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커…… 커거걱. 사…… 살려…….”
“내 눈앞에서 거짓말을 씨부렁거리는데 살려 달라고? 무림이 살려 달라면 살려 주는 곳이더냐.”
사귀진의 손아귀에 목줄이 잡힌 진협교의 눈이 조금씩 흰자를 드러내며 넘어가기 시작했다. 딱히 내공을 사용하지 않아도 외공의 힘만으로 사귀진은 진협교의 숨통을 막아 버렸다.
정확히는 내공을 어느 정도 사용은 하고 있지만, 사귀진은 외공의 힘을 강하게 사용하고 내공은 기운을 갈무리하면서 손끝에만 집중시켰다. 외부에서 사혈련의 기운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귀진아.”
“알겠습니다. 여기서 목을 꺾어 놔야 기분이 풀릴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요.”
사귀진이 손에서 힘을 풀자 진협교는 한 번에 몰려서 숨통을 타고 들어오는 공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쿨럭. 크흑…… 쿨럭.”
“이제 대답해 보거라. 어째서 방향을 돌리고 문주의 집무실로 왔느냐. 또한 문 앞에서 발걸음이 느려진 것도 말하거라.”
“쿨럭, 크으읍. 그것은 정말로 오해입니다. 저는 단지 이 앞에 서류들을 보관한 곳으로 가려던 것뿐입니다.”
설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빠른 일 처리를 위해 서류들을 보관하는 방이 집무실의 바로 옆이다.
“흘리는 기운으로 보아 분명 사혈련의 무인이고, 이름을 듣건대 귀문살의 사귀진인가?”
“흥, 맞다.”
“진협교는 분명 내 오른팔 같은 사람. 상황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마음대로 하면 안 될 것이다.”
사귀진의 눈에 혈광이 떠올랐지만 천일영의 손짓에 억지로 기운을 거두었다.
가뜩이나 마땅치 않은 정파의 섬이다. 사귀진의 표정을 가늠하던 설의룡은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려면 수하의 의심부터 지워야 했다.
“교협아, 네가 대답하는 것에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이렷다?”
“문주님, 억울합니다. 어제 처리하다 미처 마무리를 못 한 문서를 가지고 문주님께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주님이 집무실에 계신지 안 계신지 몰랐기 때문에 기척을 살피기 위해서 발걸음이 느려진 것입니다.”
설의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협교가 집무실을 기웃거리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천일영과 사귀진의 의심은 여전했다.
‘완벽한 대답을 내놓고 만족을 하는 표정이군. 또한 집무실로 올 때 너는 너무 빨랐다. 마치 상황을 보는 듯했지.’
그러나 의심을 앞세워 설의룡의 수하를 언제까지 붙잡을 수는 없다. 또한 고문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잠시 동안 고민을 하던 천일영의 머리에 한 수가 떠올랐다.
“채홍아, 진협교라는 자의 옷을 모두 벗기거라.”
“알겠습니다, 공자님.”
금채홍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 금룡참월하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진협교이 입고 있는 옷을 잘라 냈다.
그 신속함과 망설임이 없는 움직임에는 무공의 수위가 한참이나 높은 설의룡이나 사귀진도 꽤나 놀라는 표정.
“으…… 으헛! 제 옷을 왜 자르는 것입니까? 아무리 문주님의 손님이시지만 이것은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흐음…….”
속옷 한 장만 남기고 알몸이 된 진협교을 바라보며 천일영의 얼굴에 잠시 난처함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천일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금채홍이 날 선 금룡참월하검을 어깨에 걸치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속옷도 자를까요?”
“그러는 것이 좋겠구나. 그러나 거기는 자르지 말아라.”
“쳇.”
금채홍이 검을 다시 들어 올리자 진협교는 중요한 부분을 손으로 가리면서 울상이 된 얼굴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금채홍은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검을 휘둘렀다.
“꺄악! 왜들 이러세요, 당신들!”
휘잉! 휘이잉!
진협교의 괴성이 온통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검에 속옷이 맞닿지 않도록 몸을 신속하게 움직였지만, 이미 금채홍의 검은 진협교의 속옷을 다섯 갈래로 찢어 사방에 흩뿌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베어져 나가는 속옷을 확인한 순간, 벌게진 얼굴의 진협교는 급격하게 표정이 굳었다.
투둑. 투두둑.
진협교의 가랑이 사이에서 작은 붓 하나, 그리고 접은 종이 몇 장과 손가락 마디만 한 먹통이 떨어졌다.
