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허허…… 이렇게나 예쁘신 소저가 어찌 해남파의 문주님과 인연이 되셨습니까.”
“삼 년 전쯤 제가 상단의 배를 가지고 해남도에 왔을 때 해적 무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수백에 달하는 해적들을 만나 죽을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 문주님께서 살려 주셨지요.”
“호오…… 그런 인연이 있으셨을 줄이야. 아름다우시면서 상단까지 운영하시고 대단하십니다.”
금채홍이 금룡참월하검을 안고 당추필의 말에 맞춰 가며 살짝 얼굴을 붉힌다.
기가 막힌 연기다. 단아하고 우아한 느낌의 여인이 요염한 색기를 흘리는 것이 미묘한 차이를 만들며 방 안에 숨 막히는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덩달아 얼굴이 붉어지던 당추필이 순간 천일영을 보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소저, 뒤에 계신 분은 누구신지?”
“이 사람은 제 몸종입니다.”
당추필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금채홍도 당추필의 웃음에 맞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 몸종은 데리고 다닐 때 창피하지 않으려고 얼굴을 보고 뽑았습니다. 그러나 무공도 못 하고 일을 잘 못 하는군요.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허허……. 저리 얼굴이 잘생겼으니 남편으로 오해를 사겠습니다.”
“저는 제 몸종처럼 계집같이 생긴 놈은 별로입니다. 오히려 공자님처럼 남자다운 사람이 좋습니다.”
“제가 패기 있게 생겼다는 말은 자주 듣습니다.”
당추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진다. 단정하고 깔끔하게 생긴 몸종 놈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다.
그런데 자신의 얼굴이 좋다고 하니 어찌 기분이 좋지 않겠는가. 때마침 당추필의 얼굴이 다시 한번 붉어졌다. 미모의 여인이 느닷없이 신발을 벗었기 때문이었다.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더니 아프네요. 몸종에게 신발을 사 오라고 했더니 모양만 보고 사 와서 이 지경이랍니다.”
“발이 아프면 힘이 들지요. 발에는 온몸의 신경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금채홍이 신발을 벗어서 천일영에게 건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입가가 조금 실룩거렸다. 이 간덩이가 큰아이는 지금 재미있어서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신발에 먼지가 많다. 한 점도 남기지 말고 털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천일영이 조용히 밖으로 나서자 금채홍이 발을 주물렀다. 본디 발은 여인의 신체에서 가장 부끄러운 곳. 신발을 신은 채로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데 비록 버선을 신었다고는 하지만 미모의 여인이 눈이 보이도록 발을 주무르는 것을 보자 당추필의 코에서 김이 스며 나왔다.
“허허…… 소저. 발을 주무르는 법이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어머. 창피하지만 그래도 될까요? 오호호호.”
당추필은 얼굴이 벌게진 채 금채홍의 발을 주물렀다. 말캉하니 부드러운 발. 당추필의 콧김이 거칠어졌다.
그때 천일영이 먼지를 턴 신발을 들고 왔다.
“잘 털어 왔구나. 신겨라.”
“알겠습니다.”
천일영이 무릎을 꿇고 신을 신기려 할 때, 순간 당추필이 신발을 빼앗으며 천일영을 가로막았다.
파바밧.
순간 천일영의 손길이 당추필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무명암살대에 있을 때 정보를 남몰래 탈취하기 위하여 연마한 소매치기 실력이었다.
“몸종 주제에 주인의 귀한 곳에 손을 대려 하다니 무엄하다. 내가 할 테니 너는 물러나 있거라.”
“네, 알겠습니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미는 천일영에게 금채홍이 눈을 찡긋거렸다. 당추필이 발을 주무르는 덕분에 수치심에 얼굴이 새빨개져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표정이다.
아무리 말을 맞추고 하는 행동이라도 미안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어째 그 너머에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도 있는 듯했다.
“신발은 공자님께서 신겨 주신다고 하니, 너는 나가서 검이나 닦아 오거라. 땀을 흘렸더니 검집이 끈적하구나.”
“알겠습니다.”
살수로 있을 때 워낙에 더러운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일은 별것 아니다.
그러나 왠지 천일영은 또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의문도 잠시, 금채홍이 시키는 대로 검을 들고 밖으로 나와, 담장 뒤로 숨어 당추필의 품 안에서 나온 편지를 읽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천당문의 문주 당용택이 보낸 편지였다.
