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설의룡은 잠시 당황했다. 천마와 사혈련의 무인들을 무림맹의 지원 앞에서 보일 수는 없는 일이다.
“려온아, 지금 이곳에 계신 분들을 모시고 나무숲 안에 있는 별채로 들어가거라. 그곳에는 진이 몇 겹으로 둘러져 있어 모습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기운도 차단된다.”
“알겠습니다.”
설려온이 아버지 설의룡에게 고개를 숙이는 사이, 천일영이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맹의 지원이라. 한번 보고 싶은데?”
“뭐…… 뭐라?”
설의룡은 천일영의 표정을 보고 가슴이 덜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한번 말하면 절대 뒤집지 않는 성격.
그것이 기억난 설의룡은 식은땀을 흘렸지만 의외로 천일영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일 정문으로 만나러 오지.”
“포…… 포기한 것이 아니었느냐.”
“손님으로 오면 상관없겠지.”
“하아……. 내가 부탁한 입장이니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말릴 수가 없구나.”
“괜찮다. 금채홍이 알아서 해 줄 거다.”
“에엑?”
금채홍은 아미파의 제자다. 당연히 풍기는 기운도 정파의 기운이다.
애당초 정파의 소굴에서 움직이려면 같은 정파의 사람이 움직이기 편했다. 그리고 금채홍을 데리고 온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채홍이의 큰 간덩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터.’
푸드득.
천일영은 금채홍의 성격을 생각하며 밖으로 나섰다. 그때 마침 진협교에게 전서구가 날아들었다.
놀랍게도 전서구는 흔히 쓰이는 새가 아니라 작은 맹금류였다. 떨어진 곳에서 보면 비둘기 정도로 보인다.
“뭐라고 쓰여 있느냐?”
“침입한 여자 간자가 있다고 합니다. 혹 문주님을 찾아온 사람이 없냐고 물어봅니다만…….”
“어찌 답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간자가 어찌 되었는지 적혀 있느냐.”
“거기까지 적혀 있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별채 안으로 들어간 후, 천일영은 기운을 죽인 채 신형을 날렸다.
유향설은 자신이 고집하여 데려왔다. 헌데 불길한 느낌으로 심장이 날뛴다. 유향설과 헤어진 장소. 그곳으로 천일영은 천지일축공으로 쏘아져 나갔다.
한편.
설의룡은 급히 밖으로 나섰다. 맹에서 지원을 나왔다면 마중을 나가는 것이 예법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다. 그때 해남파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초절정 고수 한 명에 절정 고수 하나, 그리고 일류 고수가 사십이 넘는다. 대단한 전력이다. 맹에서 제대로 지원을 해 주었구나.’
이 정도라면 기울어 가는 해남파의 전력을 되돌릴 수 있었다. 설의룡은 가슴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남파의 문주님이십니까. 맹에서 지원을 나왔습니다. 대규모의 지원은 아니지만 모두 실력자만 모였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맹에서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먼. 모두 일당백, 일당천의 무인들이 아닌가. 그러나 나에게 먼저 보여야 할 것이 있을 것이네.”
“맹의 증표 말입니까.”
번듯하고 쾌활하게 생긴 남자의 품에서 편지가 나왔다. 비교적 젊은 사십 대의 남자인데 풍기는 기도가 이미 초절정 고수.
설의룡은 편지를 열어 보고 즉시 눈에서 의심의 그림자가 지워졌다. 분명 무림맹주의 도장이 찍혀 있는 편지다. 위조가 불가능한 도장이기 때문에 설의룡은 마음껏 안심했다.
“확인했네. 내 맹에서 도움을 준 것을 잊지 않을걸세. 그리고 이 먼 길을 와 준 자네들에게도 마찬가지일세.”
“같은 무림맹의 사람들로서 서로 돕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도움을 주러 왔으면서도 포권을 취하며 설의룡에게 예를 표하는 남자. 그에게 설의룡은 마음을 놓고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설의룡과 마주한 남자 사천당문 당추필. 그 역시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완벽하게 해남도에 숨어든 것에 만족하는 웃음이었다.
* * *
‘작은 장원 하나. 그리고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의 흔적. 게다가 비침들이 나무에 박혀 있군.’
천일영은 흔적을 따라 싸움이 벌어진 곳까지 도달했다. 나무에 박혀 있는 비침을 빼낸 천일영은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다, 간자로부터 입수한 품 안의 비침들을 꺼내어 들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분명 같은 방식의 비침이군. 헌데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비침을 입수했을 때부터 느꼈던 위화감. 그것은 다름 아니라 비침의 형태가 천마신교의 마왕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라는 것이었다.
