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다음 날 아침.
천일영은 비싼 비단옷을 입고 길을 나섰다.
곱게 빗어 넘긴 머리는 한 올도 정갈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고, 원체 단정한 얼굴은 평소보다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지나가는 길에 마을의 아낙들과 소저들의 얼굴이 터질 만큼이나 붉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천일영은 한동안 휘적거리며 옆 마을로 건너가 커다란 현판 앞에 섰다.
매화 양조장.
천일영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양조장은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팔색 양조장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술 향기와 누룩을 빚는 냄새는 비교적 강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 병의 술 뚜껑을 열지 않은 매빙화홍주만도 못한 향이 주가 전체를 맴돌았고, 마셔 보지 않았지만 형편없는 술의 질이 가늠될 정도.
허나 천일영은 시침을 떼고 눈앞서 빗자루질을 하는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양조장의 주인에게 할 말이 있으니 안내하거라.”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주인어른은 바쁘십니다.”
“술을 사러 왔다. 대략 오만 병 정도 구입할 예정이다.”
“오…… 오만 병?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남자는 빗자루를 집어 던지고 크게 놀란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눈 세 번 깜박일 시간이 지나자 실눈을 가진 남자가 급하게 뛰쳐나왔다.
서두르는 것을 보니 양조장의 경영이 좋지만은 않은 듯 보였지만 천일영은 애써 모른 척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 종놈이 몰라뵙고 실례를 한 모양입니다.”
“크흠, 손님 대접이 시원치 않군. 나름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건만.”
“저놈은 제가 나중에 단단히 교육을 시키겠습니다.”
손님을 접대하는 방에 앉아 있으려니 매화 양조장 주인이 몸을 훑는다. 돈이 정말로 많은 사람인지 가늠해 보려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비단옷과 단정하고 잘생긴 얼굴을 본 탓인지 실눈을 더욱 가늘게 뜨고 양조장 주인이 목청을 높였다.
“저는 매화 양조장 주인 소술청이라고 합니다. 자랑하는 술이 몇 개 있지만 가장 자신 있는 술부터 맛을 보여 드리지요. 여봐라, 술을 가져오너라.”
“어떤 술을 들일까요?”
“매빙선홍주(梅氷宣弘酒)를 가져오면 될 것이다. 안주인에게 들고 오라 일러라.”
“예.”
반 다경이 지나자 곱게 옷을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이 젊은 여자 한 명과 술병을 들고 들어섰다.
그런데 이 여인 둘이 하는 짓이 조금 이상했다. 보통 안주인이라면 남편의 곁에 앉는 법인데, 천일영의 곁에 몸을 밀착시키고 앉았다.
게다가 젊은 여자는 딸인 듯싶은데 마찬가지로 곁에 달라붙어 은근히 가슴을 들이밀었다.
‘이놈들, 여심으로 정신을 혼란케 하려는 것인가. 자랑하는 술이 아니라 재고가 많은 술을 팔 목적이군.’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천일영은 시치미를 떼었다. 불과 어제 귀주성 제일의 기녀들과 놀다 온 천일영이다.
양옆에 앉은 여자들은 기녀들의 일 할 정도에 불과한 얼굴과 자태. 마음 같아서는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지만, 마음을 억눌렀다.
퐁.
양조장 주인은 매빙화홍주(梅氷花弘酒)의 가짜에 지나지 않는 매빙선홍주(梅氷宣弘酒)의 술병을 자신 있게 열었다.
허나 열린 술병에서는 매화 향과 박하의 향이 짙게 배어 나왔지만, 박하 향은 너무 강했고 매화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또한 눈앞에 따라지는 술 줄기를 보아도 색 또한 선명하지 않았다.
천일영은 딱히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술잔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런데 갑자기 안주인이라는 여인이 술잔을 들어 올려 천일영의 입에 대는 것이 아닌가.
“괜찮소. 내가 마시겠소.”
“아잉. 제가 드리겠사옵니다. 편하게 드세요. 오호호호.”
간드러진 목소리가 흩어지는 방에서 천일영은 억지로 술에 입을 대었다.
술이 넘어감과 동시에 미간도 구겨졌다. 마치 토할 것 같은 맛. 박하 향이 너무 강해서 술 자체의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크흠, 이게 그 유명한 매빙선홍주인가. 내 맛을 잘 보았소,”
“어떠십니까. 오만 병을 구입하신다고 하셨는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술입니다요.”
“어머, 그럼요. 오호호호.”
