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화르르륵. 쿠웅…… 쿠우우웅…….
도지휘사 표호엽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고, 또한 인정할 수 없어서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백여 척의 왜구와 해적들로 연합된 침략선.
그들은 항주의 지근거리(至近距離)까지 다가왔다가 군함을 발견하고 그대로 닻을 내린 채 이틀을 움직이지 않았다.
때문에 대치하기를 오늘로 삼 일째가 되어 갔다.
그러나 항주와 근거리임을 감안하여 물과 식량을 삼 일치만 가지고 나왔기 때문에 표호엽이 참지 못하고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이 조금 전의 일.
‘불과 반 시진 전에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 무슨…….’
눈앞에 자신의 배가 불타고 있었다.
황실이 자랑하는 최신의 군함이고, 도지휘사가 타고 있는 지휘선이다.
다른 군함보다 오히려 더 큰 배인데 벌써 반이 가라앉았고, 배 안에 들어 있는 화약이 터지면서 사방으로 불길과 파편이 비산하고 있었다.
“도지휘사님, 피하십시오. 이제 이 배는 견디지 못합니다.”
“너희들은 탈출해라. 나는 이 배와 운명을 같이하겠다.”
“안 됩니다, 도지휘사님!”
부관과 항해사들이 표호엽의 팔을 잡는다.
그러나 표호엽은 마치 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꼼짝도 안 하고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불타오르는 것은 오직 자신의 배뿐이다.
“이놈들, 처음부터 이것을 노린 것이냐. 항주로 침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우리를 사냥하려고 했단 말이냐!”
수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왜구들과 해적들은 오직 표호엽이 타고 있는 지휘선만을 노리고 공격해 들어왔다.
다른 군함들은 마치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또한 해적들과 왜구들은 표호엽이 타고 있는 배가 침몰하며 지휘함이 제구실을 못 하게 되자, 신속하게 다른 군함들을 포위해 나갔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전제로 작전을 실행한 것처럼.
‘속은 것인가!’
또한 실제 백 척의 배가 오고 있다고 했고 처음에는 그 정도의 숫자만 보였지만, 지금 포효엽의 눈앞에 보이는 적들의 크고 작은 배들은 언뜻 보아도 삼백 척이 넘는다.
“식량과 물을 삼일 치만 가지고 나왔다는 것을 적이 알고 있고, 심지어 백 척의 배만 항주로 오는 것처럼 눈속임까지 했다. 이것은 분명 군부에 첩자들이 있다는 말. 그것도 한둘이 아니구나.”
콰아아앙!
지휘선의 가장 깊숙한 바닥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포탄과 아직 물에 젖지 않은 화약들이 일제히 터지는 소리다.
높이가 십 장이 넘는 불길이 지휘선 한가운데를 뚫고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그 불길은 사방으로 퍼지며 표호엽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유의선 승선포정사사, 뒤를 부탁하오.”
시뻘건 불길이 표호엽을 집어삼키는 순간, 지휘선이 거대한 빛과 함께 사방으로 잔해를 흩뿌리며 폭발했다.
* * *
표호엽이 지휘선의 폭발과 함께 불길에 휩싸여 가던 그 시각.
천일영은 문득 가슴속을 할퀴듯 스쳐 지나가는 불길한 생각에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랜 시간 전장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천일영으로서는 웬만하면 틀리지 않는 직감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이런 느낌. 천마신교를 떠났는데도 이런 기분이 느껴지다니……. 아니다, 내가 너무 지나치게 예민할 것일 수도 있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마음의 불안함을 털어 버리려고 애쓴다.
엄습해 오는 불길함이,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이곳에서 현실이 될 일은 없다고 믿었다.
피와 살육, 그리고 음모와 불길함을 잔뜩 머금은 죽음의 그림자가 천마신교를 떠난 자신에게 또다시 찾아올 일은 없을 것이라 되뇌면서.
천일영은 자신의 가슴속 어두운 느낌의 잔향을 털어 내며 월영에게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너에게는 무공의 향상을 위한 각오가 있느냐.”
