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눈앞의 남자가 검을 빼어 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유향설은 살짝 침을 삼켰다.
유향설 그 자신도 초절정 고수에서도 원숙한 단계에 접어든 지 오래다. 잔혹함도 그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자신보다 배는 더 위험한 냄새가 났다. 도무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뿜어내는 기운이 아니었다.
‘곤란하게 만드는 남자네. 이렇게 되면 원래의 계획대로 도망을 가야겠지. 실력은 아마도 호각. 그런데 왜 도망을 가지 못할 것 같은 것인지.’
유향설은 경공술로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초절정 고수가 적을 눈앞에 두고 등을 돌리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그깟 자존심 때문에 죽는 사람을 얼마든지 보아 왔다.
그러나 순간 유향설은 이상한 느낌과 서늘한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상대가 자신을 쫓아오지 않는다.
‘뭐지? 경공술이 느린 놈인가?’
그러나 조금의 거리가 벌어지고, 아주 순간의 잠시 후.
“나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고맙군.”
순간 남자의 손에서 연환십이참(連環十二斬)이 펼쳐지며, 비침이 사방으로 유향설의 몸을 둘러쌌다.
경공술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비침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하며, 또한 경공술을 사용하는 동안은 즉시 멈추거나 방향을 급격하게 바꾸는 것도 힘들다.
남자는 일부러 유향설이 도망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등 뒤에서 비침을 날린 것이다.
촤촤촤촥!
수십 개의 비침이 날아드는 소리. 유향설은 경공술을 사용하면서도 눈을 감고 귀에 기를 모으며 몇 개의 비침이 날아드는지 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삼십사 개!’
유향설은 몸을 돌리는 동시에 검을 뽑아 비침을 쳐 내기 시작했다. 비침이 날아드는 방향과 그 수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
수많은 수라장을 겪어 오며 침착함을 유지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유향설은 차례로 비침들을 바라보며 하나씩 땅에 떨어뜨렸다.
챙. 채챙. 채챙. 채챙.
유향설의 검에 맞아 튕겨 나가는 비침들이 하나씩 나무에 박혀 들어갔다.
그러나 유향설이 하나 모르고 있던 것은, 상대편이 비침의 궤도를 일부터 틀리게 날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비침이 날아드는 것으로 위장을 하고 두 개의 비침을 묶어서 날리는 것. 그것을 조금 힘을 다르게 날려 중간부터 하나처럼 보이던 비침이 둘로 나눠져 궤도를 바꾸는 것이다.
비침의 수는 삼십사 개가 아니라 삼십오 개였다.
푸욱!
“크흡!”
왼쪽 팔에 비침이 박히자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마비가 느껴졌다. 유향설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검으로 자신의 팔꿈치가 있는 곳부터 손목이 있는 곳까지 비침을 맞은 방향으로 살을 도려냈다.
촤악!
“끄으으윽!”
“호오……. 그 많은 비침 중에 하나만 맞았다니 대단하군. 게다가 비침을 맞은 곳의 살을 도려내는 것도 훌륭하다. 그러나 과연 이것도 피할 수 있을까?”
남자의 손의 움직임에 따라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이 쏟아져 나왔다. 수백 개에 달하는 비침. 순간 유향설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X팔…….”
자신이 먹이가 되어 비침에 삼켜진다. 유향설은 욕설을 할 수밖에 없었다.
촤촤촤촥.
비침은 바람을 타는 듯 눈앞으로 날아왔다. 이것은 칼로 쳐 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었다.
유향설은 순간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단 하나뿐.
그러나 그 방법이 모든 비침을 막아 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곳이 산속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겠구나.’
휘리리릭! 휘잉!
유향설은 눈앞으로 다가오는 비침을 향해 기운을 끌어 올려 검을 휘둘렀다.
풍압을 만들어 내어 일부 비침들이 궤도를 벗어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유향설은 나무 뒤로 신형을 날렸다. 모든 비침이 풍압에 방향을 트는 것은 아니다.
타다다다닥!
나무에 꽂히는 수백의 비침. 유향설은 비침을 날리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거진 풀숲이나 나무가 있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향설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몸을 파고드는 비침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푹. 푸북. 푸부북!
“으흡!”
유향설은 순간 자신의 다리에 박히는 다섯 개의 비침에 눈앞이 어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분명 이 방법이라면 자신은 무사해야 했을 터다.