이번에는 젊은 여자 쪽에서 색기를 뿜으며 장단을 맞췄다. 입가심을 해서 이 더러운 맛을 지우고 싶었지만 천일영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훌륭한 술이군요. 헌데 맛이 조금 모자라지 않소? 내 이곳에 오기 전에 팔색 양조장이라는 곳을 들렀는데 그곳의 술이 더 나은 것 같군.”
“아? 팔색 양조장에 다녀오셨군요. 허나 그곳은 큰 화재가 있은 이후로 더 이상 술을 만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술이 더 맛있지 않습니까?”
“아니, 팔색 양조장의 것이 더 낫소.”
순간 소술청의 눈이 가늘게 변했다. 여색을 쓰면 보통은 말을 얼버무리고 계약을 무르지는 않으려 한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너무도 완강하게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허나 소술청은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고를 모두 털어야 했고, 또한 새로 만드는 술까지 모두 팔아 치워야 했으니까.
“오만 병을 구입하신다면 제가 특별히 반값에 드리지요. 한 병당 철전 칠십 개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됐소. 그보다 팔색 양조장의 매빙화홍주와 같은 술을 만들어 판매하면 한 병당 동전 열 냥에 사도록 하지. 그것이 안 되면 그냥 가겠소.”
“도…… 동전 열 냥? 그것이 정말입니까?”
“팔색 양조장은 주인의 말대로 망했소. 그러니 이곳과 거래를 할 수밖에 없는데 모자란 술로는 내 성이 차지 않는군. 허나 매빙화홍주와 같은 술을 만들 수 있다면 당장 선금이라도 내놓지.”
천일영은 만금전장의 전표를 내놓았다. 무려 금화 오십 냥짜리 전표. 그것을 본 소술청과 여인 두 명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금이다. 이 돈이면 사치와 낭비를 일삼는다 해도 대를 잇고도 돈이 남았다.
“매빙화홍주와 같은 술. 가능하오?”
“무조건 가능합니다. 삼 일 후에 다시 오시면 똑같은 맛의 술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금화 오십 냥짜리 전표는 맡겨 두지. 허나 만약 삼 일 후에 매빙화홍주와 같은 술을 내놓지 못하면 어찌 되는지 알고 있겠지? 선금을 받고도 지금과 같은 술을 내놓는다면 조용히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오.”
천일영은 무극지검을 들어 올리며 기세를 흘렸다.
거래라는 것은 선금을 받은 이상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 하는 법. 만약 약속을 어길 때에는 선금보다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거나 현청으로 끌려가서 사기죄로 복역을 당하게 되었다.
소술청은 이것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눈앞의 돈에 현혹되어 기어이 전표를 품에 넣었다.
“약조는 지키겠습니다.”
“약조를 지키겠다는 말만 하지 말고 계약서. 빨리 종이와 먹을 가져오시오.”
“계약서. 그…… 그렇지. 써야지요.”
“계약 조건은 금화 오십 냥을 선금으로 받고 삼 일 후에 매빙화홍주와 같은 술을 만들지 못할 때, 첫 번째 받은 선금의 두 배인 금화 백 냥을 낸다. 만약 지불할 여력이 없다면 매화 양조장을 모두 넘긴다.”
“저기…… 그건 너무 과한 조건이 아닙니까?”
소술청이 식은땀을 흘리며 붓을 멈추었다. 허나 이내 천일영의 이어지는 말에 눈을 꾹 감고 계약서를 써 내려갔다.
“두 번째, 매빙화홍주와 같은 술을 만들면 첫 거래에 오만 병. 그리고 다음 해에 두 번째 거래를 할 때에는 십만 병을 거래하고 대금은 선불로 지급한다. 금액은 병당 동전 열 냥.”
“전부 다 썼습니다요. 이거면 되겠습니까?”
천일영은 계약서를 한번 훑어보고 품에 넣었다. 소술청이 뭔가 숨기는 기색을 보였지만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천일영은 웃기만 했다.
“삼 일 후에 보겠소.”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천일영은 곁에 자꾸 달라붙는 여자들을 내동댕이치듯 떼어 내고 밖으로 나서자 바로 우물가를 찾았다. 이 망할 놈의 술 향 때문에 자꾸 속이 뒤집어지기 때문이었다.
“가르르, 퉤. 싸구려 백건아(白乾兒)보다 못한 술이라니. 싸울 때 적에게 먹이면 모두 기절을 하겠구나. 나중에 천마신교에 팔아 볼까?”
