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천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로 서하린에게 한 방 먹은 것이었다.
‘서하린은 지금의 거짓말로 언제든지 별유천지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한 원할 때 발걸음을 해도 문제가 없도록 만들었다. 예전부터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지만 몇 마디의 말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갈 줄이야.’
당혹스러운 표정의 천일영을 바라보며 서하린은 빙긋 웃음을 지었다.
이쯤 되면 별유천지는 서하린의 마당이 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별유천지에 투자를 하여 당당히 자리를 만들 수도 있었다.
“모두 설명을 드렸으니 잠시 공자님과 이야기를 하게 해 주세요. 밀린 이야기가 많답니다. 물론 상단의 비밀도 이야기를 해야 하니 둘만 있도록 해 주시겠어요?”
“그…… 그러세요.”
뭔가 석연치 않은 기분이 가슴을 휘저어도 천이영은 더 이상 오라버니와 서하린 소저의 발길을 잡지 못했다. 반대할 명분을 모두 빼앗긴 탓이다. 아무리 보아도 서하린 소저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후우…….”
밖으로 나서니 후끈해진 객잔의 공기와는 다르게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숨 막히는 공간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천일영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지 온 것은 천마신교의 마왕 노인네들이 내보낸 것이냐?”
“네, 제가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고 있으니 눈엣가시였던 것이지요. 독천마왕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함부로 하지는 못하고 천마님을 찾으라는 핑계로 내쫓았습니다.”
“결국은 나 때문이구나. 미안하다.”
“상관없습니다. 천마님을 다시 뵈었고, 무엇보다 연락을 왜 안 하셨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서하린은 어느새 슬픈 얼굴의 한 켠으로 조금씩 편안한 표정을 퍼트려 나갔다. 이것은 천일영과 아버지 서가흔의 앞에서만 짓던 표정.
전부가 아니어도 괜찮았다. 작은 오해와 앙금이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았지만 서하린은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사실은 꼬리를 잡았었습니다.”
“서가흔을 죽인 자의 정체 말이냐!”
“정체는 아닙니다. 의심이 가는 일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친우의 죽음은 지금도 매일같이 생각하는 일이다. 그것은 서하린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죽음이 정당한 것이라면 이렇게 매달리지도 않을 터.
아버지를 죽인 시녀라는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서하린을 돌봐 왔던 사람이었다. 말도 안 되는 범인의 지목에 서하린은 아버지의 죽음과 시녀라는 이름의 어머니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의 죽음으로 두 사람을 잃었다.
“영약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천마신교에 들어오는 영약은 전부 마왕의 관리에 따라 누가 어디에 얼마만큼을 사용했는지 기록합니다. 그런데 상당한 영약이 사라져 있었고 또한 각지의 영약 채집 창고에서부터 미리 없어지는 것도 많았습니다.”
“영약은 마왕들이 관리하는 것이니. 허나 너를 포함해 마왕이 여섯 명인데 그들이 전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명천마왕 소초련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한패인 것 같습니다.”
“……!”
서가흔이 죽었을 당시, 마왕들은 일심동체가 된 듯한 행동을 했다. 그것은 독을 다루는 독천마왕이 독에 죽었다는 것을 숨기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마왕들의 명분도 그러했기에 의심은 갔지만 딱히 말리지도 못했다.
“영약이 없어지는 것을 서가흔이 알아내고, 나머지 마왕들이 살해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되겠느냐.”
“아직은 심증입니다. 영약이 없어졌다는 말만 가지고 아버지의 죽음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것 때문에 너를 내보내고 나를 찾으라는 것이군.”
“이제 천마님이 계신 곳을 알았으니 저는 영약을 빼돌린 이유까지 포함해서 증거를 찾아다닐 생각입니다. 모든 증거가 다 모이면 복수할 것입니다.”
“그때는 나도 같이 가겠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리고 모든 복수가 끝나면 그때는 아시죠?”
서하린의 말에 천일영은 고개를 옆으로 슬그머니 내렸다. 서하린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천일영의 표정을 간파한 서하린은 집요하게 말을 이어 갔다.