‘천마신교에서 사용하는 비침은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하여 가운데가 조금 볼록하다.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만든 것이지. 반면 사천당문은 독침 통에 많은 비침을 넣기 위하여 가늘고 길게 만든다. 한 번에 수백 수천의 비침을 날리기 위해서.’
마치 천마신교가 꾸민 일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는 듯한 비침. 천일영은 비침 몇 개를 다시 품 안에 넣고 벼랑 끝에 섰다.
“장원 안에는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도망을 갔거나 비침에 맞아서 죽어 가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죽었…….”
천일영은 다급한 마음으로 기감을 넓게 퍼트렸다.
‘이십 리에 달하는 기감을 펼치는데, 없다? 그럴 리가……?!’
흔적조차 없는 기척. 천일영은 내공을 끌어 올려 더욱 기감을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미 유향설이 죽었다는 의미다. 기감이 삼십 리, 이내 사십 리에 도달했다.
‘아니…… 오히려 이상한 것은 이쪽인가? 이곳에만 마치 구멍이 뚫려 있는 것처럼 동물들의 기척까지 지워져 있군.’
절벽의 바로 아래. 그곳의 한 지점이 마치 죽음의 땅처럼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천일영은 안도하는 마음을 느꼈다.
자신이 모르는 어떤 방법으로 그곳의 기척을 지웠다. 그리고 그곳에 유향설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또 죽어 가고 있기만 해 봐라. 만나는 놈들마다 살려 주는 것도 이젠 지겹다.’
한 지점만 기척이 지워져 있는 신기한 일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천일영은 벼랑 끝의 바위를 박차고 벼랑 아래 기척이 지워진 곳을 향해서 화살처럼 날아갔다.
* * *
‘경추와 척추에 모두 스며들어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독 척비향(脊痹香)을 피웠다. 이것으로 초절정 고수라 할지라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할 터. 기감도 펼치지 못하고 어지럼증이 생기며 감각이 극도로 마비된다.’
당양희는 유향설의 곁에서 떠나 10장 정도 거리를 두고 수풀에 몸을 숨겼다.
‘이미 가문은 동생의 치료비로 거의 모든 재산을 날렸으니 이번 일은 절대 실패를 하면 안 된다. 실패하면 동생은 죽는다.’
차도가 없는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동생의 뒤를 봐주기로 한 것이 바로 당추필.
허나 당추필을 따르는 동안 뒤틀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하여 입술을 깨무는 사이, 어느새 입술 안쪽의 연한 살에 굳은살이 박였다.
‘저 여자만 아니었다면…….’
여자 간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다. 해남도의 일이 거의 끝나 가는 지금, 저 여자가 흙탕물을 튀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민 탓이다.
이번 일에 동생의 명운(命運)이 달려 있기에 만약 저 여자로 인해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린다.
“입술에서 피를 흘리고 있으면 애써 기척을 지운 것이 소용없지 않느냐. 피 냄새가 이미 제법 퍼졌다.”
“무슨?! 누구냐!”
순간 당양희는 심장이 쪼개지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이곳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
척비향(脊痹香)을 사방에 일 리가 넘게 퍼트려 놓았다. 그런데 이곳을 어찌 찾은 것인가.
‘아니다. 나를 찾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척비향이 뿌려진 곳에 어찌 저자가 피 냄새를 맡고 있다는 말인가. 분명 모든 감각이 마비가 되어 냄새를 못 맡아야 할 터인데!’
순간 당향희의 손가락에 끼워진 독침 통 다섯 개가, 팽팽하게 긴장을 하고 있는 근육을 튕기듯 날아갔다.
그러나 당양희는 순간 믿을 수 없는 것을 목도하고 입술의 피가 턱으로 흘러내릴 정도로 굳은살이 박인 안쪽 살을 깊게 깨물었다.
후우웅!
다섯 개의 비침 통에 들어 있는 수백에 달하는 암기. 그것이 마치 허공에 멈춘 듯 떠 있다. 눈앞의 남자가 팔을 한 번 휘저은 것만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공포심이 당양희의 척수를 따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감당할 수 없는 상대.
그러나 순간 남동생의 얼굴이 떠오른 당양희는 이를 악물었다.
“네, 네놈! 죽인다. 난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 없다!”
“얼굴은 놀라고 온몸은 공포심에 질려 있는데 기개는 꺾이지 않다니 대단하구나.”