이후 세 번이나 더 입을 헹군 천일영은 없어지지 않는 향 때문에 기어이 다루(茶樓)를 찾아 철관음을 한잔 마시고서야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천일영이 매화 양조장을 방문한 날.
늦은 밤 소술청은 열 명의 남자와 함께 두건을 두르고 갈림길에 서 있었다.
“다섯은 팔색 양조장의 밭에 가서 매화나무와 박하를 전부 뽑아 매화 양조장 뒤편에 있는 공터에 옮겨 심거라.”
“네,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오거라.”
다섯의 남자들과 소술청이 팔색 양조장으로 향하는 길.
소술청의 곁에 있는 남자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는 마을의 무뢰배 중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항세준이라는 자. 삼재검법의 달인이었다. 삼류 무인이지만.
“형님, 이번 일만 잘 해내면 금화 한 냥을 주신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당연하다. 큰 거래가 있는 것이니 실수하면 안 된다. 너도 금화 한 냥이면 평생 만져 보지 못한 돈이 아니냐. 나만 믿고 시키는 일만 잘하면 나중에 더 챙겨 주마.”
“감사합니다요. 헌데 전에도 팔색 양조장에 술 만드는 비법을 탈취하려다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실패하면 어찌합니까. 같은 맛을 내지 못하면 위약금으로 재산을 모두 빼앗길 텐데요.”
“비법도 비법이지만 계약서에는 함정이 있다. 그것을 놈은 제 입으로 말하고도 모르더구나.”
소술청의 가느다란 눈이 더욱 실처럼 변했다.
낮에 계약서를 쓸 때 고의로 붓을 멈췄었다. 금화 백 냥을 물어내거나 매화 양조장을 넘긴다는 부분에서 연기를 한 것인데, 소술청은 계약서에서 가장 중요한 조항이 바로 그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생각해 보거라. 매빙화홍주와 같은 맛을 내지 못하면 위약금을 내는 것인데, 세상에서 매빙화홍주가 전부 없어진다면 그것과 같은 맛인지 아닌지 어찌 증명을 하겠느냐.”
“아……! 형님, 그렇다면?”
“이제야 눈치를 챈 것이냐. 비법을 탈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팔색 양조장에 있는 매빙화홍주를 전부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후 비교할 것이 없어져 이 계약은 무르지 못한다 이 말이다.”
“허허허. 역시 형님은 머리가 좋으십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았느냐.”
소술청과 항세준은 만면에 웃음을 짓고 빠른 걸음으로 팔색 양조장에 도착했다.
마침 달빛도 구름에 가려 주변에 있는 사람의 형상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이니 하늘도 이 일을 돕는 듯했다.
“세준이는 나를 따라오고, 나머지 셋은 양조장 주인과 손주를 묶어라. 내가 올 때까지 만태륭의 손가락을 자르며 비법에 대한 것을 알아 놓을 정도의 눈치는 있겠지?”
“맡겨만 주십시오, 형님.”
소술청과 항세준은 뒤로 돌아 팔색 양조장의 술 창고를 향했다. 근처에 다가가자 백매화의 향이 물씬 풍겼다.
소술청은 술 창고를 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이백여 병만이 남은 매빙화홍주.
한때 팔색 양조장이 천하에 이름을 알리려 할 때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꺾었다. 남은 술은 팔색 양조장의 과거를 이어 주는 잔상에 불과한 것.
그러나 그것을 없애려 하니 소술청도 술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조금 마음이 아팠다.
‘별 쓸데없는 생각이 다 드는군. 비법을 알아내면 없어지지 않고 내 것이 된다.’
소술청은 장작과 불에 탈 만한 것들을 모아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창고는 오래된 팔색 양조장의 세월로 물기가 마른 나무 기둥부터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화르륵.
타오르는 술 창고는 이내 중심이 되는 나무부터 쓰러지며 화마를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소술청은 쓸데없는 감정이 생기기 전에 항세준과 함께 만태륭이 있는 방을 찾았다.
지금쯤이면 손가락이 서너 개쯤 잘린 채 비법을 말하고 있을 터다. 끝까지 비법에 대해 함구한다면 손자가 보는 앞에서 고문한다면 쉽게 이야기할 것이다. 헌데.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혀…… 형님? 어째 저놈들이…….”
소술청과 항세준이 찾은 만태륭의 방 앞에는 피를 한 움큼 토한 세 명의 부하들이 기절해 있었다.
그것도 현청에서 사용하는 동아줄로 온몸이 묶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