“당연합니다. 무공의 향상을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특별히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 별유천지의 공자가 새로 지은 장원 옆 연무장으로 오라고 했을 때, 월영은 영문을 가늠하지는 못했지만, 한편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다른 곳도 아닌 공자의 장원 옆에 있는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하라는 말에, 혹시 무공에 관련된 기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월영은 공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기대감이 현실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네가 무공이 정체되고 있는 이유를 너는 아느냐?”
“그것은 제가 깨달음을 얻지 못해서입니다. 이미 일류 고수가 된 지 십 년. 부끄럽지만 아직 깨달음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깨달음의 단서가 보입니다.”
“네가 생각하는 깨달음의 단서가 무엇이냐.”
“검법과 검법의 연결입니다. 저는 심오한 검의 이치가 그것에 있다고 생각하여 여러 가지 검법을 섞어 새로운 초식이 완성될 때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 있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월영의 말은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굉장히 일리 있는 말로 느껴질 것이다.
사람마다 깨달음을 얻는 방법은 다르다.
그리고 각기의 단초를 느끼는 것도 모든 무인이 같지 않다.
무공의 심오함이란 깨달음까지 수십 수백 개의 길이 있고, 그것은 모두 틀린 길이기도 하고, 또한 모두 맞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일백의 초절정 고수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 깨달음은 일백 명 모두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깨달음으로 절정 고수가 되려면 앞으로 오십 년은 있어야겠구나.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으면 다행일지도. 지금은 검 이외의 것을 생각해야 깨달음을 얻을 것인데 너의 강직한 성품이 급하게 강해지려고 하여 엉뚱한 길로 접어든 모양이구나.’
천일영의 표정에 비릿함이 배어 나왔다.
가끔씩 있었다.
꽉 막힌 채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에는 딱히 방법이 없다.
강제로 비틀어서 깨 버리는 방법뿐.
깨달음을 얻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을 하면 월영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아마 왜 그래야만 하냐며 목청을 높여서 불만을 토하고 집으로 갈 것이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우격다짐이다.
어차피 월영은 탈마의 경지를 가진 천일영 앞에서 도망가지 못한다.
튀어도 다시 잡아 오면 그만이다.
“이 검을 빌려주마. 네 검을 이리 내놓아라.”
“네? 아…… 알겠습니다.”
시장에서 파는 제일 싸구려 칼 대신 월영의 손에 들려진 검.
검집에서 뽑아 보니 오묘한 빛이 감도는 것이 한눈에 예사롭지 않은 것을 알아볼 수 있다.
“네게 빌려준 검은 만년한철로 만든 것으로 무극지검이라고 한다. 허나 보통의 만년한철이 아니다. 이 검은 만년한철 중에서도 가장 질이 좋고 순도가 높은 것을 십만 번 망치로 때리고 담금질을 하여 만든 것이지. 아마 돈으로 치면 금화가 천 냥 정도 할 것이다.”
“공자님, 이것은 천하의 명검입니다. 이것을 저에게 빌려주시고 어쩌시려는 것입니까?”
“간단하다. 내가 너에게 지금부터 검을 날릴 것인데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검으로는 금방 부러질 테니까.”
“네에? 그것이?! 헉!”
휘이잉. 채챙. 채채챙.
순식간에 너덜너덜한 월영의 옷자락이 몇 개로 베어져 하늘로 솟구친다.
검이 만들어 내는 풍압.
날카로운 바람이 월영의 옷깃을 잘라 내고 살을 베어 냈다.
천일영은 월영의 싸구려 검을 들고 귀신같은 형상으로 공격했다.
“크윽! 공자님! 저에게 왜 이러는 것입니까?”
“네가 나에게서 이기면 이야기를 해 주지. 지금부터 반각에 하나씩 네 몸에 있는 뼈를 부숴 버릴 것이다. 또한 방심을 하면 죽을 터. 살고 싶다면 막아 보거라.”
“공자님! 미친 거 아닙니까?”
빠각! 뿌드득!
“끄악!”
어느새 날아온 검이 월영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산산조각으로 부순다.
보이지도 않은 일격.
천일영은 흡사 지옥으로 보낼 수 있는 권능을 가진 염라대왕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월영이 들고 있는 무극지검을 내리쳤다.
카앙!
“한 번만 더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담으면 혓바닥부터 벤다.”
“으으윽!”
