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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53화 (54/270)

53화

천마라는 이름 따위 누가 사칭을 하든지 상관없었다. 미련도 없고 애착을 가져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천일영은 화가 났다. 이름이 가진 무게는 약자를 굴복시키고 찍어 누르기 위함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밑에서 무게를 견디기 위한 것이었다.

“끄으으윽!”

“천마라는 사람이 팔 한번 잡혔다고 신음 소리를 내다니 수련을 게을리한 모양이군.”

“우…… 웃기지 마라. 네놈이 잡은 곳은 다…… 다친 곳이다. 그래서 신음을 흘리는 것이다.”

“그렇군. 그런 거라고 해 두지.”

천일영은 천마라는 자의 팔에 내공을 실어 뒤로 밀어냈다. 그러자 남자는 균형을 잃으며 뒤로 나자빠졌다.

순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마라는 사람이 너무도 꼴사납게 뒤로 넘어졌으니까.

쿠당탕.

그러자 천마가 넘어지는 소리에 다른 방문이 열렸다. 그들은 천마라는 자와 함께 기루로 들어온 무인들.

그들은 몸을 일으키고 있는 천마를 보고 얼굴에 노기를 띠며 급히 뛰어나왔다. 총 세 명의 사람들이다.

“천마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술에 취해서 균형을 못 잡으시는 게 아닙니까?”

“그…… 그렇지. 내가 술에 취해서 뒤로 넘어진 것이지.”

천마라는 자는 당황하며 객잔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허나 이미 그들의 눈에 의심의 빛이 서려 있었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잡힌 팔목은 욱신거리며 통증이 올라왔고, 구겨져 버린 체면에 얼굴은 달아올랐다. 자신의 팔목을 잡은 자, 보통이 아니다.

‘딱히 기운을 풍기지 않은 것을 보니 무인은 아니다. 뭔가 다른 한 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눈앞으로 검이 날아가도 과연 네놈이 막을 수 있을까?’

비록 천마를 사칭하고 있지만 절정 고수. 무공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남자는 검을 빼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세 명의 남자들도 눈빛을 교환하며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감히 천마님께 신경을 안 쓰고 넘어지게 만들다니 천혜향루라는 명성이 헛것이구나. 내 객잔을 모두 불태워 버릴 것이다!”

“그렇다. 천마님이시다. 그런데 감히 바닥에 주저앉게 만든 자가 누구냐. 목이 베여도 불만을 말하지 못할 터!”

수하들이 떠들고 있는 사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 기회를 노리고 있던 천마라는 자가 검을 날렸다.

천일영의 목을 노린 공격. 상대편이 이상한 수를 쓴다면 기습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이 방법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상대가 천일영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휘이이익!

탁.

천마라는 자는 눈을 끔벅였다. 자신이 날린 회심의 일검. 무림에서도 이 검을 막을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런데 도통 눈앞에서 일어난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단 두 개의 손가락.

그것으로 자신의 내공이 가득 담긴 검날을 잡고 있었다. 소름이 끼쳐 올랐다.

“조용히 끝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네…… 네놈, 어찌하여 검을 막아 내는 것이냐. 그것도 손가락으로!”

“천마라는 자의 검이 이렇게나 가벼워서 무엇에 쓰겠느냐.”

파바박!

순식간에 혈도를 찍어 누르자 천마라고 불리는 사람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분명 정신도 온전하고 입도 벌어지며 말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몸만큼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서야 상대가 초고수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마지막 자존심인지, 혹은 계속해 왔던 거짓말을 지금에 와서 무를 수는 없었던 것인지 뻥긋거리는 입은 아직도 천마 타령이다.

“네…… 네놈, 지금이라도 용서해 줄 테니 혈도를 풀거라. 내가 술에 취해서 실수를 한 모양이다.”

“천마라면 극마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술기운을 날려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 술에 너무 취해서 술기운을 날리는 법을 잊어버렸다.”

다시 한번 시뻘게지는 얼굴. 궁색한 변명이다. 하지만 이해도 안 간다.

절정 고수다. 어디 가서 천마 행세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끔 기루에 먼저 손님으로 와 있던 무인이 의심해도 때려눕히면 그만이었다.

무림에는 초절정 고수와 절정 고수의 수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만큼 오르기 힘든 경지니까.

남자는 몸을 움직이려 애썼지만 눌린 혈도로 인해 감각조차 사라지고 있을 때, 순간 옆에서 불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사라지는 감각조차 강렬하게 느낄 정도의 분노였다.