“이 일은 반드시 성공을 해야……?!”
파파팟!
순간 당양희는 얼음 속에 갇힌 듯 꼼짝도 못 했다. 자신이 날린 암기. 그것이 자신의 몸으로 박혀 들었다.
모든 암기가 박힌 것이 아니었다.
허공에 떠 있는 암기 중에서 단 여덟 개만이 날아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혈도에 박혔다.
‘수백의 비침을 손짓 한 번에 멈추게 하고, 몇 개만 방향을 바꿔 날리는 것이 가능한가. 아니다. 이것은 사천당문 문주님, 그분조차 넘보기 힘든 경지. 왜 이런 놈이 해남도에…….’
당양희의 신형이 무너지듯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천일영은 당양희를 부드럽게 받아 들었다.
“비침을 맞고 어찌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억울해서인가? 어쨌든 대답은 나중에 듣지. 저기 또 쓰러져 있는 놈이 있으니까.”
천일영은 당양희를 유향설 옆에 뉘었다. 그리고 즉시 유향설의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몸 안을 들여다보았다. 백여 개가 넘어가는 비침들이 온몸에 꽂혀 있는데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이게 또 재미있군. 마비처럼 보이도록 하고, 혈도에는 독이 자리를 잡고 있다니. 이런 것은 독천마왕도 못 할 것 같은데?’
독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지만, 이 정도의 독을 만들어 내고 사용한다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연구를 해 왔다는 것이다.
천일영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렸다. 수백 년에 걸쳐서 독을 연구하고 만들어서 이만큼의 새로운 비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곳이 무림에서는 한 곳뿐이니까.
‘사천당문인가? 놈들, 가당치 않은 짓을 하는군.’
천일영은 유향설의 가슴께로 진기를 흘려보냈다. 초절정 고수라고 해도 자칫 잘못하면 죽을 만큼의 양.
그러나 천일영은 그것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며 각 혈도에 퍼져 있는 독을 빨아들였고, 이내 진기는 허공으로 두 방울의 독을 띄었다. 독으로는 엄청난 양이다.
‘유향설의 온몸이 터져 피를 뿌릴 만큼의 독을 집어넣었군.’
천일영은 유향설의 몸에서 빼낸 독을 허공에서 기막으로 여러 차례 감싸고, 그것을 품 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유향설의 몸에 손을 얹고 진기를 집어넣었다.
“으음!”
“정신이 드는 모양이구나. 잠시 누워 있거라. 치료가 끝나지 않았다.”
“공자님께서 저를 구해 주셨군요. 치료까지 해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괜찮다. 어차피 또 내가 치료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네에?”
천일영이 기운을 집어넣자 유향설의 눈이 커졌다. 온몸에 꽂혀 있는 비침이 손을 대지 않았는데 밖으로 밀려 나왔다. 또한 순식간에 자신이 도려낸 살이 아물고 새살이 돋아 올랐다.
불과 반 다경도 되지 않아서 온몸이 회복되는 것을 느낀 유향설은 이것이 과연 극마의 경지에서 가능한 일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 희한한 독무도 치워야겠구나.”
“독무? 그런 것이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지만 처음부터 독무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던 천일영은 주변으로 바람을 끌어들여 한 번에 사방으로 퍼트렸다.
파앙!
유향설은 순간 자신의 코가 뚫리고 멍했던 귀가 잘 들리게 되었으며, 심지어 이제서야 손가락 마디의 감각들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감각이 돌아오자 유향설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으윽!”
“왜 그러느냐. 아직 아픈 곳이 있는 것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유향설은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도무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엉금엉금 기어서 나무 뒤로 돌아 들어갔다.
잠시 후 나무 뒤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쉬아아아아…….
‘싸…… 쌀 뻔했다. 독무 때문에 감각이 무뎌져서 모르고 있었어.’
행복한 마음으로 온통 젖어 들었다. 배가 찢어질 듯 아파 와서 몸도 일으키지 못하고 기어서 왔으니 얼마나 오래 참은 것인가.
그러나 행복한 마음도 잠시, 유향설은 천마가 나무 뒤에 있다는 것이 생각나면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엄청난 소리가 나고 있었기에, 이내 유향설의 얼굴은 붉어진 것에서 다시 새파랗게 질려 가고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다.
“머…… 멈추지가 않아! 끊을 수가 없어! 꺄악~~~.”
유향설의 외마디 비명이 오지산 안에 넓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