨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평생 일어설 수도 앉을 수도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 너의 주인을 그렇게 만든 나를 원망하겠느냐?”
“…….”
한 잔의 차가 다 비워진다.
천일영은 노병천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나 노병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눈앞의 경치에 취한 듯, 아니면 차의 향기에 빠져들어 가는 듯 조용히 한 잔의 차를 더 마시며 물가의 소리를 들었다.
“공자는 누구시오. 하다못해 이름 석 자라도 알려 주면 안 되겠소?”
“다들 내 이름을 궁금해하는구나. 내 이름은 천일영이다.”
“천일영? 천마 신교의 그 처…… 천마?”
“천마 아니다.”
노병천은 진심으로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동명이인. 십만대산에 있어야 할 천마다.
응당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무섭기로 유명한 천마가 눈앞에 있다면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은퇴했다. 때려치운 지 좀 됐지.”
노병천은 입에 든 차를 뿜고, 심장을 부여잡았다.
“크헉!”
“왜 그러느냐!”
“그…… 그것이 정말이오?”
“내가 천마를 했든 안 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천마의 자리 따위 뭐가 소중하겠느냐. 내게 중요한 것은 내일도 네가 나와 차를 마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공자의 몸이 일으켜지자 하얀 예랑이 따라나선다.
그러나 순간 공자의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용과 같이 보인 것은 노병천의 착각이었을까.
순간 다시 공자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단순한 착각만은 아니었을 터. 방금 눈에 보인 것은 분명 공자의 그릇이었을 것이다.
“그렇군. 이 경치가 아름다우면서도 슬퍼 보였던 것은 천주가 쓰러졌기 때문이었군.”
후르륵.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노병천은 차를 마셨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질리지 않는다.
들려오는 맑은 물소리가 가슴을 울린다.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결코 저 공자 때문이 아니다.
눈앞에서 흩날리는 꽃잎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병천은 오늘의 슬퍼 보이는 꽃이 모두 떨어지고, 내년에 새로 피어나는 꽃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미흑천의 본문과 지회에서 나온 재산과 돈, 그리고 현상금을 모두 합치니 금화가 이백 냥 가까이 된다.
도자기와 그림 같은 물건들의 값어치가 생각보다 많이 나갔기 때문에, 처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천일영이 원하는 만큼의 돈이 모였다.
천일영이 그동안 미흑천을 부수고 다니면서 그토록 돈에 집착을 했던 이유는 바로 별유천지로 인해 망해 가는 객잔들 때문이었다.
그들이 비록 살수를 고용하는 데 찬동하여 못된 짓에 가담한 것은 사실이지만, 평생을 바친 객잔이 속절없이 망해 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 또한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천일영은 그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하여 돈을 모은 것이었다.
천일영은 초서복에게 받은 종이를 가지고 객잔의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간 객잔은 흔한 인사말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분명 문이 열려 있고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객잔에서 마땅히 풍겨야 할 음식 냄새 대신 오래된 술 냄새만이 어두운 공간을 감돌고 있었다.
“장사는 안 하는가.”
“장사? 안 합니다. 나가시오. 저기로 가시면 별유천지라고 있소이다. 거기서 드시구려.”
구석에 앉아 있는 객잔 주인은 술에 잔뜩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별유천지 방향으로 손짓을 한다.
몸이 많이 상하고 폐인이 된 모습. 그러나 그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또다시 술병을 거칠게 들어 올리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주변에 굴러다니는 술병들의 숫자가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셔 왔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그는 여명 객잔 주인 성강춘이었다.
천일영은 성강춘의 손짓에도 개의치 않고 그나마 깨끗한 탁자를 골라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는지 성강춘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유심히 살펴봤다.
나가라고 해도 그대로 있는 손님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이상한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사람.
이내 그 이상한 사람이 눈앞에 종이 한 장을 보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이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게 뭔데 그러시오.”
눈앞의 종이를 관심 없다는 듯 바라보던 성강춘.
그러나 표정에 작은 변화가 생긴다. 떨리는 눈가와 꽉 다물어지는 입술.
술에 취한 와중에도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종이에 적힌 여명 객잔이라는 이름을 보자 성강춘은 오히려 광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핫. 그 못된 무뢰배 놈들이 돈을 안 내면 죽이겠다고 협박할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별유천지의 주인을 죽이라고 은자 이십 냥을 낸 것을 인정하는 것인가?”
“인정? 하고말고. 분명히 돈을 냈소. 그리고 처음에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발을 담근 죄책감으로 매일 술을 마셨소. 그런데 정말로 웃긴 것이 무엇인지 아시오?”
“…….”
“며칠이 지나도 여주인이 안 죽는 거요. 뭔가 잘못된 게지. 그때부터는 잡혀서 현청으로 끌려갈까 봐 무서워 술을 마셨소. 고문을 당하고 참수당하는 것이 무서워 술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지. 푸하하하핫.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며 착한 척을 했지만 결국은 내 몸의 안위가 제일 중요했던 그냥 그런 놈이었던 거요.”
그러나 천일영은 성강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 한 켠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도망이라도 갔으면 될 것을 끝끝내 이 객잔을 내팽개치지 못하고 같이 지옥 길로 들어가는 사람.
이 작은 객잔이 이 사람의 삶이자 전부인 것을 어찌 모를까.
“크하하하. 오늘이 마지막 날이군. 어쩐지 술이 쓰다 싶었소.”
성강춘은 오히려 마음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죽이러 찾아온 이 사람은 분명 별유천지에서 고용한 사람일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니 고통 없이 죽게 해 주는 것도 가능할 터다.
성강춘의 입으로 또 한 병의 술이 거칠게 들어갔다.
작은 고통이라도 남는 것은 무서우니 조금이라도 더 취해야 했다.
“죽일 것이라면 내가 술에 취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때 죽여 주시오. 지금 정도면 딱 좋겠군.”
성강춘은 남은 술병을 깨끗이 비웠다.
눈가가 떨리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당당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파바박!
하지만 눈앞에 있는 남자는 오히려 몸을 여기저기 찍어 누르기 시작했다.
순간 성강춘은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분명 무림인이 쓰는 혈도인가를 찍어서 술을 깨게 만드는 것이다.
“뭐 하는 짓이오! 술을 깨게 만들다니! 죽는 것조차 고통 없이 죽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내가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소! 제발 부탁이오. 고통 없이 한 번에 죽여 주시오.”
울부짖는 성강춘의 입에서 목 안으로 넘기지 못하고 남은 조금의 술이 흘러내리며 옷을 적셨다.
추악한 자신의 마음이 더러운 겉모습보다 더 비참하다는 것을 말하듯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서러운 눈물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