그것은 시중에서는 쉽게 구하지 못할 만한 물건으로,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가랑이 사이에 넣고 다녀도 불편함이 없도록 제작이 된 물건.
그리고 바로 천일영이 진협교의 몸에서 찾고 있던 물건이기도 했다.
“몰래 편지를 써서 전서구를 날릴 수 있는 연락책을 가지고 있구나. 네놈 앞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 많을 것이다.”
“크윽! 오해입니다. 급한 연락은 언제나 전서구를 사용하고 있고, 글을 쓰는 도구는 몸에 지니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저는 급할 때를 대비해 먹과 종이를 제 몸에 맞도록 만들었을 뿐입니다. 어제도 이것을 사용하여 전서구로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어제도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지금 네 입으로 네 정체를 자백했구나.”
“네에?”
순간 설려온과 매호란의 눈에 절망과 원망이 가득 떠올랐다. 무려 십오 년을 믿고 따랐던 사람이었다.
이런 간자를 십오 년이나 오라버니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 개새끼! 지금 당장 죽여 버리겠다. 으아아아!”
순간 설려온이 검을 들고 진협교에게 신형을 날렸다. 그러나 설려온의 분노가 가득 담긴 검 끝은 진협교의 목줄 바로 앞에서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사귀진이 설려온의 검이 들려져 있는 팔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위에서 찍어 누르며 멈추게 만든 것이다.
“죽이면 안 된다.”
“하지만! 저놈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분노가 눈에서 이글거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설려온을 바라보는 설의룡은 영문을 알지 못했다. 결국은 매호란이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남도에 전서구를 탈취하는 맹금류가 수백이나 풀어져 있었습니다. 전서구로 연락을 한다는 것은 맹금류를 피해 편지를 전달하는 특별한 전서구가 있다는 이야기. 이것이 간자의 증거입니다.”
“뭐…… 뭐라? 전서구를 탈취하는 맹금류? 진협교, 자네가 정말로?”
설의룡과 눈이 잠시 맞닿은 진협교는 고개를 숙였다. 설의룡이 분노를 보였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의룡은 아직도 자신을 아들처럼 보고 있었다. 진협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합니다.”
“어찌 이런 일이…….”
설의룡은 주저앉았다. 진협교가 간자였다는 것에 받은 충격도 대단했지만, 또한 해남파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한 배신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어째서 상대가 늘 한 수에서 두 수 앞을 보고 우리의 목줄을 조르는가 했더니만……. 저놈 때문이었다니.”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설의룡, 이제부터 이놈은 우리를 위해 일을 하게 될 터이니.”
“우리를 위해 일을 하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놈은 여전히 전서구를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앞으로 놈은 우리가 원하는 내용만 놈들에게 보내게 될 것이다.”
처음으로 쓸 만한 패가 손아귀에 쥐어진 천일영이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 * *
다섯의 어부들의 시신을 처리한 유향설은 인근의 높은 나무 중턱에 자리를 잡고 무성한 잎으로 신형을 가렸다.
손은 시신을 뒤질 때 죽은 어부들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 때문에 끈적거리기는 했지만, 이내 주변의 향기 강한 나뭇잎으로 닦아 냄새를 지워 냈다.
‘시신들의 배에 구멍을 내서 바다에 던졌으니 다시 떠오를 일은 없겠지.’
어리석은 무인들은 시신을 유기할 때 그냥 물가나 바다에 던진다. 허나 그리하면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 다시 떠오른다. 스스로 증거를 보이는 꼴이었다.
시체가 다시 물 위로 떠오르는 이유는 부패가 진행되면서 배 안에 공기가 차게 되어 떠오르는 것. 때문에 검으로 배를 여러 군데 찔러 두면 공기가 빠져 버리니 시신이 떠오를 일은 없다.
‘이것도 사귀진 단주가 예전에 천마님에게 배운 것이라고 했지.’
유향설은 잠시 천일영의 생각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이내 즉시 다가오는 또 다른 어부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정신을 되돌렸다.
‘겨우 반 시진 사이에 또 다른 놈들이 오다니. 이 정도면 수백에 달하는 놈들이 침입해 있다는 것이지.’
유향설은 나무에서 나무 사이를 옮기며 지면에 발을 대지 않고 다섯의 간자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런데 간자들을 쫓던 과정에서 이상한 부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다니는 길 이외에, 오랜 시간 사람들이 밟고 다녀 풀이 누운 좁은 길에 틈틈이 설치해 놓은 함정이 작동했는지 살펴보고 가는 것이었다.
그 길은 각 마을에 살고 있는 어부들이 지름길로 다니던 길일 터다.
