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65화 (66/270)

65화

천일영이 종남의 무인들을 많이 살려 둔 것은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사천당문의 함정을 실패로 돌리기 위한 방책이었을 뿐이지만 사귀진은 그런 부분을 쏙 빼고 말했다.

그러나 추악한 이면은 다른 곳에서 드러났다.

‘전장을 연구했던 사혈련의 병법가들은 사천당문이 종남파를 아예 없애려고 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즉, 종남에서는 모르는, 어떠한 이유로 사천당문이 하나의 문파를 아예 소멸시킬 목적으로 만든 함정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무림맹에서 덮었지.’

사천당문은 일 년간 무림맹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사천성에서 나오는 수입의 절반을 무림맹에 줬다.

겨우 이것이 종남을 멸문으로 몰아넣으려 했던 사천당문이 무림맹으로부터 받은 제재였다.

명분은 혼란한 전장의 틈에서 생길 수 있는 일이라는 것과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것.

또한 칠 할의 무인이 살아남은 종남은 피해가 적다는 이유로 무림맹의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네가 만약 그래도 원수를 갚고 싶다면 그것은 천마님이 아니라 함정을 파고 전장의 제일 앞에 종남파가 서도록 만든 사천당문에게 칼을 겨눠야 할 터. 좁아터진 생각으로 천마님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말아라.”

이후 사귀진은 더 이상 건청과 말을 섞지 않았다. 그저 유향설과 조용히 술을 마실 뿐이었다.

그러나 건청은 손까지 떨어 가며 식은땀을 흘렸다. 청진이 천마의 목을 잘랐으면 속이 시원했겠냐는 사귀진의 말 때문이었다.

‘만약 청진 스승과 천마 중에서 선택을 하라고 하면 나는 누구를 택할 것인가. 실상 받은 것의 대부분은 천마가 준 것. 단전을 살려 주고 단옥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그뿐인가. 무공도 하사받고 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건청은 혼란스러웠지만, 오직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떨치지 못했다.

정파라는 사천당문도 악한 짓을 하고, 천마라 불리는 희대의 악당조차 많은 것을 베푼다. 이것은 문파나 정파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의 이야기였다.

조약돌의 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근본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흰색이든 검은색이든 조약돌은 조약돌이다. 그것을 흰색이라 하여 정파라 하고, 검은색이라 하여 사파나 마교라고 부르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건청은 자신이 공자에게 한 짓을 깨닫고 침음을 흘렸다.

* * *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서야 겨우 진심을 보이게 되어 더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 법한데, 천일영은 새벽 공기가 품 안을 괴롭히며 파고드는 장원 밖을 나서 객잔으로 향했다.

아직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 가던 때,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천이영이 잠이 들어버렸다. 울다가 지쳐 잠이 든 것이다.

‘이영이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었구나. 허나…….’

한 단락 마무리가 되는 듯도 했지만, 천일영은 건청의 생각에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그러나 객잔으로 올라가려는 길목에서 금룡참월하검을 안고 곱게 웃는 금채홍이 천일영을 먼저 맞이했다.

“늦은 밤이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것이냐. 눈이 퀭하구나.”

“괜찮습니다. 내일 땡땡이치고 낮에 조금 자면 됩니다.”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다니 제법이구나. 그런데 채홍아.”

“네, 공자님.”

천일영은 금채홍에게 말을 꺼내기 전에 잠시 숨을 골랐다. 요즘 자꾸 가슴속에 담긴 이야기를 말로 꺼내는 일이 생기니 이것이 천일영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천마라는 사실을 알고도 괜찮은 것이냐.”

“상관없습니다. 공자님이 천마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사람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저에게 공자님은 오직 공자님이라고 할까요. 오히려 공자님의 터무니없는 강함이 천마였기 때문이었다고 이해가 되어 속이 후련합니다.”

단호한 금채홍의 표정과 말투가 천일영에게 닿자 이내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한 점도 흔들림 없는 금채홍의 굳은 결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인지 아니면 그 누구보다도 심지가 깊은 것인지는 몰라도 천일영은 금채홍의 이러한 부분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건청을 만나기 전에 금채홍을 만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라면 이제 들어가거라. 오래 서 있었으면 품 안의 공기조차 차가워졌을 것이다. 손을 이리 내밀 거라.”

