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64화 (65/270)

64화

“이놈의 꼬맹이가 죽을라고 어디에서 함부로!”

드드드득.

사귀진이 설려온의 머리를 한 손으로 잡고 힘을 주자, 머리뼈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더한 사람이 있었다. 유향설이 거침없이 검을 뽑으며 일어섰다.

“저에게 넘기십시오. 가죽을 벗기겠습니다.”

“딱 죽지 않을 만큼 머리부터 반쯤 쪼개고 넘겨주마.”

매호란은 문주의 딸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데도 사귀진과 유향설의 몸에서 나오는 기운이 어찌나 강하고 흉악한지 손끝 하나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말리지도 못하고 눈치만 보던 그 순간, 설려온과 매호란은 눈치챘다. 이 사람이 천마의 신분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크…… 큰일 났다. 이런 실수를!’

설려온이 자신의 실수를 탓하며 죽음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상한 방향에서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오…… 오라버니가……. 아아아…….”

챙그랑!

천이영이 음식을 손에 든 채로 뒤로 넘어갔다. 음식은 접시째 바닥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내고 깨졌다.

충격이 너무 강했는지 이미 천이영의 눈은 감겨 있었고, 아름다운 눈의 끝에서는 물방울이 맺혀 흐르기 시작했다.

“이영아!”

순간 천일영은 빠르게 신형을 날려 여동생을 안아 들었다. 서하린을 만나고 신경이 곤두서 있었던 여동생이다.

헌데 결국은 정체가 탄로 나고 말았다. 천일영은 눈을 감았다. 애써 서하린이 거짓말까지 해 가며 정체를 숨겨 주었는데 오히려 그것이 여동생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게 만든 것이었다.

“여기는 저희가 정리할 테니 일단 여주인님을 방으로 모시고 가시지요.”

“알았다.”

침통한 표정의 건청이 바닥에 쏟아진 음식과 깨진 접시를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천일영은 가슴이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여동생의 일도 감당하기 힘든데 건청이 저런 표정을 짓자 잠시 설려온이 원망스러워지기까지 했지만, 천일영은 애써 자신의 마음을 추슬렀다.

“귀진아, 죽이지 말아라. 지인의 딸이다. 또한 인사를 한 것이 무슨 잘못이겠느냐.”

“그리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지만 화를 참기가 힘듭니다.”

“그 아이의 잘못이 아니라 내 잘못이다. 내가 숨겼기 때문이다.”

천일영의 말이 끝나자 설려온은 심장이 쪼개지는 듯했다. 무려 천마라는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무림 삼대 고수라는 말이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머리를 짓누르던 손아귀에서 벗어난 설려온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이내 잘못했다는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설려온의 곁으로 사귀진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처럼 내려앉았다.

“입 열지 마라. 지금은 그 무슨 말을 해도 역효과다.”

“으으으…….”

천일영은 여동생을 안은 채 건청을 내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음식과 접시만을 느리게 줍고 있는 건청의 손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천일영은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건청이 얼굴을 보이지 않는 이유를 모르지 않으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해도 되겠느냐.”

“…….”

견디기 힘든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건청은 바닥을 훑던 손을 멈추고 이내 몸을 일으켰다.

이제서야 보이는 얼굴. 그러나 건청은 천일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이것은 손으로 줍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빗자루와 걸레를 가져오지요.”

건청은 얼굴을 돌리고 객잔 밖 어딘가에 있을 빗자루와 걸레를 가지러 나갔고, 이후 천일영이 침통한 얼굴로 천이영을 침소로 데리고 간 이후 반 시진이나 지나서 돌아왔다.

손에는 가지러 간다던 빗자루와 걸레는 없었고, 눈은 붉어진 채 바닥에 주저앉아 한숨만 내쉬기 시작했다.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다 괜찮았는데, 하필이면 종남의 원수인 천마였다니…….”

과거 종남의 장문인 청진이 자신에게 검을 가르치던 시절을 생각하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 * *

언젠가는 와야 했을 순간이지만 이런 식으로 여동생이 자신의 일을 알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자신을 알리고 나중에 여동생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면 그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숨기고 살 생각은 없었으니까.