‘이 망할 놈들! 원래 여기에서 살던 어부들이 다니는 길에 함정을 설치하고, 그들을 죽여 온 것인가. 그들이 없어진 자리를 자신들이 메우면서?! 그렇다면 그동안 도대체 몇 명의 사람들을 죽여 온 거란 말인가.’
유향설은 등에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
돌아오지 않는 어부를 가족들이 찾아 나서다가 함정에 또 죽는 것을 생각하면 집안 하나 아니, 어촌 하나쯤 자신들의 세력으로 갈아엎는 것쯤 간단하다. 아무런 의심 없이 몇 개월이면 가능한 일이다.
‘이들을 추적해 봐야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군. 어촌을 점령한 것이라면 본문 같은 거 만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테니.’
마을 단위를 생각한다면 간자의 수는 수백이 아니라 어쩌면 수천에 달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도달했을 때, 유향설은 등 뒤에 끼쳐 오르는 소름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럼 그렇지. 삼류 무인 정도만 섬에 풀어 둘 리는 없겠지.”
유향설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다섯 명을 기감으로 느끼며 검을 빼어 들었다.
유향설이 기운을 죽이고 있듯이 상대편도 기운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판단을 할 수는 없지만 대략 절정 고수 한 명에 나머지는 일류 고수인 듯했다.
유향설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다섯의 고수들을 상대하기 전에 신형을 날려 나뭇가지 틈새에 숨었다.
타다닷. 타탓.
간자들이 걸어가는 방향에서 다섯 고수들이 신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은 유향설을 노린 것이 아니라 간자들을 확인하기 위한 것 같았다.
그중에서 절정 고수로 보이는 자가 입을 열었다.
“팔십칠 조가 보이지 않는다. 혹시 그들을 못 보았나?”
“팔십칠 조면 저희 바로 앞이지 않습니까? 저희는 보지 못했습니다.”
“핏자국이나 피 냄새는?”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함정도 모두 그대로이고요.”
“알았다. 계속 임무를 수행해라.”
“네.”
다섯의 고수들은 유향설이 지나온 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하나씩 조를 만들어 움직이는 간자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유향설은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저놈들이라면 뭔가 좋은 걸 알려 줄 것 같은걸.’
유향설의 얼굴이 맛있는 먹이를 발견했을 때와 같이 환한 웃음을 지었다.
* * *
다섯의 고수는 간자들이 죽은 자리를 조사했다. 옅게 풍기는 피 냄새가 그들을 인도한 것이다. 한동안 시신을 찾던 다섯 고수들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침입자가 시신을 처리한 흔적이 예사롭지 않구나. 돌아가서 수색대를 편성한다.”
“네.”
고수들은 경공술을 사용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른 길로 달리기 시작했다. 바로 해남도의 가운데에 솟아 올라와 있는 오지산(五指山)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제야 나를 너희들의 집에 데려다줄 모양이구나.’
유향설은 약 이 리 떨어진 뒤에서 신중하게 다섯의 고수들을 쫓았다. 상대도 기감을 펼친 상태.
그러나 초절정 고수인 유향설의 기감이 훨씬 넓었다. 하지만 유향설의 신중함은 직선이 아닌 좌우로 몸을 피해 가며 쫓는 방법을 택했다.
이 각이 지난 후.
다섯 고수는 오지산 중턱에 마련이 되어 있는 장원으로 들어섰다. 나무들로 앞을 가려 그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쓴 것이 보일 정도.
‘이제 염탐을 할 것인가. 아니면 천마님에게 보고를 해야 할 것인가.’
유향설은 아주 잠시 고민에 빠졌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눈앞의 먹이에 달려들 때가 아니다. 맛있는 것은 나중으로 미뤘다가 한 번에 포식을 하는 게 좋다.
결심이 서자 뒤로 미련 없이 몸을 돌렸지만, 눈앞을 가로막는 신형에 유향설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애써 잘도 따라왔구나. 네가 추적한 놈은 너를 몰랐다. 허나 중간부터 너를 따라온 나를 너도 모르더군.”
“여자의 뒤를 몰래 따라오다니 끔찍하네요. 얼굴도 내 취향이 아닌데 곤란합니다.”
“아쉽군. 그대는 딱 내 취향인데. 이렇게 되면 강제로 잡아서 곁에 두어야겠는걸?”
“저는 거친 남자는 싫어한답니다. 힘이 센 남자보다 달콤한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좋아요.”
“나는 부드럽고 달콤한 사람이네. 살점을 하나씩 잘라 내면서 그대가 누구인지 달콤하게 물어봐 주지.”
눈앞의 남자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