“약속 잊지 않으셨죠?”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구나.”
“복수가 끝나면 천마님에게 시집을 가야죠. 예전에 했던 약속, 기억이 나지 않으시나요?”
“내가 너와 혼례를 올리겠다고 했다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천마님.”
서하린이 눈을 반쯤 내리깔고 요염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거짓말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 역시 진심이라는 뜻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것만을 남기고 서하린은 미끄러지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천일영은 서하린의 표정에 가슴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속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꺼냈다.
“저런 화장을 하고, 그런 표정을 지어 봐야…….”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으음…….”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다가 혜령의 뒤척이는 소리에 눈을 뜬 천이영은 가만히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하린이라는 이상한 여자가 오라버니에게 다가온 것도 마음이 편치 않은데, 상단과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더한 의심을 불렀다.
천이영은 서하린의 말을 믿으면서도 한편으론 오라버니의 굳은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안 되겠다. 조금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만 잠이 더 이상 오지 않네.”
아침 일찍부터 잠을 깨우고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찬물로 몸을 씻은 천이영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옷을 입고 객잔을 향해 나섰다.
그런데 객잔에 도착한 천이영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누…… 누구지? 저 아가씨는? 세상에, 어쩜 저렇게나 예쁠까?”
금채홍만큼 예쁜 소저가 오라버니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금채홍이 깎아 낸 얼굴처럼 반듯한 미인이라면, 눈앞의 소저는 청초한 것이 마치 한밤의 강가에 비치는 초승달 같은 얼굴.
또한 오라버니가 다른 사람 앞에서 지금처럼 마음을 열고 웃는 모습은 본 기억이 없었던지라 천이영은 눈앞의 소저에 대한 궁금증이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오라버니, 일찍 일어나셨네요.”
“너야말로 일찍 일어났구나. 그런데 눈이 빨간 것이 잠을 못 잔 것 같구나.”
“아…… 아니에요. 근데 오라버니? 이 예쁜 소저는 누구신가요? 하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계시길래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습니다.”
순간 천일영과 소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특히 금채홍만큼이나 커다란 눈을 끔벅이던 소저의 표정은 무척이나 이상하다는 듯, 혹은 서운하다는 듯 아쉬워하는 것이 한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그때 소저가 손뼉을 짝하고 치며 웃음을 지었다.
“아! 제가 변장을 해서 못 알아보시는 거군요.”
“네? 변장이요?”
“눈가의 화장을 지우고 입술에 붉은색 연지를 안 발랐거든요.”
“네? 그게 무슨?”
천이영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하더니 이리저리 구른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어디에서 많이 들어 보던 목소리다.
“서하린 소저?”
“네, 이제서야 알아보시네요.”
“진짜 서하린 소저입니까? 근데 변장을 한 거라니요? 화장을 지웠는데 변장?”
천이영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기도 전, 놀란 마음보다 더 빠르게 생기는 궁금증이다. 어째서 화장을 지운 것이 변장이라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평상시에는 일부러 표독스러워 보이도록 화장을 하고 맨얼굴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지 않으니 화장을 지운 것이야말로 변장이지요. 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저희 아버지나 공자님 정도랍니다.”
“그…… 그럼 평소의 화장이 일부러?!”
무림인들을 상대할 때 특히 효과를 보는 화장이었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은 검이나 기운뿐만이 아니다. 화장도 상대편의 기운을 흘리고 또한 자신의 표정을 숨기는 데 탁월한 것.
그러나 지금부터 서하린이 해야 하는 일은 화장이 방해가 되기 때문에 지운 것이었다.
“공자님과 약조한 일을 하기 위해서 당분간은 이 모습입니다. 정강산에 새로 짓는 객잔이 개점을 할 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몸조심하거라.”
천이영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서하린이 몸을 날려 모습을 감췄다. 그 모습을 바라본 천이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소저가 하는 짓이 미덥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서하린 소저, 또 봇짐을 안 가지고 가네요. 발 냄새 또 나려고…….”