“으음…….”

“정신이 드느냐.”

정신을 잃고 두 시진이 지나서야 천이영은 눈을 떴다. 그동안 서하린의 일까지 겹쳐 잠을 도통 이루지 못했던 터라 천이영은 기절한 김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뭔가 가슴속을 휘젓고 꿈틀거리는 기분 나쁜 느낌에 눈을 떴지만, 보이는 것은 지금 당장은 만나고 싶지 않은 걱정이 한가득인 오라버니의 얼굴이었다.

“오라버니…….”

“나 때문에 미안하구나. 숨기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너를 아프게 했다.”

“오라버니가 그 무서운 천마신교의 천마인 건가요? 지금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 주세요. 서하린 소저의 아버지와 상단을 했다는 것도 거짓말인가요?”

“천마신교의 천마였다. 그리고 서하린은 천마신교의 마왕 중 한 명이지.”

“오라버니…….”

천이영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자신에게 과거를 숨긴 것이 원망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무서운 과거를 가진 오라버니가 눈앞에 있기 때문에 흐르는 눈물인지는 모른다. 어쩌면 자신을 속였기 때문에 서운한 마음으로 치솟는 눈물일지도 몰랐다.

“어째서 마교에 들어가신 건가요. 다른 곳도 많았을 터인데 왜 하필 그곳입니까.”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팔아넘긴 곳이 천마신교였다.”

“……!”

잠시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잃고 있던 천이영의 큰 눈에서 더 많은 눈물이 쏟아졌다. 조금 전까지 흘리던 눈물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천이영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라버니를 원망했을까. 바보 같았다. 가슴이 무너지고 분노도 치밀었다.

“아버지가! 그 인간이! 죽으라고 판 것이 아니라면 어째서 마교에. 흑흑.”

“팔아 버린 것에 대해서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을지도 모르지.”

“어찌 그럴 수가.”

천이영은 천일영을 꼭 껴안았다. 손으로 오라버니의 뒷머리를 쓰다듬고, 얼굴을 맞댄 뺨을 타고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어떡해. 우리 오라버니 불쌍해서 어떡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견뎌 왔을까. 그곳에서 살아남느라 우리 오라버니, 어찌 견디어 냈을까. 우리 오라버니, 불쌍해서 어떡해……. 으흑.”

“녀석, 잘 살아서 돌아오지 않았느냐.”

천이영은 잠시나마 오라버니의 과거가 무섭다는 생각을 했던 자신을 탓하고 원망했다.

어렸을 때 오라버니가 팔려 간 곳이 어떤 곳일까 생각은 해 봤지만, 그곳이 마교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그런데 오라버니가 힘들고 위험한 곳에서 빠져나와 자신에게 돌아왔을 때,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 속 시원히 말하지도 못하고 고민했을 것을 생각하니 천이영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미안해요. 제가 먼저 알아차리지 못해서 미안해요, 오라버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하셨을까요.”

“뭐가 미안하겠느냐. 내가 미안할 뿐이구나.”

“아니에요, 오라버니. 제가 잘못했어요.”

자신을 껴안고 있는 여동생의 등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이제서야 진정으로 다시 돌아온 것 같은 마음을 느끼면서.

천일영은 한동안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여동생의 마음을, 자신을 놓치기라도 할까 꼬옥 안고 있는 천이영의 체온을 통해 느끼며 조금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끼익.

“속이 다 시원하다. 저놈의 녀석을 죽이지는 못하니 이렇게라도 해야지.”

“죽이지만 않으면 무슨 짓도 해도 상관없는 것이 아니겠어요? 오호호호.”

설려온을 객잔 옆에 있는 높은 나무에 거꾸로 매달고 오는 사귀진과 유향설의 표정은 개운해 보였다.

물을 한 주전자나 강제로 먹이고 단단히 묶어 놓았으니, 잠시 후에는 누런색 물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광경이 펼쳐질 터다.

“요즘 애들은 천마님 알기를 우습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함부로 천마라는 이름을 입에 올려서도 안 되거늘. 쯧.”

