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튀…… 튀자, 세준아. 아무래도 일이 틀어진 모양이다. 저놈들을 모두 베어 버려라.”
“혀…… 형님? 저놈들은 제 부하입니다. 그런데 죽이라니요?”
“이 멍청한 놈아, 그럼 들쳐 업고 뛸래? 두 놈이면 몰라도 세 놈이잖냐. 근데 어떻게 입을 막아!”
“크윽, 그건 그렇지만…….”
항세준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뽑았다. 피를 토하고 정신을 잃었으니 누가 죽였는지도 모를 터다.
지옥에서 원망을 하겠지만 죽인 자를 모르니 그 원망이 자신에게 올 리도 없을 것이다.
항세준은 당황한 끝에 말도 안 되는 생각만을 머릿속에 그렸다.
“어차피 매빙화홍주도 전부 없앴다. 그러니 금화를 들고 잠시 떠나라. 기루에서 지내다 보면 내가 다시 부르마.”
“알겠습니다, 형님.”
항세준은 검을 부하의 목에 들이밀었다.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이대로 죽게 될 것이다. 기루에서 기녀들과 노는 생각을 하자니 어차피 부하 따위 별거 아니다.
어차피 남. 손에 쥔 검이 목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항세준은 검 끝만 찔린 채 더 이상 목으로 들어가지 않는 검날에 당황했다.
“뭐 하는 거냐.”
“아니…… 검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뭔 개소리를……. 비켜라. 내가 직접 죽이마.”
소술청이 항세준의 검을 받아 쓰러진 세 명의 무뢰배들에게 검을 날렸다.
비록 술만 만들어 온 인생이지만 앞을 생각하면 더한 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망설임조차 없다.
그러나 검이 무뢰배들의 목에 닿기 직전,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로 올 줄도 몰랐고, 정말로 죽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군.”
“이제 두 놈이 전부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 보았으니 살인죄까지 적용할 수 있다.”
순간 소술청과 항세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다름 아닌 현령 신덕원, 그리고 낮에 매화 양조장을 찾아왔던 공자가 서 있었다.
“방화, 납치, 고문, 살인 교사(殺人敎唆). 또한 직접적인 살인 시도까지. 게다가 팔색 양조장의 밭에 사람들을 보내 도둑질까지 시켰겠다? 절도죄 추가. 내 현령을 오래 했지만, 네놈들같이 못된 것들은 처음이구나.”
“아니…… 그게 아니고요. 현령님, 저는 소술청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요.”
“과거 팔색 양조장에서 일어난 사건도 네놈들의 짓이렷다! 솔직하게 이실직고하면 항세준 네놈만큼은 극형을 면하게 해 주겠다.”
“맞습니다! 소술청이 시켜 한 짓입니다. 팔색 양조장의 비법을 빼앗기 위하여 벌인 일입니다요.”
순간 소술청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어차피 현령이라고 해도 공부만 해 온 자. 게다가 낮에 찾아왔던 공자도 얼굴만 잘생겼지 비실거리기는 현령과 매한가지다.
또한 포졸조차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자신의 손에는 검까지 들려 있지 않은가. 소술청은 이를 다물었다. 소리가 날 정도로.
“이 멍청한 놈아, 눈앞에 비실거리는 놈 둘뿐인데 뭘 다 불고 있는 거냐. 빨리 죽여!”
“아……! 맞다, 그러면 되네.”
순간 항세준이 천일영에게 몸을 날리는 사이, 때를 맞춰 소술청이 현령의 머리 위로 검을 날렸다.
아무리 무공을 모른다 하지만 사람 머리 하나 깰 정도의 힘은 있기에, 소술청이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끌어내어 날린 회심의 일격이었다.
그러나 순간 소술청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푸욱!
눈앞에서 가로막힌 검. 공자가 어느새 검을 막고 있었다. 그것도 항세준의 등으로.
항세준은 등을 베인 채 피를 흘렸지만 어째서인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있었다. 고통에 가득 찬 얼굴만이 원망스러운 듯 소술청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이…… 이런! 네놈은 무엇이냐.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세준이를 붙잡아 검을 막다니……!”
“어차피 현청에 끌려가면 고문을 당할 터인데 미리 아프다고 어찌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꽤나 깊이 베인 것을 보니 네놈 현령에게 감정이 많았구나.”
“이놈! 쓸데없는 말을!”