하지만 틀렸다. 다리로 퍼지는 마비의 기운에 유향설은 검으로 오른쪽 허벅지를 도려낼 수밖에 없었다.
촤아악!
“끄아아아악!”
“볼수록 제법이군? 이번에는 확실하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겨우 다섯 개의 비침만이 몸에 박히다니 생각도 못 한 일이군.”
“크윽! 분명 피했을 텐데!”
“나무에 숨든 풍압을 날리든 나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망할 새끼.”
오른쪽 허벅지와 왼팔에서는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기를 돌려서 막아 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만 다리를 마음껏 쓰는 것은 불가능할 터. 또한 살점을 잘라 냈지만 빠른 독의 효능은 어느 정도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즉, 몸이 둔해지고 있었다.
“죽기 전에 하나 알려 주지. 비침이 날아가는 방향은 한 곳이 아니라 네 곳이다. 그러니 네가 아까도 다섯 개의 비침을 맞은 것이지. 재미있는 놀이였지만 이제 그만이다.”
“이런 X팔!”
남자의 손아귀에서 또 한 번의 비침이 튀어나온다.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이다. 연속으로 두 번의 독문암기를 날리는 남자의 모습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독문암기를 날리면 응당 여인은 죽어야 하지만 해남도에 들어와서는 일부러 독성이 낮은 비침을 사용하고 있었다. 상대가 아는 것을 실토시킬 만큼 살려 두는 것이다.
타다다닷.
유향설은 이를 악물고 신형을 날렸다. 나무 뒤에 숨어 있어도 소용이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유향설은 바로 등 뒤에 따라오는 비침들의 소리를 들으며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다음, 몸을 비틀고 장풍을 쏘아 보냈다.
파앙!
그러나 온 힘을 다해 내보낸 장풍은 오른쪽 방향으로 찔러 오는 비침들의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다. 유향설은 허공에서 검을 들어 남은 비침들을 쳐 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검을 쥔 자신의 손에도 하나씩 비침이 박혀 갔다.
채챙. 채챙. 채채챙.
둔해진 감각. 손마디는 검을 쥐었는지 느껴지지 않았다. 무인의 감으로 단지 비침을 쳐 낼 뿐.
“이런!”
순간 유향설은 자신의 아래 거대하게 드러나는 땅의 형세를 보고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리의 감각도 둔해져서 벼랑 끝을 지나 허공에 떠 있는 것을 이제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빌어먹을, 일부러 이쪽으로 몰아넣은 것인가.’
푸부북!
그러나 자신의 실책을 후회할 틈도 없이 유향설의 가슴께에 다섯 개의 비침이 박혔다.
그리고 연이어 온몸에 박혀 드는 또 다른 비침들. 그 수가 수십이나 되는 양이다.
파박. 파바박. 파파파팟.
“크윽!”
평소라면 분명 별거 아닐 정도의 절벽. 그러나 독에 마비가 온 유향설의 몸은 속절없이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이건 좀 위험하네. 아니, 이미 독침을 맞은 순간 위험했나. 놈! 분명히 죽이지 않고 잡아서 고문을 할 요량으로 마비침을 사용한 것이지?’
촤아학! 투둑. 우지끈!
무려 일 리 정도에 달하는 높이에서 떨어지며 유향설의 몸이 나뭇가지에 부딪혔다.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기에 속도가 많이 붙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몸이 맞고 튕겨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두꺼운 나뭇가지를 그대로 꺾어 내며 유향설의 몸이 내리꽂혔다.
뿌드드득! 콰각!
‘끄아아악! 장기가 파손되었나!’
몸뚱이는 움직이지 않은 채 여러 개의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유향설은 땅바닥에 패대기쳐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굴이 하늘을 향하게 떨어진 것이다.
촤아아악!
그리고 그 순간, 유향설은 믿을 수 없게도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는 물체를 보았다.
“진짜 싫은 남자네!”
수천 개의 비침들. 그것은 마치 사천당문의 만천화우(滿天花雨) 같았다. 이 정도의 암기를 뿌리는 곳은 온 무림을 뒤져도 사천당문 정도니까.
파바바박!
유향설은 온몸이 마비가 되어 있어 자신의 몸에 비침들이 꽂히는 것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내 얼굴과 눈가를 뒤덮는 비침들 때문에 자신이 수백 개의 암기에 속절없이 당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참을 수 없는 섬뜩함에 유향설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입조차 열 수 없었다.
절벽의 위.
