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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75화 (76/270)

75화

당추필이 떠나며 만천화우를 펼친 자리. 날아오는 수백의 비침들을 향해 천일영이 손을 내뻗었다.

그러자 빠르게 몰려들어 뜨겁게 변한 바람이 비침을 한군데로 모았다. 허공에 떠 있는 비침들은 바람이 인도하는 대로 천천히 날아올라 손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천일영은 비침을 손가락에 끼우며 등 뒤의 설의룡에게 말을 건넸다.

“설의룡, 이제 마무리를 짓는 것이 좋겠구나.”

“마무리? 이놈들은 용서 못 한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였을 때가 마무리를 지을 때다.”

피를 뒤집어쓰고 검을 날리는 설의룡의 살기 섞인 목소리가 간자들 사이에 퍼지자, 도륙을 당하고 있던 자들은 더욱 심한 공포에 몸을 떨었다.

해남파의 전투력을 이제서야 알아본 것이다. 그동안 여족들이 해남파를 밀어붙인 것도 설의룡이 가급적이면 피를 보지 말고 막기만 하라고 명했기 때문이다.

만약 해남파가 마음만 먹었다면 여족들의 수가 지금보다 절반은 줄어 있을 터. 이것을 깨달은 간자들은 몸서리를 치며 조금씩 몸을 뒤로 물렀다.

“나머지는 내가 처리하지. 아직은 간자 놈들을 써먹을 데가 있지 않으냐. 숨어 있는 간자들을 찾으려면 이놈들을 이용해야 한다.”

“망할, 아직도 내 가슴에 쌓인 원한이 풀리지 않았거늘.”

설의룡의 검줄기가 발하는 섬광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살기가 몸을 떠나지 않았는데 검을 거두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설의룡은 힘겹게 검을 멈추고, 불만으로 가득한 손의 떨림을 멈추었다.

그때를 맞춰 천일영은 손에 든 비침에 기를 불어 넣고 한 번에 터뜨렸다.

파앙!

비침에 발라져 있는 독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눈으로 구별할 수 없지만 체내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독. 천일영은 앞으로 얻을 정보를 위해 그것들을 없앴다.

휘이잉. 피비비빗.

천일영이 손에 든 비침을 뿌렸다. 비침은 천일영의 손을 떠나자 즉시 사방으로 흩어지며 하나씩 간자들에게 날아갔다.

수백 개의 비침이 각기 다른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 서로 방향을 달리하며, 간자들의 뒤통수에 하나씩 꽂혀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혈도에 파고들었다.

“크윽!”

“커헉!”

“모…… 몸이! 마비가!”

수백의 간자들이 단 한 번 뿌린 비침에 모두 쓰러졌다. 몇십, 몇백 장에 걸쳐 퍼져 있던 간자들이 한 번에 쓰러지자 해남파의 무인들은 들고 있는 검을 내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무공이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도 없고 생각조차 해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설의룡도 마찬가지였다.

‘미…… 미친, 극마의 경지에 들어섰다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닌가. 이런 신위라면 극마 이상이어야 할 것이다.’

허나 설의룡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을 지었다. 천일영의 신위에 놀랐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막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했다. 대승리다!”

“와아아아!”

설의룡이 검을 높이 들어 올려 승리를 선포했다. 해남파의 무인들은 모두 목청을 높이며 환호성을 질렀다.

설의룡이 승리를 선포하는 이유는 이후 여족들의 반란을 잠재워 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해남파의 위용을 모두에게 보임으로써, 여족들이 해남파에게 두 번 다시 검을 들이댈 일은 없을 것이다.

비록 간자들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이지만 여족들이 그 사실을 모르는 한, 평화가 계속될 터였다.

툭.

금채홍이 천일영의 어깨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지치고 힘든 표정.

조금 전 사천당문의 무인 오십을 천일영과 함께 베어 내고 설의룡의 곁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간자들을 물리쳤다. 제법 많은 내공을 사용한 금채홍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힘든 것이냐.”

“몸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피비린내는 아무리 맡아도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그렇지. 익숙해지지 않지.”

천일영은 금채홍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손마디를 잡아 이끌었다. 해남도에서 해야 할 일을 전부 다 한 것이다.