그러나 이내 소술청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
다름 아닌 현령의 눈앞에서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이것만으로도 극형에 처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수일 동안 죽을 만큼의 고문을 받고 이내 목이 잘릴 터다.
“네놈, 함정을 판 것이구나.”
“함정이라니? 나는 네놈과 계약을 했을 뿐이다.”
천일영은 항세준을 옆으로 집어 던지고 품 안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현령에게 넘겨주며 사악하고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일부러 소술청의 약을 올리기 위해 보여 주는 웃음이었다.
“분명 삼 일 후에 이 계약을 소술청이 지키지 못할 터이니 매화 양조장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흠…… 분명히 계약이 되어 있고, 매화 양조장의 도장이 찍혀 있구나. 내일 현청으로 오면 내 서류를 정리해 주겠다.”
현령은 말을 하면서 천일영의 옆구리를 슬쩍 찔렀다. 모두 다 알아서 해 놓을 테니 해가 뜨고 현청에 올 필요도 없는 신호였다.
신덕원은 이미 천일영에게 금화 두 냥을 받고 이 일에 나섰다. 적당히 받아먹으면서 살아왔던 현령으로서는 큰돈이 오가는 일이라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따지고 보면 공도 세우고 팔색 양조장의 미해결 사건도 이번 기회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또한 뒤탈이 생길 리 없는 일이다. 이것은 돈이 오가지 않아도 현령이라면 응당 나서야 하는 일.
다만 외부인인 공자가 가져온 일이라 빠른 해결을 위해 준 돈을 거절하지 않을 것뿐이다.
“그리고 이것도 가지고 가야지.”
“마…… 망할 새끼.”
천일영이 소술청의 품에 손을 넣어 금화 오십 냥짜리 만금전장의 전표를 꺼내자 소술청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망할 새끼 맞다. 그러니 너는 현청에서 고문받는 동안 나를 원망하고 죽을 때 내 얼굴을 떠올리거라. 허나 네놈은 네 손으로 죽인 팔색 양조장의 식구들을 기억하느냐. 네놈이 죽을 때 떠올릴 얼굴은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고개를 숙이는 소술청. 천일영의 말에 죽음을 앞두고 비명을 지르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제서야 생각난 죄의 무게. 그것을 확인한 천일영이 품에 전표를 넣자 현령도 계약서를 챙겨 넣으며 소리를 질렀다. 이 일은 위에서도 크게 공을 인정해 줄 만큼 커다란 사건이었기에 기분이 좋은 것이었다.
“다들 들어와서 이놈들을 포박하거라.”
“네!”
밖에서 포졸들의 소리가 들리고, 이내 문이 열리며 십여 명의 포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는 이미 사로잡혀 포박당한 무뢰배 다섯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몸을 피신한 만태륭과 그의 손자 만태용이 같이 들어섰다.
또한 하서량 역시 몸을 쭈뼛거리며 따라 들어오는 것도 물론이었다.
“공자, 은혜를 입었소이다. 팔색 양조장을 재건시켜 주는 것도 모자라 원수까지 갚아 주다니 이것을 어찌 갚겠습니까.”
“술만 제 때에 만들어 주면 됩니다. 이제 매화 양조장도 제 소유가 되었으니 그곳을 마음껏 사용하십시오. 다만 술은 일 년 후부터 납품이 아니라 두 달 후부터 납품입니다. 또한 한 달에 오백 병이 아니라 천 병입니다.”
“내 그리하리다. 공자 덕분에 우리 죽은 아내와 아들, 그리고 딸 아이까지 저승에서 편히 지낼 것이오. 고맙소.”
만태륭의 눈에서 오랜 한이 되었던 원한이 눈물로 씻겨 나갔다. 잠을 자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을 그리워했던 세월들이 최소한 넋을 기리며 원한을 갚아 헛되지 않게 되었다.
어찌 고맙지 않겠는가.
만태용도 고개를 숙이며 계속되는 인사를 했다.
그러나 천일영은 애써 인사를 거절했다. 사실은 천일영 자신을 위해 한 일이기 때문에 조금은 찔리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사는 되었습니다. 저는 하서량 이 친구를 놓고 갈 터이니 앞으로의 일은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십시오.”
“공자, 이렇게 가시면 내 섭섭하오. 최소한 접대라도 하게 해 주시오.”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가 보아야 할 듯합니다.”
“기다리는 사람? 혼자 온 것이 아니었소? 내 섭섭하구려.”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만류할 수 없기에 만태륭과 만태용은 애써 천일영에게 다음을 기약하는 약속을 받아 냈다.