‘역시 당양희가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군.’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여족들의 반란이 십 일 후에 일어날 것이니 삼 일 전에 맹의 지원군으로 해남파에 잠입하여 설의룡을 전쟁터로 데리고 나가도록 하고 이후 죽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단순한 편지가 아니다.
편지가 묵직했다. 천일영은 아랫부분에 따로 접혀 있는 곳을 펼쳤다. 거기에는 천마신교가 쓰는 모양의 비침 수십 개가 종이에 말려 있었다. 아마 이것이 설의룡의 목숨을 끊을 비장의 독이 발린 비침일 터다.
‘이것으로 설의룡을 죽이고, 여족들을 천마신교에서 지원한 것처럼 꾸밀 모양이군. 이렇게 하면 사천당문이 해남도에 머물게 될 확실한 명분도 확보가 된다.’
천일영은 검을 대충 옷으로 문지르고 편지와 독침을 원래대로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서둘러 돌아가기 위함이다. 허나 방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보이는 광경.
아직도 당추필은 얼굴이 벌게진 채 금채홍의 발을 주무르고 있고, 금채홍은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늘어져 있다.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몰렸다가 도무지 끝이 날 줄 모르는 당추필의 행동에 질린 표정이었다.
천일영은 왜인지 또다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차를 한잔 타 오거라. 공자님이 발을 주물러 주시니 심신이 편안해지는구나. 그리고 나를 위해 이렇게 애를 쓰신 공자님에게도 차를 드려야지.”
“알겠습니다. 선물로 가지고 온 호구(虎口)로 차를 내오겠습니다.”
천일영은 마음속으로 호구의 글 뜻을 바꿔 생각하며, 뜨거운 물에 차를 만들어 가지고 오면서 금채홍과 눈빛을 교환했다.
천일영은 넘어지는 척을 하며 금채홍과 당추필의 몸에 차를 엎었다.
“꺄악! 이 녀석, 공자님께 감히 무슨 실례란 말이냐.”
“죄송합니다.”
파바밧.
순간 당추필의 앞섬에 적셔진 차를 닦으며 천일영은 순식간에 원래대로 편지와 비침을 집어넣었다. 순간 금채홍이 천일영을 손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닦으면 오히려 차가 번지지 않느냐.”
“그래도 빨리 차를 털어 내야…….”
약간 인상이 구겨진 당추필의 품으로 금채홍이 달려들어 앞섬에서 물기를 닦아 냈다.
사실 이것은 편지가 원래 있던 위치에서 틀어질까 걱정하여, 금채홍이 당추필의 몸을 마구 더듬어서 편지의 위치가 달라져도 의심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옷값은 제가 반드시 물어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그만 아닙니까.”
“저도 차가 옷을 적셨으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물러나겠습니다. 공자님, 다음에 다시 만나도 될까요?”
“소저 같은 절세미인을 제가 또 어디에서 뵙겠습니까. 다시 만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어머. 공자님은 말씀도 참 잘하시네요. 오호호호.”
금채홍은 얼른 신발을 챙겨 신고 문 앞으로 나서며 천일영의 등을 밀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서는 것을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당추필. 그는 벌게진 얼굴로 금채홍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순간 섬뜩한 느낌에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편지와 비침은 그대로인가. 하긴, 저런 덜 떨어지고 무공의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놈이 편지를 어찌하지는 못할 터. 만약 무슨 짓을 하려고 했다면 내가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당추필이 벌어질 리 없는 일을 머리에서 지우고 또다시 벌게진 얼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꿈같은 시간을 되뇌는 사이, 설의룡은 탁자에 팔을 기대고 앉아서 한숨을 쉬었다.
‘잠시 내 심장이 멈췄던 것 같은데 다시 뛰기는 하는 것인가. 맹에서 온 사람에게 저게 무슨 짓인지…….’
가만히 앉아서 모든 것을 지켜본 설의룡은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도무지 뭘 하러 온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설의룡은 벌게진 표정의 당추필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한숨만 내리쉬었다. 하루에 백 번쯤 쉬는 한숨이었다.
* * *
꾸우우웅!
