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천일영은 성강춘의 마음이 꺾여서 무너지기 전에 탁자 위로 조그만 상자 하나를 올렸다.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죽여 주겠다. 하지만 그전에 이것을 보고 죽을지 결정을 하거라.”
“본다고 하여 무엇이 달라지겠소. 이미 끝난 인생이거늘.”
“그런가. 이것은 네 것인데 보지도 않고 버리겠는가.”
이상한 남자.
딱히 무서운 기운을 풍기지도 않고, 웃고 있지는 않지만 그 표정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사건의 내막을 알고 찾아온 사람치고는 이상한 행동이다.
성강춘은 깨어 버린 술 때문에 몸을 으스스 떨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깬 술 때문인지 아니면 무서움 때문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이…… 이것이 무엇인데 그러시오. 열면 독 같은 게 들어 있거나 그런 거요?”
“음……. 이래선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겠군.”
천일영은 성강춘의 눈앞에서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상자에 들어 곱게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
바로 금화 다섯 냥이다.
“이…… 이것이 무엇이오? 왜 돈을 꺼내 드는 것이오.”
“일단 내 여동생과 가족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을 한 것은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일개 객잔의 주인으로 사람을 죽이는 엄청난 일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은 내 책임이기도 하지.”
“그…… 그럼 공자는 살수가 아니라 별유천지의……?”
“내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앞으로의 일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앞으로의 일? 곧 죽을 사람에게 그런 것이 있겠소.”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성강춘이다.
이렇게 허세라도 부리고 강한 척이라도 해야 조금은 덜 무서우니까.
눈앞에 보인 금화.
그것을 왜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여동생을 죽이는 일에 가담한 사람에게 설마 줄 리가 있겠는가.
그 정도로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없다.
그러나 뒤를 이어 공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성강춘의 귀를 의심하게 했다.
“하나. 이 돈을 받고 절강성이 아닌 다른 곳에서 새로 객잔을 여는 것이다. 이곳을 정리한 돈과 금화 다섯 냥이면 그 어디에서든 원하는 곳에 객잔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정말로 믿으라고 하는 말씀이오?”
“그 둘. 별유천지에서 소비하는 술과 재료가 워낙에 많은 터라 그것을 조달하는 작은 상단을 하나 만들 계획이다. 이 돈을 받고 모든 것을 잊은 후 그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
“그 세 번째 이야기다. 정강산에 새로운 별유천지의 분점(分店)을 낼 것이다. 이미 건물은 지어져 있고 물 위에 떠 있는 수상 장원을 객잔으로 바꾸는 작업을 삼 개월 동안 한다. 그 공사 기간 동안 너는 별유천지에서 최고의 숙수들에게 음식 하는 법을 새로 배우거라. 그리고 정강산의 객잔이 개점을 하면 그곳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다만 네가 세 번째를 선택하면 이 금화 다섯 냥은 없는 것으로 한다.”
“그…… 이야기는…….”
“물론 네가 원하는 대로 죽임을 당하는 네 번째도 있다.”
“고…… 공자!”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선택한다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전부 다 잊어라.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 번째를 선택한다면 너는 네 죄를 잊지 말고 마음에 품어라. 그리고 평생을 반성하며 여주인에게 네 모든 것을 바쳐 모셔야 할 것이다.”
멍한 눈으로 공자를 한동안 바라보기를 몇 번. 눈길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가 또다시 공자를 바라보는 성강춘이다.
그리고 이내 성강춘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걷잡을 수도 없을 만큼의 눈물이다.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어째서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해 주느냐는 말이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실수를 한다. 그러나 그 실수라는 것은 꼭 사람이 하라는 법은 없다. 어려운 현실이 사람에게 실수를 하게 만드는 것이지. 네가 처음부터 누군가를 죽이려고 생각했겠느냐. 네가 진정 악한 마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바랐겠느냐. 단지 암담하고 궁지에 몰린 상황이 네 등을 떠민 것이 아니겠느냐.”
“공자…….”