“손이요?”

천일영이 금채홍의 손을 잡고 따스한 진기를 불어 넣는다. 그리고 어느새 금채홍의 곁에 따뜻한 바람이 몸을 감싸 안고 품으로 파고들어 냉기가 가득한 몸을 덥혀 주었다.

금채홍은 배시시 웃으며 천일영의 손을 꼭 잡았다.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기도 했는데, 노란 비가 오나 궁금해서 기다리는 것도 있습니다.”

“노란 비?”

금채홍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천일영은 금채홍이 가리키는 손가락 방향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무의 가장 꼭대기의 굵은 가지에 꽁꽁 묶여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설려온이 보였다. 소리도 못 지르게 재갈까지 물려 놓고 밧줄을 몸 두께만큼이나 감아 놓았다.

“노란 비가 내리거든 내려 주거라.”

“알겠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중에 꼭 상세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일영은 금채홍에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객잔으로 올라갔다.

사실 설려온은 예의를 차린 것뿐, 딱히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사달을 낸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다른 사람들이 납득을 할 것이니, 천일영은 설려온이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끙끙거리는 소리를 외면한 채 객잔으로 들어섰다.

“이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객잔 앞에 서자 이상하게도 시끌시끌한 분위기가 확연히 풍겨 왔다.

건청의 마음이 걱정되어 가슴이 답답했는데, 정작 객잔 안에서는 건청의 목소리와 사귀진의 고함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아니, 귀진이 형님! 제가 술 좀 마시고 어깨동무 좀 하겠다는데 속 좁게 그러실 겁니까?”

“내가 왜 네 형님이냐. 이 정파 나부랭이 새끼가!”

“그래서 제가 따라 드리는 술을 못 드시겠다는 겁니까?”

“누가 안 먹는대냐. 일단 따라 봐라.”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간 자리에는 건청과 사귀진이 어깨동무를 하고 병나발을 불며 술을 마셔 대고 있었다. 게다가 유향설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엎드려서 코까지 골며 잠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천일영의 이마에 핏줄 세 개가 튀어 올랐다. 유향설의 옆에 굴러다니는 술병만 해도 족히 열 병은 되어 보였다.

빠직.

객잔을 굴러다니는 매빙화홍주의 빈 병은 모두 삼십여 개. 울컥 화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조용히 화를 억누르며 자신도 매빙화홍주를 한 병 꺼내 들고 앞에 앉았다.

“나도 같이 마셔도 되겠느냐.”

“어?! 천마님 오셨습니꽈. 같이 드셔야죠. 여태 기다렸는데요. 어서 오십셔.”

건청이 꼬부라진 혀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 그리고 사귀진도 얼마나 취했는지 혓바닥을 내밀며 매빙화홍주 병 주둥이를 이리저리 핥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조금 전까지 고민했던 게 바보 같을 지경.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지만 건청의 마음을 돌려 준 것은 분명 사귀진일 터다.

천일영은 술병을 열면서 마음속 깊이 다짐했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고. 이것은 별개다. 오십 병까지다. 그 이상이 넘어가면 일단 패고 본다.’

쉽지 않은 한고비를 넘겼지만, 자신조차도 한 병을 다 마셔 보지 못한 매빙화홍주를 이렇게나 마시다니, 용서의 한계를 정해 놓고 넘어가는 순간 응징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천일영이었다.

* * *

새조차 잠이 들어 고요하기만 한 늦은 밤.

사천당문 문주의 집무실에서 작은 등불의 어스름한 빛이 일렁이듯 밖으로 새어 나왔다.

사천당문의 첫째 아들 당추필이 살기 어린 눈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마땅치 않은 듯한 그 눈 안에는 온갖 야심과 패도(霸道)가 가득했지만, 마주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천당문 문주 당용택은 그의 시선이 응당 당연하다는 듯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다.

아니, 당용택의 눈빛도 사천당문의 문주와 어울리는 정돈된 정의를 보이는 듯하지만 숨겨져 있는 본심이 서릴 때는 사실 아들 당추필의 눈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었다.

“일이 어쩐지 잘 안 풀리는 듯합니다.”