“으아아아, 내 금화 다섯 냥!”

“으잉?”

순간 윤의강의 신형이 튀어 나갔다. 쓰러진 천마라는 자를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는 세 명의 무인들. 삼류 무인들이다.

윤의강은 그들에게 몸을 날려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이놈들을 상대로라도 울분을 풀기 위해서였다.

퍽. 퍼억. 퍼어억!

“그냥 술이나 먹고 갈 것이지 왜 행패를 부려! 내 돈 어쩔 거야! 금화 다섯 냥이라고! 물어낼 거냐? 엉?”

“커헉. 사…… 살려 주…….”

“끄악, 대…… 대협!”

하오문에 들어오기 전, 윤의강도 일류 고수의 경지까지 들어선 사람이었다.

일이 꼬여 죽기 전에 천마가 구해 줘서 목숨을 부지했고, 이후 하오문에 자리를 잡게 된 사람인 만큼 상당한 고수다.

그는 눈이 반쯤 뒤집어져서 세 명의 무인들의 뼈까지 꺾어 냈다.

뚜둑. 뚜두둑.

“더 하면 죽을 것이다. 그만해라.”

“이놈들, 사칭할 사람이 없어서 천마를 사칭하다니 용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내 금화 다섯 냥!”

사지가 부러져 널브러진 무인과 천마라는 자. 천일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놈들을 어찌 처리할까 곤란한 것이었다. 소동이 일어나 천마신교에서 눈치라도 채면 곤란하니까.

파바밧.

천일영은 천마를 팔아먹는 남자와 나머지 무인들의 뒷목을 세 번 짚었다.

순간 네 명의 사기꾼들은 입도 벌리지 못하고 온몸이 굳어 버렸다. 숨만 겨우 쉬고 있을 뿐. 천일영은 윤의강에게 전음을 날렸다.

[지금 천마신교의 정문으로 가면 아마 강환수라는 자가 책임자로 있을 것이다. 그에게 이놈들이 천마라고 사칭했다고 넘겨주거라. 이 혈도는 나밖에 풀지 못하니 입도 벌리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이다.]

[그…… 괜찮을까요? 만에 하나 잘못되면 공자님께서 곤란해지지 않을까 합니다만.]

[강환수이기 때문에 괜찮다. 그리고 원래 천마를 사칭하는 자는 즉결 처형이다. 은거 기인을 팔아먹던 내 이야기는 알아서 하고.]

무명암살대가 해체를 한 이후 대부분의 단원들은 그동안 고생을 했다는 명분하에, 천마신교의 성채와 성벽을 지키는 일로 배치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마왕들의 본심은 천일영과 무명암살대라는 구심점이 사라진 단원들이 밖으로 임무를 나간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여 꾸민 말이지만, 이미 오랜 전쟁과 살수 생활에 지친 무명암살대의 무인들은 거짓임을 알면서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급여로 나오는 돈도 괜찮았고 매일같이 죽음을 목전에 두는 생활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중 정문의 책임자인 강환수는 천일영이 제법 아끼던 사람으로, 이 일의 경위를 알게 된다 해도 입을 다물 것이었다.

“증인으로 기루 주인이 같이 가 줘야겠군.”

“아이고. 은혜를 입었습니다. 가짜 천마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공자님이 안 계셨다면 어찌 되었을지.”

“절정 고수인 만큼 대단한 자이긴 하다. 속을 만도 하지.”

윤의강과 함께 밖으로 기루 주인이 나서고, 방에는 은소혜와 천일영만이 남았다.

민가희는 한눈에 반한 천일영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사시나무 떨듯 부들거리는 은소혜를 보자 송체란이 민가희의 목덜미를 끌고 나갔다.

조용해진 기루의 방 안. 천일영은 은소혜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너도 여기에 있지 말고 가서 쉬거라.”

“아닙니다. 떨리는 것은 괜찮아질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는데 공자님을 두고 갈 수는 없지요.”

은소혜는 억지로 천일영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술병을 들어 잔에 따르려 했다.

허나 떨리는 손 때문에 술병과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천일영이 은소혜의 팔을 잡았다.

“손을 이리 내보거라.”

“손이요?”

얼떨결에 잡혀진 손으로 따스한 무엇인가가 들어왔다.