“그러나 용서는 한 번까지다. 두 번째부터는 실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너는 앞으로 두 번째의 실수를 저지를 것이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공자.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까와는 또 다른 뜨거운 물줄기가 성강춘의 눈을 타고 흘러내린다.
아무리 눈앞의 무뢰배들이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것을 얼마나 가슴을 치며 후회했던가.
그러나 이 공자의 말을 들으니 마음속의 모든 시름과 걱정이 눈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사라져 간다.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구나. 너는 어떤 것을 선택하겠느냐.”
공자의 말에 성강춘은 눈을 부릅떴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평생을 손에 잡아 온 숙수의 길.
그것이 꺾이고 무너져 내려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런데 어쩌면 새로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성강춘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공자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결정한 일이다.
“공자 아니, 공자님. 허락만 하신다면 저는 세 번째 길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금화 따위 필요 없습니다. 아니,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별유천지의 숙수님께 음식 만드는 법을 하사받고 싶습니다.”
“그런가. 내일부터 별유천지로 나오거라. 다만 뼈를 깎아 내는 고통과 엄한 숙수의 호통이 기다릴 것이다. 견딜 수 있겠느냐.”
“말을 해 무엇하겠습니까. 허드렛일부터 그릇을 씻는 것까지, 온갖 힘든 일을 가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켜만 주십시오.”
“이름이 성강춘이라고 하였던가?”
“그렇습니다.”
“지금의 눈이 원래의 것이었나 보구나. 좋은 눈이다. 내일 보자.”
“이 은혜 평생을 갚겠습니다.”
여명 객잔을 나서는 길.
천일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용서라는 말이 머리를 맴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수가 얼마인데, 용서를 하고 말고가 있을까.
용서를 할 만큼의 사람도 못 되고 그럴 자격도 없다.
다만 거친 세상이 마음을 갉아먹어 실수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
단지 그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면 그것이 악귀의 길인 것을 알면서도 들어서겠는가.
그래서 이것은 용서가 아니라 용서하는 척일 뿐인 자기 위안이다.
처음부터 용서를 받을 사람은 없다.
단지 용서를 받아야 할 죄만이 있을 뿐.
* * *
명단에 적혀 있는 열다섯 군데의 객잔을 그날 모두 방문한 천일영은 뜻밖의 결과에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무려 별유천지의 숙수들에게 하사를 받겠다며 눈물을 흘리고 용서를 바란 사람들이 아홉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명은 상단에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돈을 받고 다른 곳에 객잔을 열겠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 의외로구나. 사실은 이것을 선택할 사람이 제일 많을 줄 알았거늘.’
여섯의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한계를 보았고 그것 때문에 다시는 숙수를 하지 않겠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그리고 상단에 들어가더라도 금화 다섯 냥은 받지 않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일을 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들 모두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것에 대한 후회의 몸부림을 쳤다.
‘상단이라고 해도 그것이 일반적인 상단과는 다른 것이라 설명을 했건만.’
천일영이 생각하는 상단은 더 좋은 야채와 재료를 찾아다니고, 희귀한 재료나 지방에 알려지지 않은 명주와 차 등을 찾아내어 거래하는 것을 의미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는 일.
무척 고되고 힘든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또한 세상에 묻혀 있는 훌륭한 물건을 찾아내는 보람이 따르는 일이다.
여섯 명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내겠다고 다짐을 했고, 천일영은 그들이 고생하는 만큼 급여를 주기로 하고 모두를 고용했다.
“이제 남은 것은 객잔의 공사와 건청하고 채홍이, 그리고 월영의 무공이군.”
객잔의 공사는 이미 한번 해 보았으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또한 장평택 목수도 어떻게 공사를 할지 대략적인 윤곽을 알 테니 전처럼 많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터다.
다만 이번에는 10층짜리 전각이 아니라 15층짜리 전각을 지을 생각이었다.
미흑천 장원의 바깥채와 안채를 가르는 담벼락을 없애고 그곳에 전각을 올리고, 사방의 공간에 연못과 작은 숲을 만들어 물과 숲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들 생각이었다.
기왕 만드는 객잔이다.
