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겨누어지는 함포가 열 개를 넘어선다. 도화선이 타들어 가는 소리 또한 귓가를 울렸다.
유향설은 침음을 삼키며 함포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포탄을 맨몸으로 맞는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치명상은 피할 수 없을 터다.’
유향설은 검을 고쳐 잡았다. 포탄을 베기 위한 자세. 포탄을 전부 베어 내지 못한다면 몸으로라도 막아야 했다. 죄 없는 사람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쿵쿵쿵.
함포가 발사되는 순간, 유향설은 신형을 앞으로 쏘아 보내며 왼쪽으로 날아드는 포탄에 장풍을 날렸다.
포탄이 방향을 틀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확인한 이후, 허공에 몸을 띄운 채 검강을 2장까지 뻗어 가차 없이 휘둘렀다.
휘이익. 콰쾅.
다섯 개의 포탄이 잘려 나간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두 개의 포탄. 가장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는 곳으로 거침없는 속도로 날아가는 포탄은 이미 유향설의 검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타다다닷.
유향설은 급히 경공술을 사용하여 사람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2장까지 뻗어 나온 검강을 포탄에 날렸다.
휘이익! 콰앙!
그러나 서로 궤도와 발사된 속도가 다른 포탄이 한자리에 있을 리는 만무했다.
단 하나만이 허공에서 베어져 폭발하고, 남은 하나가 유향설의 정면을 향해 덮쳐 온다.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포탄. 장풍을 쏠 수도 없고, 검은 간격이 짧아 사용 못 한다.
유향설은 혹시 파편이 튀어 사람들이 다칠까 하여 양팔을 뻗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몸으로 막으려 함이었다.
‘젠장! 기막을 펼친다 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각오해야겠구나!’
콰아앙!
순간 유향설은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몸을 움찔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신의 몸이 멀쩡한 것이다.
유향설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조심스레 떴다. 바로 앞에는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귀진과 포효엽이 서 있었다.
유향설의 코앞까지 다가온 포탄을 사귀진이 풍압을 가득 싣고 아래부터 위로 검을 들어 올려 베어 버린 것이다.
풍압에 밀려 나간 포탄은 허공에서 갈라지며 터졌다. 사귀진은 굳은 표정으로 움츠러든 유향설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뭐 하냐?”
“단주?! 뭐…… 뭐 하냐고요? 내가 지금 뭘 하는지 안 보이세요?”
파악! 파박. 파악.
머리 꼭대기까지 새빨갛게 변한 유향설이 사귀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사람들을 지키느라 목숨을 걸고 애를 썼는데, 이죽거리는 사귀진의 말과 표정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유향설은 한 번 걷어찬 것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지 몇 번이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 그만해라. 아프다.”
“내가 뭘 했는지도 모르고. 이이익!”
“농담이다. 사람들을 구하려고 한 것이지? 사혈련이라는 놈이 이렇게 착해서야.”
“이…… 이이익! 단주는 하여간에……. 아…… 암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사귀진이 유향설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군함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포탄을 장전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앞으로 눈 여섯 번 깜박이면 함포가 불을 뿜을 것이다. 표호엽이 검을 빼며 굳은 눈길을 하였다. 도지휘사인 자신이 군에게 검을 세우니 마음이 착잡했다.
“사람들에게 도망가라고 일러두었소.”
“그렇다면 이쪽도 사정을 봐줄 것은 없겠군. 이번 포탄은 사람들이 피신할 때까지 우리가 막아 내고 이후 즉시 배에 올라타서 군함을 정리하지.”
그러나 말을 하는 도중 사귀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항구의 선착장에 서 있는 군함들이 모두 일제히 함포를 돌리는 소리가 난 것이다.
도합 네 척의 군함. 함포의 발사각이 나오지 않는 또 다른 군함들은 갑판에서 천자뇌포까지 겨냥하고 있었다.
“도망가는 것은 성미에 안 맞는데, 미치겠구먼.”
“증거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군요. 군항에 침입한 자들을 없앴다는 명분이 있으니.”