월영은 빠르게 날아오는 검의 서늘한 압박을 온몸으로 느끼며 기어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공자의 이 미친 짓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월영의 표정이 고통과 함께 일그러졌다.
휘잉! 촤아악!
“크윽! 젠장!”
천일영의 검이 월영의 옆구리를 스치듯 잘라 내고 지나갔다.
시장에서 파는 싸구려 검이 이렇게 예기를 풍기며 얇게 포를 뜨듯 살을 벨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며, 월영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급히 신형을 뒤로 날렸다.
‘저 검이 이렇게 날카로울 리가 없지.’
검에 얇게 둘러져 있는 검강.
무림에서는 이 검강을 얼마큼 길게 만들 수 있느냐로 무공의 높고 낮음을 재는 척도로 사용을 하지만, 지금 공자의 경우에는 반대다.
눈에 보이지 않도록 아주 얇고 세밀하며 예리하게 검을 두르고 있는 형태.
검강 자체를 날카롭게 만들어 검날을 대신하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검강을 길게 만들어 내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어려운 일.
‘이 사람, 정말로 초절정 고수가 맞는 걸까? 아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분명 살아남을 수 있는 단초가 있을 것이다.’
스치듯 지나간 것 같은데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가 만만치 않다.
월영은 지금에 와서야 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내공뿐만 아니라 분명 공자의 검술 자체도 월영 자신보다 몇십 배는 더 뛰어나니까.
채챙. 채챙. 채채챙.
“좀 더 내게 보여 줄 검법이 많지 않느냐. 겨우 이 정도로는 반각이 지나고 뼈가 부러지기 전에 먼저 검에 찔려서 죽게 될 것이다.”
“윽……!”
뻔뻔스러운 얼굴로 거짓말을 내뱉는 천일영이지만, 월영은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서늘한 표정은 그야말로 살인귀처럼 보였으니까.
또한 날카롭게 갈린 듯한 기운이 월영의 온몸 구석구석을 찌르고, 공기에 섞인 살기는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천일영이 의도한 거짓말은 월영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오직 검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채앵. 채챙. 채채챙.
월영은 태청검(太淸劍)과 소청검(少淸劍)을 섞어 새로운 초식을 짜 검을 날렸다.
평상시에 쓰던 대로 두 개의 무공을 섞어 초식을 짠 것이었다.
그러나 월영은 사실 이후에 유운검(流雲劍)의 초식을 하나 더 짜서 넣을 생각이었다.
그동안 두 개의 검법을 합쳐서 새로운 초식을 만들어 냈다면 이번에는 세 개의 검법을 섞을 생각을 한 것.
평소 깨달음을 얻는 단초로 생각했던 것이 공자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월영은 이를 악물었다.
당장은 그것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 월영이다.
휘이익. 채앵! 채앵!
천일영은 묵묵히 검을 날리고 있지만 속으로 조금의 감탄을 내뱉었다.
천부적인 재능이랄까.
월영이 사용하는 초식의 연결은, 아무리 노력해도 못 하는 무인은 죽을 때까지 못 한다.
그것이 비록 초절정 고수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월영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증거이기도 했다.
“천천히 검을 받아 주다 보니 반각이구나.”
“크윽!”
순간 천일영의 검결이 직선과 유선을 모두 그리며 현란하게 날아온다.
월영은 그 검결에 잠시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마음속으로 깊은 감탄사를 토해 냈다.
‘어찌하여 검결에 두 가지의 선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직선과 유선이 같이 존재한다는 것은 들어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이내 천일영의 검이 월영의 왼쪽 팔꿈치를 강하게 때리며 뼈를 조각내자 월영은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파각! 드드득!
“으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뼛줄기를 타고 온몸으로 흐른다.
단순히 뼈가 부러진 곳만 아픈 것이 아니다.
공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월영은 맞은 곳보다 오히려 전신에 전해지는 아득한 충격이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또다시 날아오는 검.
월영은 미칠 듯한 고통을 뒤로하고 다시 검을 들어 막아 내기에 급급해졌다.
채앵.
‘이제 완전히 덫에 걸렸군. 그러나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제 슬슬 진짜 고생 좀 시켜 볼까.’
천일영은 마치 지금이 너무도 즐겁다는 듯 만면에 잔인한 웃음을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