별유천지 본점에서 해 보지 못한 것들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특히 이번에는 물 위에 떠 있는 객잔이다 보니 온갖 것들을 시도해 볼 수 있을 터였다.
“음…… 이 정도면 금화 백 냥에 객잔을 올릴 수 있겠구나.”
천일영은 내친김에 그림까지 그려 그 즉시 장평택을 찾았다.
마침 별유천지의 공사가 끝난 이후 딱히 할 일이 없어 매일같이 빈둥대는 장평택이었다.
나무가 없어서 공사를 하지 못하니 장평택 역시 천일영의 방문이 반갑기만 했다.
그러나 장평택은 천일영이 그려 온 그림을 보고 한 소리 투덜거렸다.
“어째서요?”
“무엇이 말인가?”
“어째서 공자는 항상 하기 힘든 공사만 가지고 오는 것이오. 평범한 공사는 할 생각이 없소?”
웃으며 농담을 하는 장평택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천일영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평범하지는 않은 것만 해 달라고 하니 장평택의 쓴소리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장평택은 농담이라는 듯 고개를 툭 떨구고 이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 15층 객잔을 가운데가 아니라 왼쪽으로 옮기고 사방을 연못과 숲으로 할 것이 아니라 한쪽으로만 몰아서 만듭시다. 그것이 훨씬 공간 낭비가 적을 것이오. 그리고 객잔의 높이는 15층 말고 20층이 어떻소? 나무와 물자만 충분하다면 내 실력으로 올릴 수 있소이다. 산 입구에서 보이는 20층 수상 전각이면 이 객잔은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가 될 것이오.”
이제는 장평택이 천일영보다 한술 더 뜬다.
그가 만들어 낸 별유천지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모양이다.
장평택의 목수 인생 평생에 어려운 공사는 많았어도 신기한 공사를 해 본 것은 별유천지가 처음이었다.
때문에 상상해 왔던 것을 시도해 볼 생각으로 몸이 근질근질거렸다.
이제 별유천지는 천일영에게뿐만 아니라 장평택에게도 평생 꿈꿔 온 객잔의 모습이 되어 갔다.
“이번 일은 모두 장 목수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오?”
“아무래도 서로 생각하는 것이 비슷한 것 같으니 상관없지 않겠는가?”
“으하하핫. 역시 공자는 나와 통하는 게 있구려. 내일부터 당장 공사에 들어가겠소.”
“부탁하지.”
팔목을 걷어붙이며 신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 장평택 목수를 보고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신경 써야 할 일이 하나 해결되어 얼떨떨한 기분이 몸을 감쌌다.
그러나 장평택을 믿기에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이십 층 객잔이면 중원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 되겠군. 이건 하룻밤에 얼마를 받아야 할까.”
미묘한 웃음이 나온다.
별유천지의 분점이 본점보다 더 높은 값을 받으며 손님을 받을 수 있다.
게다가 공사비는 모두 미흑천에서 나온 것.
철전 한 푼까지 빼앗은 돈으로 객잔을 지으니 그 맛이 각별하다.
“이영이를 죽이려 했던 놈들이 엉뚱한 선물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군.”
장평택은 분명 상상 밖의 객잔을 만들어 낼 터다.
해 보고 싶은 것을 다 하겠다는 말은 미친 짓을 저지를 수도 있다는 의미.
천일영은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세상은 그것을 미쳤다고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은 언제나 중원을 움직이고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똑같은 객잔이 중원에 수만 개나 있는데 또 똑같은 것을 짓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미친 짓이지.”
장평택이 모든 일을 떠맡아 준 덕분에 천일영은 월영의 무공을 손봐 줄 만큼 시간이 생겼다.
월영이 깨달음을 얻을지 혹은 이대로 일류 고수에 머무를지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었다.
‘내가 직접 지도를 할 터인데 깨달음을 못 얻으면 안 되지. 거친 방법을 써 볼까.’
천일영은 객잔에 이어 월영에게도 어떤 미친 짓을 베풀어 줄지 생각에 잠겨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