“지금 도망가면 아직 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죽는다. 먼저 죽는 놈은 명부시왕(冥府十王) 앞에서 기다려라. 나란히 세 놈이 손잡고 가면 딱이겠네.”
세 사람은 이를 악다물었다. 어차피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무림인이다.
사특(私慝)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어 가는 사람을 구하다 죽는다면 그것 또한 무림인의 생(生)이다. 죽기 전에 공덕쯤 쌓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치이이익.
도화선이 불에 타들어 가는 섬뜩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세 사람은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함포가 발사되었다.
쿠구구궁! 콰앙!
그러나 함포의 소리는 꽤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순간 함포를 발사하려던 군함의 뒤편으로 수십 개의 포탄이 박히며 나뭇조각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뒤늦게 폭발의 충격으로 기울어진 배에서 함포가 쏘아졌다. 쏘아진 포탄은 배가 기울어 포선이 바뀌며 세 사람이 서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앞에 떨어졌다.
콰아앙!
순식간에 함포를 쏘려던 군함이 불바다가 되어 간다. 느닷없는 공격에 다른 군함들도 모두 함포를 돌리며 항구에 서 있는 세 사람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이것이 어찌 된 일이지?”
“군함이 공격을 받다니, 이 무슨…….”
유향설과 사귀진이 당황해하는 사이, 표호엽만이 눈을 빛냈다. 들려오는 함포의 소리가 무척이나 익숙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공자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 이것이었는가. 도대체 그 사람은 몇 수 앞을 내다보는 것인지 놀랍기만 하군.’
표호엽이 급히 군수 창고(軍需倉庫)의 높은 건물 위로 신형을 날렸다. 만약에 표호엽의 생각이 맞다면 군함을 공격한 자의 정체는 하나뿐이었다.
“유의선 승선포정사사, 그리고 척계광?”
멀리 보이는 신형 군함 백여 척. 지휘선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유의선과 표호엽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척계광이었다.
“척계광이 내 후임으로 절강도지휘사가 되었구나.”
쿠웅. 콰앙!
백여 척의 군함이 일제히 불을 뿜으며 정박되어 있는 군함을 대파하고 길을 열었다. 그리고 지휘선이 가장 먼저 항구에 배를 대었다. 표호엽은 즉시 두건을 벗어 던지고 달려 나갔다.
“유의선 승선포정사사!”
“표호엽 도지휘사, 살아 있었구려.”
“이곳에는 어찌 오셨습니까.”
“허허…… 별유천지의 공자가 구 일 전에 건청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편지를 보냈소이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소상하게 적어 놓았는데, 조사를 통해 그것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었소. 그래서 급히 오는 길이오.”
표호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자신과 사귀진, 그리고 유향설을 보낸 것이다.
표호엽은 굳은 의지를 보이며 검을 거머쥐었다. 공자가 만들어 준 기회. 결코 날릴 수 없는 일이다.
“대역죄인 해남도 도지휘사 오도문의 목을 가지러 갑시다.”
“걱정 많이 했는데 펄펄하시군요.”
표호엽이 사귀진과 유향설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정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더 이상의 도움을 바라면 안 될 터다. 표호엽이 한 번 고개를 끄덕이자 사귀진과 유향설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순간 두 명의 사혈련 무인들이 표호엽의 앞에서 사라졌다.
“고맙소.”
표호엽은 금군들과 함께 해남도 군부의 중심으로 달려 들어갔다.
* * *
계획이 틀어진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당추필은 멈출 수 없었다. 반드시 설의룡은 오늘 제거를 해야만 했다. 내일이면 또 다른 계획들이 연이어 실행된다.
또한 이곳에서 힘을 키워 사천당문의 문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비침을 들고 설의룡에게 달려가는 자신의 다리를 세워서도 안 되었다.
그러나 당추필은 야심을 앞세우면서도 식은땀을 흘렸다.
‘계획이 잘못된 것도 문제이지만 설의룡 저놈이 저렇게 강할 줄이야.’
검날을 기울여서 날카롭게 파고들며 춤을 추는 검술. 다른 무림 문파에 비하여 한층 더 악랄하고 빠른 공격을 검의 우선순위에 두는 해남파의 설의룡에게 당추필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타다다닷.