“때문에 여동생분이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으니 걱정입니다.”

“천마님의 과거를 알게 되면 이해하실 거다. 그분은 옳게 살려고 애쓰셨다. 그보다 문제는 또 다른 놈이다. 거기 구석에 앉아 있는 놈! 너 말이다.”

사귀진의 내공 실린 음성이 구석에 앉아 있는 건청의 귀를 파고들었다.

애써 자신을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기를 바랐지만 사귀진은 중원 백대 고수. 건청이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천마님께 하는 짓을 보니 종남이군. 장문인 청진의 목을 날려 버렸으니 삐친 게냐? 아니면 종남의 고수들을 신선이 되게 하여 열이 받은 게냐. 진짜 신선이 되었는지 지옥으로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낄낄낄.”

“말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건청이 서슬 퍼런 기운을 풍겼다. 그러나 사귀진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술잔을 비웠다.

“귀주성 전투 때 종남파는 사천당문에게 속고 있었지. 종남이 앞장을 서고 사천당문은 호위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무명암살대의 단주였던 천마님이 전장을 쓸어 버리자 놈들은 종남을 버리고 슬그머니 사라졌다.”

“같은 무림맹의 문파가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찌 사혈련에서 말하는 것입니까. 그곳에 있지도 않았잖습니까!”

“순진하군.”

사귀진이 귀주성 전투의 사정을 잘 아는 것은, 전쟁과 큰 싸움이 벌어지면 각각의 세력들이 어떻게 싸웠는지 연구하기 때문이었다.

큰 전투가 벌어진 곳에는 무림맹과 사혈련, 그리고 천마신교까지 병법가들을 파견하여 발자국 하나까지 전부, 그리고 전쟁의 향방을 기록한다. 상대편의 수를 연구하면 진형을 파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멀리에서 직접 전투의 과정을 기록하는 사람들도 파견했다.

“종남을 호위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허수였다. 때마침 천마님과 종남이 부딪히자 놈들은 흔한 비침 한 번을 사용하지 않고 물러섰지. 장문인 청진은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사천당문의 의도를 읽지 못했다. 그것이 청진의 패인이다.”

“청진 장문인은 제 스승입니다. 함부로 말씀을 하시지 않는 게 좋을 것입니다.”

“흥분은 이야기가 끝나고 해라. 청진이 죽고 나자 귀신같이 자리를 떠나는 사천당문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천마님이다. 그래서 천마님은 종남의 무인들을 살려 두려고 애를 썼다. 전장이라는 곳이 뜻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어서 생각보다 많은 종남파 무인들이 피를 보기는 했지만, 어쨌든 가장 진형의 앞에 서 있던 것이 종남이었는데 살아 돌아간 사람이 칠 할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

“종남과 같이 전장의 앞에 섰던 무당이 오 할. 그리고 나머지 문파도 비슷했다. 화산은 겨우 사 할이다. 종남만 유일하게 칠 할이 살아서 돌아갔지.”

건청의 눈이 부르르 떨렸다. 전에 종남의 성진도장이 이야기를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종남의 실력자들이 많이 죽었지만, 생존율로만 따진다면 가장 적은 피해를 입었다고 했었지. 초절정 고수가 많이 죽은 것은 단지 장문인 청진을 보호하려다 휘말렸다고 했다.’

사귀진의 말을 전부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앞과 뒤가 서로 맞물렸다. 건청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천마님이 네 부모를 죽였냐? 네 여동생을 팔아먹었냐? 아니면 악한 마음을 먹고 종남을 파멸시키려고 했냐. 전쟁에서 벌어진 일은 그것으로 끝이다. 네놈은 청진이 천마님의 목을 잘랐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냐.”

사귀진은 건청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수가 아닌 이상 무림에서 일어난 일은 무림에서 끝인 것이다. 과거의 일을 지금까지 마음에 품었다는 것이 사귀진이 보기에는 속이 좁아 보였다.

‘그래도 실상은 조금 다르지. 이건 말하면 안 되겠군.’

귀주성 전투에는 건청이 모르는 비밀이 더 있었다.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이면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