별채로 돌아온 금채홍의 머리 위로 천일영의 꿀밤이 떨어졌다. 당연히 내공이 가득 실린 꿀밤.
금채홍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뱀처럼 기어 다니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끄으흡. 아아악. 고…… 공자님, 어째서?!”
“이 녀석, 입술을 실룩거리면 어찌하느냐. 그렇게도 재미있었느냐.”
“으으윽, 그러나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공자님한테 그런 짓을 해 봅니까. 끄아악.”
솔직하게 불고 바닥을 기는 금채홍. 금채홍의 성격이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것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생각이 깊어 보일 때도 있어서 금채홍이라는 사람을 가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천일영이 금채홍을 믿는 것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천일영은 피식 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금채홍의 머리에 손을 올려 통증을 거두어 냈다.
“덕분에 의심 없이 성공했으니 이 정도로 용서해 주마.”
“가…… 감사합니다. 에헤헤.”
금채홍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간 사이, 그동안 기억과 정신이 많이 돌아온 표호엽이 천일영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설려온 소저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었습니다. 이곳의 도지휘사 오도문이 아무래도 배신을 한 것 같더군요. 녹봉을 먹는 자로서 그놈은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해남도가 고립이 되었다고 하니 하다못해 유의선 승선포정사사에게 편지라도 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뭔가 방책이 있는 것입니까?”
“생각이 있다. 도지휘사는 나를 도와라. 배후를 알았으니 내일 놈들을 친다.”
“돕겠습니다. 삼 개월 동안이나 누워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지금이라도 모든 것을 다 해야 할 것입니다.”
표호엽의 얼굴에 각오가 떠오른다. 그동안의 원한을 풀겠다는 표정이다. 천일영은 술병을 껴안고 코를 고는 사귀진의 옆을 지나 금채홍의 방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꿀밤을 때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일의 성패(成敗)를 앞두고 실룩거리는 입술을 하여 꿀밤을 때리기는 했지만, 또한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기도 한 금채홍이다. 천일영은 금채홍이 들어간 방의 문을 두들겼다.
“옷은 다 갈아입었느냐.”
“네, 공자님. 들어오셔도 됩니다.”
드륵.
그러나 방문을 열고 들어간 천일영은 얼굴이 붉어졌다. 다름 아닌 금채홍이 버선을 벗고 발을 닦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채홍은 어두운 얼굴로 물에 적신 천을 사용하여 닦아 내고 또 닦아 냈다. 천일영은 급히 등을 돌렸다.
“이 녀석, 다 갈아입은 것이 아니지 않느냐. 어째서 발을 그렇게 닦고 있느냐.”
“기분 나쁜 놈이 발을 하도 만져서 닦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자님, 왜 등을 돌리고 계십니까?”
“네 녀석이 발을 꺼내 놓고 있으니까 그런 것이다. 부끄럽지도 않은 것이냐.”
“에에? 저는 공자님이라면 상관없는데요. 보시든 만지시든 상관없습니다.”
“큼큼, 함부로 그렇게 소중한 부분을 보이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느닷없는 광경에 놀라기는 했지만, 문득 이상하게도 울컥이던 감정이 누그러든다.
갑자기 왜 그런 것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조금 아까만 해도 이상하게 가슴을 누르던 불쾌한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느낀 천일영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도 싫었더냐.”
“네, 아까도 말했지만 소중한 부분을 함부로 만지는 것은 싫습니다. 공자님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안하구나. 싫은 일을 하게 했다.”
“괜찮습니다. 공자님이 시키는 일은 전부 다 할 것입니다.”
“쉬거라.”
급하게 방문을 닫고 나오는 길. 미묘한 마음이 가슴속에 한 줄을 그리며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켠으로 안심하는 마음이 서서히 퍼지는 것을 느끼며 천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일이 무사히 끝나서 안심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지.’
천일영은 해남도의 일을 잘 마무리 짓는 한 단락을 끝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당양희를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서서 흉악한 기세를 흘렸다.
당추필의 편지를 보고 짐작하건대 아직 당양희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밤새워 놀아 주마. 네 속에 있는 것들이 전부 나올 때까지.”
“으…… 고…… 공자님?”
당양희는 침을 삼키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눈앞의 공자가 지금 사람이 아니라 사악한 마신으로 보였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