이후 만태륭이 현령과 함께 사건의 조사를 위해 현청으로 가자 천일영은 내심 감탄했다.
역시 돈을 주니 일이 일사천리다. 이 늦은 시간까지 현령이 잠도 안 자고 열심히 일을 한다. 천일영은 하서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곳의 일은 이제 전부 네가 맡아서 하거라. 계약의 문서 등을 정리하고, 표국을 고용해서 술의 배송까지 전부 맡아서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술 창고에서 빼놓은 매빙화홍주 이백 병도 보내거라.”
“놈들이 올 것을 알고 빈 병으로 바꿔 놓다니, 공자님도 대단하십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너는 팔색 양조장의 매빙화홍주(梅氷花弘酒)를 관리하는 상단이 된 것이다. 앞으로 바쁠 것이다.”
“이것이 공자님이 말한 상단이군요. 막상 현실이 되니 이제서야 이것이 어떤 것인지 알겠습니다.”
“운남성은 더운 곳이다. 건강 조심하거라.”
천일영은 아쉬워하는 사람들을 남기고 마을 초입에 있는 객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천일영이 남겨 두고 온 것이 있었다.
“다녀왔다.”
“빨리 다녀오셨습니다.”
예서란은 창밖으로 천일영을 보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예서란은 오랜만에 제대로 된 목욕을 하고, 천일영이 사다 준 옷을 입은 고운 모습이었다. 또한 밥도 실컷 먹었다. 공자가 사슴 고기를 짓이기고 비늘과 손톱, 그리고 이빨을 섞는 모습에 식욕이 떨어지기는 했었지만 오랜만에 객잔 음식을 보고 눈이 돌아갔었다.
“옷이 제법 어울리는구나.”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그런데 왜 갑자기 존댓말이냐.”
“아…… 그것은 아무래도 공자님께 은혜를 입었고, 나이도 저보다 많으시니…….”
“그러냐. 나는 사람의 모습이 되고 괴물의 마음이 없어져서 착해진 줄 알았다.”
“모…… 모릅니다. 전의 일은 잊어 주십시오.”
예서란의 얼굴이 새빨개지며 바닥을 향한다. 아직까지는 어색하고 이상한 느낌이다.
오랜 세월 괴물로 살아왔기 때문에 사람의 모습이 어색하고, 오랜만에 입은 옷이 불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허나 상관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하나의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앞으로 어찌할 것이냐. 아마도 집이 어디인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집으로는 어쩐지 발길을 돌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너를 버린 부모의 마음이 용서가 안 되는 것이냐.”
“용서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모님도 힘이 드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가자.”
“그래도 되겠습니까? 사실은 그렇게 말씀해 주셨으면 했습니다.”
“항주까지는 먼 길이다.”
천일영이 손을 뻗어 예서란의 작은 손가락 마디를 잡아 이끈다. 그리고 예서란은 자신에게 손을 내민 천일영의 손을 망설이지 않고 잡았다.
은인이다. 또한 괴물인 자신을 믿어 주고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그것만으로 예서란은 평생 곁에 있겠다고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해가 뜨면 날씨가 좋을 테니 천천히 세상 구경을 하면서 가자.”
“예.”
천일영은 마을을 떠나며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예서란이 박하밭은 떠나지 않은 이유를 떠올렸다.
분명 예서란은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기 위하여 매화나무와 박하가 모여 있는 곳으로 왔을 것이다. 그리고 흐르는 물도 반드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언제나 온몸에서 찌를 듯 풍겨 나오는 냄새를 씻어 내고 싶었을 테니까.
때문에 천일영은 대략의 이야기를 듣고 예서란이 괴물이 아닌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을까. 그것 때문에 박하밭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예서란은 박하밭에 또 다른 의미를 두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너무도 그리웠던 게지. 박하밭은 매일 사람이 찾아오니까. 또한 누군가가 자신을 사람으로 보아 주었으면 했던 것이지. 꿈에서조차 사람이 되지 못했을 테니.’
예서란의 손을 꼭 잡은 천일영의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지금 천일영은 예서란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 따듯한 천이영과 혜령, 그리고 건청과 금채홍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예서란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곳. 바로 사람이 있는 곳이다.
‘이것으로 더 이상 예서란이 울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맑은 하늘 아래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 운남성의 산세가 떠나는 그들의 앞에 푸른 길을 내어 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