이제 잠시의 휴식을 위해 천일영과 금채홍은 별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동안 해남도에선 피의 숙청이 끊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간자들을 찾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배신한 4개의 문파에 대해서는 엄중한 제재가 가해졌다. 또한 호적을 새로 만들고 과거가 뚜렷하지 않은 자들 역시 모두 찾아내었다.

피의 숙청은 군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도문을 잡아 고문을 하고 군 내부에 있는 배신자들을 모두 찾아내는 작업을 며칠째 하는 중이었다.

배신자의 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사건은 군함 사십 척을 빼돌린 것이었다.

오도문은 군함의 행방에 대하여 함구하며 버텼고, 군함은 해남도 인근 해역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표호엽이 군함을 탈취당한 것처럼 모두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오 일 후.

해남파의 본문에서 작은 술자리가 열렸다. 그 자리에는 천일영과 사귀진, 유향설, 금채홍, 유의선, 표호엽, 척계광 등이 모인 자리였다.

설의룡은 해남파의 문주라는 높은 자리에 올라 있음에도 일일이 고개를 숙이며 모인 사람들의 잔에 술을 따랐다.

“모두 감사하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은혜는 여기 유의선 승선포정사사와 척계광 도지휘사, 그리고 표호엽에게 해라. 나는 과거의 빚을 턴 거뿐이다. 그리고 사귀진과 유향설, 금채홍도 수고가 많았지.”

천일영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사혈련과 정파, 그리고 문부와 군부가 함께 모인 자리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和氣靄靄)했다. 특히 척계광은 절강성의 도지휘사가 되자마자 큰 공을 올리게 되어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유의선은 척계광에게 술을 따라 주며 입을 열었다.

“별유천지의 공자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적시에 편지를 주시어 이렇게 큰 공을 세울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전에 정강산의 땅과 미흑천의 장원을 받은 것에 대한 갚음이다.”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한 보상은 반드시 할 것입니다. 또한 표호엽 도지휘사의 몸을 고친 것도 공자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별거 아닌 일이다. 조금 아는 의술로 우연치 않게 고친 것이지.”

“허허…… 삼 개월 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사람을 일으켜 세웠는데, 별거 아니라니…….”

유의선이 실눈을 뜨며 천일영의 말꼬리를 잡았다. 분명 해남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공자의 무공이 천하제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

그러니 유의선은 정체를 숨기고 있는 사람에게 자꾸만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하지만 유의선은 능구렁이다. 이내 자신의 표정을 감추고 가장 큰 문제를 입에 담았다.

“관무불가침이라 이번의 일이 아무리 큰 사건이라 해도 황실에서 관여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오도문에 관련해서도 도지휘사가 무림 문파에 힘을 빌려준 것이 빌미가 되겠지만, 무림맹에서 사천당문을 싸고돈다면 저희도 큰 힘을 쓰지 못할 것입니다.”

“증거도 의외로 없더이다. 간자들을 조사해 보니 자신들이 사천당문에 고용당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당추필이 가져온 맹의 편지를 받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설의룡의 이마에 주름이 졌다. 유의선은 가라앉는 분위기를 돌리기 위해 설의룡의 걱정거리를 덜어 줄 만한 이야기를 들고 나섰다.

“설 문주, 그러나 이제 해남도는 안전하오. 이곳에 최신의 군함 백 척을 배치하라는 명이 황실로부터 떨어졌소이다. 특히나 이번에 해남도로 배치를 받는 군인들은 여기에 있는 척계광 도지휘사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오. 척계광 도지휘사는 원앙진(鴛鴦陣)이라는 것을 만들어 왜구들과 해적들을 척살하는 공적을 수도 없이 세우신 분이십니다.”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은 기분입니다. 이제 왜구들과 해적들의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구려. 허허허.”

그러나 즐거운 술자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은 이야기가 있었다.

바로 여족의 반란과 때를 같이하여 침략이 시작된 왜구와 해적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어째서 급작스럽게 공격을 시작했는지는 조사로도 파악이 안 되었다. 또한 당추필의 행방도 묘연했다.

‘당추필을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이 좋겠군. 당추필이 사천에 도착한 이후 사천당문에서 어찌 나올지 궁금하구나.’