은소혜는 즉시 마음이 안정되고 떨림이 멈추는 손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용한 의원이라 할지라도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공자님은 참으로 신기한 분이십니다. 천마라는 자를 꼼짝도 못 하게 하시질 않나. 제 손과 마음을 진정시켜 주시기까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공자님은 제 마음속의 천마님이 되신 듯합니다.”

“천마?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천마가 아닌 것을.”

“역시 그렇지요? 공자님 같은 분이 천마일 리가요. 오호호.”

은소혜의 얼굴이 빨개졌다. 자신의 마음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며.

손님에게 연심을 품는 것은 기녀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이지만, 은소혜는 얼굴만큼이나 달아오르는 마음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조금만 더 손을 잡고 있어도 될까요?”

따스했다. 은소혜는 손에 느껴지는 열기만큼이나 마음도 열기에 타들어 가는 것을 느끼며 하룻밤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무정하게 흐르는 것을 아쉬워했다.

* * *

“금화가 열 냥!”

“오호, 놈들 제법이구나.”

기루로 돌아온 윤의강의 얼굴이 찢어질 듯한 웃음과 함께 헤벌쭉해졌다.

천마가 말한 대로 천마신교의 정문에는 강환수라는 책임자가 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에게 증인과 상황을 설명하자 무려 금화 열 냥이라는 거금을 내놓은 것이었다.

천마를 사칭하고 다니던 사 인조의 태산파 무인들은 상당히 유명한 인물들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벌인 사기 행각에 천마신교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던 참이다.

[천마님께서 사라지고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발표했는데 놈들이 전국에서 사고를 치다 보니 천마신교에서도 골칫덩어리였던 모양입니다. 무려 금화를 열 냥이나 현상금으로 걸었고 심지어 용모파기까지 있었습니다.]

[금화가 다섯 냥에서 열 냥이 되었으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놈들은 천마님이 잡으신 것이지 않습니까? 이 돈은 천마님께서 가지고 가시지요.]

[넣어 둬라. 대신 나중에 부탁 하나만 하지.]

윤의강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천마라는 이 사람은 정말 그릇이 크다고 되뇌면서.

금화 열 냥이면 아무리 대범하다고 하는 사람도 움찔하기 마련인데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돈을 넘긴다.

“오늘은 술도 공짜고, 마저 놀아 볼까요?”

“그러지.”

다시 들어온 기녀 셋과 민가희, 그리고 송체란까지 다섯의 기녀를 독식한 윤의강은 돈도 벌고 여자에게 둘러싸여 기분이 찢어질 듯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날이었기에 윤의강은 민가희의 목덜미를 잡고 은소혜에게 눈을 한 번 찡긋하고는 기녀들에게 파묻혔다.

뜻을 알아차린 은소혜도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생전 처음으로 남자의 품에 안겨 술잔을 기울였다. 천일영의 품은 정말로 따스하고 행복했다.

* * *

“꼭 다시 들러 주시겠습니까?”

“노력은 해 보마.”

눈물을 글썽이는 은소혜가 잡은 손을 놓지 않는다.

천일영과 윤의강, 은소혜와 다섯의 기녀들은 밤새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읊었다. 그리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은소혜는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다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것입니다.”

“귀주성에는 다시 올 일이 있으니 때가 되면 들리도록 하지. 허나 기다리지는 말거라.”

천일영은 은소혜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윤의강과 기루를 나섰다.

헌데 밖으로 나오자 귀천명에 사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길을 가는 내내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은 점점 커지고, 기어이 혼란의 원인을 보게 된 천일영은 씁쓸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다.

웨에에엥.

파리가 날아다니는 곳. 천마신교의 성채를 지키는 정문 앞에 네 명의 머리가 나무에 꽂혀 전시되어 있었다.

어젯밤 천마를 사칭했던 무리들. 목이 베어져 몸통은 땅바닥에 널려 있고, 온전히 보존되어 죽음이라는 경고를 알려야 할 머리조차 난도질당해 찢겨 있었다.

“중원이 혼란의 시대로 접어 들어갈까 걱정이구나. 정마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천마신교를 나왔는데, 그것이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앞으로도 천마를 사칭하는 놈들은 계속 나올 것이다.”

“그래도 정마대전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어제 저놈들을 보고 생각난 것이다.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었다.”

“말씀하십시오. 그 무엇이든 공자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천일영의 말에 윤의강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도 모르게 숙여지는 머리다.

그만큼 천일영은 패왕의 기질이 있었고, 윤의강이 다시 한번 마음의 충성을 내보이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천일영의 말에 윤의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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