“이미 예전부터 일이 꼬였다. 십이 년 전 귀주성 전투에서 종남파가 자연히 사라졌으면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지는 않았을 터. 지금도 마교의 천마 놈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구나.”

“모용세가의 모세룡께서 그때 놓친 놈이 천마가 될 것을 알았더라면 말입니다. 좀 더 열심히 죽이려고 하시지 않았을까요. 큭큭큭.”

“웃을 일이 아니다. 전쟁이라도 벌어져야지 종남을 자연스럽게 소멸되게 할 터인데 지금은 손을 댈 명분이 없다.”

“하지만 해남파 쪽의 일은 잘되고 있지 않습니까?”

당추필의 눈이 야비한 실선을 그린다. 그 눈동자가 가려져 진의를 읽기 힘들 정도의 눈웃음이다.

당용택은 당추필의 웃음을 흘끔 보고는 싫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아들이 생각한 대로 해남파가 무너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앞으로 이 개월, 길어도 사 개월을 넘기기 전에 해남파는 멸문의 길로 들어설 것이었다.

“해남파의 장로 네 명이 우리에게 넘어와 주었으니 잘된 일이지. 그 역할도 충분히 잘해 주고 있고, 게다가 해남도의 도지휘사도 지원을 전부 끊어 주고 있으니 그 땅이 우리에게 넘어올 날이 머지않았다.”

“같은 무림맹의 소속인 저희 사천당문이 해남도를 관리한다고 하면 다른 곳에서도 큰 탈 없이 넘어갈 것입니다. 물론 다 된 밥에 수저를 올리려는 곳들이 생기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아버님에게 맡기겠습니다.”

조금 전과는 반대로 당용택의 눈이 찌그러지며 이마에 주름을 남겼다.

어차피 이 일은 치밀한 계획아래 움직이는 것이다. 아들의 말대로 이득을 노리는 다른 문파들이나 가문이 나타날 법한 것 역시 사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반대로 당용택이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해남파가 소멸하고 그곳을 사천당문이 차지하게 되면 여족들을 상대해야 한다. 그들과 공생을 하려고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독립을 위해서 계속 반란을 일으키니 결국 그들을 모두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겠지. 추필아, 여족들에 대한 지원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렷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한 달에 금화가 오십 냥이 넘게 들어가기는 하지만, 놈들은 풍부해진 자금 덕분에 한 달에 한 번씩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심어 놓은 간자(間者)도 끊임없이 반란을 부추기고 있지요.”

“여족을 이용해 해남파의 전력을 갉아먹고 또한 이후에는 여족을 처리하는 방책으로 종남파를 끌어들인다. 해남도에서 일부러 전쟁을 만들어 종남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종남이 전쟁에 휘말리는 명분은 충분할 터. 추필아.”

“말씀하시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해남도에 숨어 들어가 나머지 일을 도모하겠습니다.”

“이 일은 우리 가문밖에 모르는 일이 되어야 한다. 비록 위에서 사천당문을 봐주고 우리가 도모하는 일을 눈감아 주기는 하지만 잘못되면 가문 전체가 멸문지화를 당하게 될 터.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할 것이다.”

“맡겨 주시지요, 아버님. 기대에 부응하여 꼭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아들 당추필이 밖으로 나서자 당용택은 잠시 아들이 마시던 술잔을 바라보았다.

제법 늦은 밤이 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술잔에 아직 술이 남아 있다. 아들 당추필이 마신 술은 딱 반 잔.

그러나 당추필이 술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용택은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충의를 내비치지만, 속으로는 문주의 자리를 탐하는 것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아직 멀었다. 이런 놈을 데리고 대업을 이루려 하니 내가 쌓은 업보가 무너져 내려 화가 닥칠 듯하구나. 그러나 이번 일만 성공하면…….’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아직 당추필은 모른다. 종남파에 있는 것을 얻기 위해 하나의 문파를 소멸하려는 계획으로 보이지만, 그것만으로 이렇게 위험한 일을 도모할 수는 없다.

종남파를 이용해 여족들을 처리하고, 그 과정에서 종남파 역시 멸문하여 그 이름을 감추게 될 것이지만, 진짜 본래의 목적은 그 이후부터다.

그것이 사천당문의 가문을 걸고 당용택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