당추필은 비침을 손에 쥐고 피가 튀기는 전장 사이를 헤쳐 나갔다. 그리고 사천당문이 기른 간자들의 목을 인정사정없이 쳐 내는 설의룡의 뒤로 접근했다.
순간 당추필의 손이 허공으로 뻗어지며 비침 수십 개가 튀어나왔다.
피비비빗.
설의룡에게 날아가는 비침.
후우우웅!
그러나 순간 당추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날아가던 비침이 설의룡의 등 뒤에서 순간 멈추었다.
수많은 검이 허공을 가르고, 붉은색의 피가 땅을 적시려 튀어 오르는 곳. 그곳에서 비침만이 허공에 떠 있는 채 움직이지 않고 홀로 이질적인 공간을 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나타나는 신형 둘. 어제 당추필이 보았던 미모의 여인과 몸종이다.
“이…… 이것이 무슨! 당신들이 왜 여기에!”
“사천당문이 같은 맹에 속해 있는 해남파의 문주를 공격하다니, 무림에 이 이야기가 퍼지면 제법 볼만하겠군.”
몸종이라는 자가 내공을 퍼트리며 내는 목소리가 당추필의 귀에 박혔다. 그리고 순간 당추필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했다.
후웅!
설의룡의 등 뒤에서 멈춘 비침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속도로 당추필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것이었다.
푸부북! 푸북!
“크헉! 네…… 네놈!”
“사천당문의 독이라 내성이 있는 것인가.”
순간 당추필은 빠르게 신법 암룡구궁신법(喑龍九穹身法)을 사용하여 몸을 뒤로 빼내고 자세를 바로잡은 다음, 만천화우(滿天花雨)로 비침을 날렸다.
지면에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는 수백의 비침.
허나 자신이 공격한 대상이 비침에 맞는지 확인조차 하지 않고, 당추필은 경공술을 사용하여 자신의 수하 오십 명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절대로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스으윽. 촤악!
달리는 도중 몸에 박힌 비침을 빼내자 고통이 뼛속을 타고 올랐다. 아무리 내성이 있다고 해도 이것은 사천당문이 가진 독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다.
수많은 비침이 몸에 꽂히자 당추필은 이미 눈앞의 광경이 물결처럼 흐르는 듯 보였다.
그리고 도착한 자신들의 수하가 있는 곳.
“이…… 이럴 수가!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당추필은 어지러운 눈임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광경에 몸서리를 쳤다.
자신의 수하 오십 명이 모두 죽어 있었다.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참상. 내장이 터지고 팔다리가 전부 잘린 채 흩어져 있는 무인들은 사천당문 내에서도 실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절정 고수까지 이 짧은 시간에 당하다니…….”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등골에 식은땀과 함께 소름이 올라왔다.
당추필은 급히 감각을 마비시키는 독인 척비향(脊痹香)을 터트렸다. 자신의 기척을 찾지 못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리고 신형을 날려 몸을 피신했다.
공포심에 뼈마디가 마비되는 것 같으면서도 당추필은 한 번만 들이마셔도 피를 토하고 죽는 급살독인 무생살천(無生殺天)을 뿌리며 혹시 있을 추적자들에 대한 대비를 했다.
이만큼의 독이라면 그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터다. 당추필은 혹시 하는 마음에 미리 대기시켰던 배 위로 신형을 날렸다.
“젠장……. 어디에서 일이 뒤틀린 것인가. 어제 그 여인과 몸종 놈이 한 짓인가. 아니면 다른 배후가 있는 것인가!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기회는 있다. 놈들은 도지휘사인 오도문을 건드리지는 못한다. 사천당문으로 돌아가 무인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와서 군함으로 밀어 버리겠다!”
두 명의 뱃사람이 강풍을 타고 배를 몰아갔다. 육지에 도달하여 사천성(四川省)까지 최대한 빨리 간다면 열흘 정도가 걸릴 것이다.
다시 무인들을 편성하여 돌아온다면 이십 일 안에 다시 해남도를 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설의룡과 같이 모든 귀가 닫히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당추필은 여전히 허황된 꿈을 꾸며 이를 빠득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