천일영은 시커먼 꿍꿍이를 품고 술잔을 기울였다.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사천당문은 계속 일을 도모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천당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 방법이 황실과 무림맹의 압력으로 인해서 벌어져서는 안 된다.

힘이 빠진다 한들 잠시뿐. 사천성에서 막대한 권력을 자랑하는 사천당문이 힘을 되찾는 것은 고작 일이 년이면 된다.

천일영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사천당문의 힘을 유지한 채 못된 짓은 못 하게 한다?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이군.’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또다시 술잔을 기울이는 천일영. 허나 그 음흉한 표정이 너무도 잘 어울렸다.

* * *

또다시 오 일 후.

당추필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말을 달렸다. 하루 종일 말이 달리다 지치면 버리고 또 다른 말을 사서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리기를 팔 일. 당추필은 가까스로 자신이 예정한 열흘에 맞춰 사천당문 본문에 도착했다. 말을 타는 동안 옷에는 흙먼지가 수북하게 쌓였지만 당추필은 개의치 않고 즉시 아버지 당용택의 방으로 찾아갔다.

“아버님, 저 추필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거라.”

불편한 듯 노기가 가득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추필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살기를 내뿜으며 당용택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나 당추필은 살기를 흘리며 당당히 입을 열었다.

“아버님, 소자에게 무인 일백만 내려 주십시오. 이번 일은 실패를 하였으나 되돌릴 수 있습니다.”

“무인 일백? 그것으로 어찌 해남도의 일을 돌릴 것이냐.”

“오도문이 있습니다. 협력을 하면 그르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멍청한 놈!”

당용택이 순간 화를 이기지 못하고 벼루를 집어 던졌다. 그러나 당추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날아오는 벼루를 피했다. 그것이 당용택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쿠웅!

터져 나가는 기운. 당용택이 뿜어내는 기운에 당추필의 신형이 밀려났다.

“으으윽!”

“이 머저리 같은 놈아, 오도문도 같이 당했다는 말이다.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냐!”

“오…… 오도문도 말입니까?”

“어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절강성과 복건성에 있는 군함 일백여 척이 해남도로 몰려갔다. 오도문은 이미 포박당하여 황실로 이송 중이고! 우리 계획은 실패했다는 말이다.”

“그…… 그럴 리가.”

“무려 칠 년을 계획했다. 그런데 그것을 네놈이 망쳤단 말이다.”

짜아악!

당용택의 내공이 가득 실린 오른손이 당추필의 뺨을 후려쳤다. 뒤로 밀려나며 균형을 되찾지 못하고 쓰러진 당추필. 그러나 노한 아버지의 앞이라 금세 몸을 일으켰다.

주륵.

순간 당추필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꽤 많은 양의 피가 입가를 뒤덮었다.

“이런 못난 놈, 겨우 한 대 맞은 것으로 코피나 흘리고. 에잉.”

“죄송합니다.”

그러나 당추필은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코뿐 아니라 눈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내 입에서도 울혈이 토해졌다.

“쿠헉, 쿨럭!”

“추…… 추필아!”

순간 당황한 당용택이 급히 아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당추필의 온몸에서는 어찌할 수 없을 만큼의 피가 솟구쳤다. 온통 바닥에는 핏덩어리들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고, 당추필의 눈과 얼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끄으으으…… 아버지…….”

“크윽! 추필아! 이게 무슨…….”

그리고 눈 세 번 깜박일 사이, 당추필의 몸이 온통 피에 젖은 채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퍼억!

미워도,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도 아들은 아들이다.

당용택은 아들의 모습을 찾으려 했지만, 그 형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아들이 입고 있던 옷만이 피에 젖은 채 뒹굴고 있었고, 조각난 뼈와 찢어진 오장육부만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아들이었다.

“추필아, 이게 무슨……! 어찌 네가 반고일독(反顧一毒)에 당한 것이냐. 분명 사천당문의 독에는 불침이어야 하거늘.”

당용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동시에 가늠할 수 없는 공포와 서늘함이 찾아왔다. 당용택은 망연히 아들의 찢겨진 시신을 보며 깨달았다.

‘경고인가.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다는…….’

떨리는 손. 그러나 애써 몸을 일으켰다. 이제까지는 자신이 사냥꾼이었지만, 지금부터는 당용택 자신이 사냥감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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