“본인 말로는 연약하다고 하니 내버려 두어라.”
눈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는 사람이 연약할 리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천이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상단을 하는 사람이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이 오히려 마음에 걸렸다. 불안한 마음이 가슴속을 뒤흔들었지만 천이영은 언젠가 오라버니가 이야기를 해 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심을 했다.
* * *
“주…… 죽겠다. 허억. 허억.”
굵은 나뭇가지를 잘라 지팡이로 만든 것으로 몸을 지탱하며 설려온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집 앞에 섰다.
공자와 헤어질 때 한 달 만에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맹세를 했지만 지금은 이미 한 달이 넘고도 보름의 시간이 더 지났다.
보통은 보름에서, 길면 이십 일에 오는 길을, 이제서야 도착한 설려온은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에 눈물이 울컥 솟아올랐다.
“해남도에 도착하고 집까지 반나절이면 오는 데 오 일이나 걸렸다는 건 절대 아버지한테 말하지 말아야지. 얼마나 길을 헤맸는지 씻지도 못하고 옷도 너덜너덜하네.”
설려온은 창피한 마음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자신의 집 현관 앞에 섰다.
그런데 당연히 해남파 문주의 딸인 자신에게 문을 열어 줘야 하는 문지기가 갑자기 검을 들이대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지 분위기가 살벌하기 그지없었고, 날 선 살기는 접근하는 자들은 모두 베어 버리겠다는 기세다.
“누구냐! 여기는 거지가 올 곳이 아니다!”
“당장 물러가거라. 그렇지 않아도 문주님의 따님이 행방불명이 되어서 어수선한데 지금은 밥을 얻으러 올 때가 아니다!”
‘응? 문주님의 따님이 행방불명?’
설려온은 잠시 눈을 끔뻑였다. 문주님의 딸이라면 분명 자신 한 명뿐이니까.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설려온은 얼굴이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겨우 입을 떼었다.
“저기…… 아마 그 행방불명된 문주님의 딸이 나 같은데.”
“뭐라? 이 거지가 무슨 개소리를……. 응? 잠시만? 어라?”
문 앞을 지키던 무사 중의 한 명이 설려온의 꼬질꼬질한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더니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처음에는 워낙에 거지꼴이라 알아보지 못했지만 자세히 뜯어 보니 정말로 해남파 장문인의 딸 설려온이 분명했다. 문 앞을 지키던 무인은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문주님의 따님이신 설려온 님이 돌아오셨다고 급히 전해라!”
“히익! 도대체 무슨 일을 겪으셨길래 모습이 이런 것입니까. 큰일을 겪으신 모양입니다. 해적들과 싸움이라도 하신 것입니까?”
설려온은 다급히 자신의 몸을 살피며 걱정에 가득한 무인들을 바라보며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래도 길을 헤매느라 거지꼴이 된 모습이 해남파의 사람들에게는 크나큰 일에 휘말려 해적들을 때려눕히고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설려온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지경이 된 연유는 입이 찢어져도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
“어서 안으로 드십시오. 장문인께서 너무 걱정을 하시는 바람에 잠을 못 주무실 정도입니다.”
“그…… 그래?”
“어서 들어가셔서 그동안의 무용담을 들려주시면 매우 기뻐하실 것입니다.”
“으…… 으응.”
설려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물론 장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거지꼴을 보고 놀라는 것은 당연지사.
설려온은 또다시 큰 공을 세우고 온 것 같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아버지의 방 앞에 섰다. 그리고 돌아왔다는 말을 꺼내는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해남파 문주 설의룡이 자신의 딸을 보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솔직히 불어라. 이번에는 길을 얼마나 헤맨 것이냐.”
“해남도에 들어와서 오 일…….”
“하아……. 집 앞에서 오 일을 헤맸다는 이야기는 남들 앞에서 절대 하지 말아라.”
설의룡은 다음부터는 절대 혼자 내보내지 않겠다고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아니, 태어나고 자란 해남도에서 오 일이나 길을 헤매었으니 앞으로는 집 밖으로 웬만하면 내보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