남자는 절벽 아래 나뭇가지가 꺾인 방향으로 날린 만천화우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뒤에는 어느새 한 명의 젊은 여인이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절벽 아래를 바라보았다.
여인이 손가락에 다섯의 비침 통을 끼우고 유향설의 목숨을 끊어 내려 하자 남자의 손이 올라와 그것을 말렸다.
“이 정도가 딱 좋구나. 일부러 이곳으로 유인했고, 일부러 살려 둔 것임을 잊지 말거라.”
“죄송합니다. 평상시의 버릇이 그만…….”
“한 시진이나 길어야 두 시진 후에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때 저년이 움직이면 동료들과 접촉을 하려 할 터. 그놈들이 누구인지 알아 오거라.”
“위험한 방법입니다. 또한 비침을 너무 맞아 죽을 것입니다.”
“하루 동안은 살 것이다. 마비를 가장하고 있지만 독은 천천히 몸의 혈도에 자리를 잡게 되고, 하루가 지나면 온몸에서 피를 뿜어내며 죽는다. 또한 진협교에게 전서구를 날려서 누군가 설의룡과 접촉한 자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거라.”
“존명.”
남자가 웃음을 지으며 인피면구를 벗자 안에서는 사천당문의 첫째 아들 당추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 더. 너는 나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네 처지를 잊지 말거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당추필은 등을 돌리고 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은 그 모습 잠시 보다가 이내 절벽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스산한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입술은 조금 전과 달리 비틀린 채다. 당추필, 그자가 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망할 새끼, 인질이나 잡아서 협박하는 놈이 충성을 바라다니.’
절벽 아래로 빠르게 내려가는 여인 당양희는 비틀린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 * *
한편 흐려져 가는 눈에 힘을 주어 정신을 차리려는 유향설은 자신의 몸 상태를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감각까지 모두 마비가 되어 있어 쉽지 않은 일이다.
‘아직 시집도 못 갔는데 팔과 다리에서 한 움큼 살을 베어 냈네. 그나저나 그 남자, 분명 사천당문인 것 같은데 어째서 나를 일부러 살린 것이지? 분명 나를 절벽으로 몰아넣은 것 같은데.’
지도를 손에 넣은 것은 황실에서 엄금한 일이다. 그러나 황실의 명령쯤 무림인들은 언제나 개소리쯤으로 안다.
이곳에 오기 전 이미 지형도를 손에 넣어 자세히 보았다. 처음부터 절벽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분명 나를 살려 두고 내가 누구를 만나는지 알아보려는 것이겠지. 헌데 왜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 것이지? 잡아서 고문을 하면 될 터인데.’
유향설의 가슴속에 불길한 느낌이 쿵 하고 떨어진다.
‘그나저나 진짜 큰일 났네.’
유향설은 생각에 잠기던 도중에 자신의 몸에 찾아온 변고를 느끼며 숨을 거칠게 쉬었다. 독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증상이 나온 것이다.
‘소변 마려워 미치겠다. 왜 하필 마비가 되어서 움직이지 못할 때…….’
유향설은 설려온을 떠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려 했다. 그러나 목이 움직이지 않아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다 이내 정신을 잃었다.
* * *
천일영은 지도를 펴고 설의룡과 사귀진, 그리고 설려온과 매호란과 함께 여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지점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해남도 전역으로 넓히고 있었는데, 그 방법이 여러 명의 병법가가 전체를 지휘하듯 명확하고 체계적이었다.
“여족들이 체계적으로 변한 것은 이 년 전이군. 그간 도움 요청은 한 적이 없는가?”
“내가 맹으로 보낸 편지만 수백 통이다. 명분으로는 해적들과 왜구들, 그리고 여족은 원래 나라가 관여를 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관무불가침으로 거절을 한다는 것이네. 또한 해남파가 오래전부터 그들을 막는 일을 해 온 것은, 해남파가 맹에 승인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해 왔던 일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관여할 이유가 없다고 하더군.”
“핑계치고는 명문이 있다는 것인가.”
그때 문밖에서 허둥지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수십에 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그…… 그것이 맹에서 지원이 나왔다고 합니다. 지금 밖에서 신원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뭐…… 뭐라? 맹에서 지원이?”
설의룡의 얼굴이 순간 밝아졌다.
그러나 천일영의 덤덤했던 얼굴은 이내 굳었다. 지나치게 절묘한 지원은 왠지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