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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76화 (77/270)

76화

해남도의 일이 모두 마무리되고 항주로 돌아오는 배 안.

유의선과 척계광의 배려로 군선에 몸을 담은 일행들은, 파란 바다와 적당히 일렁이는 파도가 만드는 편안함에 지친 심신이 치유되는 듯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유독 천일영만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아니, 표정이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근처에 있는 사람들이 접근하지도 못할 정도로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망할. 표호엽 도지휘사를 살려 준 대가로 평생 뜯어먹으려고 했건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천일영의 머리 위로 김이 올라오듯 화가 뿜어져 나온다.

혜령과 놀아 주고 여동생과 술 한잔 기울이며 남매의 오붓한 정을 나눌 시간이 줄어드는 요즘. 표호엽의 힘을 이용하면 귀찮은 일을 모두 떠넘기고 편히 지낼 수 있을 터였다. 목숨을 살려 줬다는 명분이 있으니까.

헌데 생각지도 못한 사이 유의선과 척계광이 해남도의 전과를 상당수 표호엽의 공으로 돌렸고, 표호엽이 새로운 해남도의 도지휘사가 되어 버린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표호엽의 등골을 빼먹을 수 없게 된 천일영은 치미는 울화를 다스려야만 했다.

‘표호엽이 있었다면 귀찮은 일을 전부 시켰을 텐데, 덕분에 사천당문의 일도 전부 내가 하게 생겼구나. 놈들은 겨우 당추필 정도로는 멈추지 않겠지. 이미 다음 일을 시작했을 터.’

사천당문을 억누를 계획을 떠올리며 천일영이 시선을 돌리자, 당양희는 자신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해남파의 별채에서 밤새 겪었던 일을 생각하자니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식은땀이 흘렀다.

정체를 가늠하지 못할 공자의 신위는 손가락 단 하나만으로 자신이 아는 것을 모두 불게 했고,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을 때부터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실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응징이 시작되었다.

‘다시 생각도 하기 싫다. 혈도를 짚이는 것만으로 죽는다는 생각과 죽고 싶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 줄이야.’

하지만 당양희는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이다. 공자가 제아무리 무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각오한 결심은 변치 않는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한 지 오래. 다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 동생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딱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 * *

오랜 시간을 비운 탓이지만 항주에 들어서니 해남도와는 또 다른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콧가를 간지럽혔다.

이 냄새를 맡는 순간 집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안도하는 마음도 잠시.

천일영은 당양희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유의선의 눈길을 모른 척했다. 여기에서 엮이면 또 유의선과 관계를 이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가(唐家)의 소저와 함께하신다는 것은 해남도의 일과 연관이 있는 듯합니다. 사천성(四川省)의 승선포정사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대비토록 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당가의 소저는 동생의 일로 약조한 것이 있을 뿐이다. 별일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다시 한번 편지를 보내야겠군요.”

“유의선 승선포정사사. 내가 방금 말하기를 별일이 아니라고 했다.”

“저는 다시 한번 편지를 보낸다는 말만 했습니다. 저도 당 소저의 동생분께 무슨 일이 있나 하여 편지를 보내 볼까 했습니다만? 아니라고는 하셨지만 역시 사천성으로 연락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역시 능구렁이. 유의선이 관여하려는 이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해남도의 일은 단순히 무림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도지휘사의 비리까지 얽혀 있었다.

아직 입을 열지 않은 오도문이지만 사천당문과 뇌물이 오갔을 테고 또한 군함까지 빼돌린 것도 자명한 일.

그러나 황실에서 사천당문을 치려 하면 무림맹에서 관무불가침을 방패로 쓴다.

이렇게 되면 군함이 사라진 일에 사천당문이 관여되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오도문 개인이 벌인 일인지까지도 불분명해지기에 유의선이 자꾸만 천일영에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나를 이용하여 사천당문을 치려는 것이군. 사천성의 승선포정사사를 언급한 것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뒷수습을 해 준다는 말이로군. 나만큼이나 적절한 인물이 보이지 않으니 자꾸 관여하려는 것인가. 허나 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능구렁이 놈아.’

대답을 남기지 않은 채 천일영은 별유천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유의선의 예상대로 천일영은 사천당문에 제재를 가할 것이지만 그 방법은 아무도 몰라야 했다.

‘유의선은 사천당문을 제거하거나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밟는 것을 생각할 테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천마신교와 사혈련, 그리고 무림맹이 근래에 큰 전쟁을 벌이지 않는 이유는 힘의 균형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사천당문이 만약 힘을 잃는다면 무림맹의 힘도 약해질뿐더러, 독의 해독까지 겸하는 사천당문의 힘이 사라지는 순간 무림은 그야말로 독과 암기 천지가 될 것이다.’

애써 천마신교를 나오면서까지 정마대전을 피했다. 하지만 사천당문이 유의선의 생각대로 무너지고 사라진다면 무림은 또다시 피바다의 길로 들어설 것이었다.

그러니 힘은 유지한 채 다른 짓을 못 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후우, 어쩐지 천마를 때려치우고 난 이후가 더 바쁜 것 같군.’

천일영은 복잡한 머리를 털고 객잔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가족들을 보니 반갑고 행복하다. 그러나.

천일영은 자신의 눈을 비비며 눈앞의 일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예서란이 일곱 살쯤 된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음식을 나르고 있는 것이었다.

천일영은 빠르게 예서란의 손목을 잡았다.

“무엇을 하는 것이냐. 너에게 이런 일을 시키려고 데려온 것이 아니다.”

“공자님? 얼굴이 무섭습니다. 화가 나신 것입니까.”

“당연히 화가 나지 않겠느냐. 내가 너를 데리고 온 것은 가족이 되기 위함이지 일을 시키려 한 것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는 것은 제 성미에 맞지 않습니다. 이 일도 천이영 여주인님이 하지 말라고 극구 말리셨지만 제가 하겠다고 떼를 썼습니다.”

“떼를 써 가면서까지 일을 해야만 하겠느냐.”

“재미있습니다. 객잔 일이 재미있는 것도 있지만 하나씩 이곳을 알아 가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하아…….”

진심이 가득한 예서란의 눈빛을 마주 대하니, 천일영으로서도 더는 말리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천일영은 예서란이 총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객잔의 일을 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소학을 전부 외우고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공부까지 하던 아이다.

그렇다면 응당 그것에 맞는 또 다른 일이 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혜령도 학당에 다녀야 할 나이지. 서란이와 같이 다니게 해야겠구나.’

늦어도 다음 달에는 학당에서 공부를 시킬 생각을 하던 참에 잘되었다는 생각으로 천일영이 밖을 향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건청이 급히 천일영의 옷깃을 잡아 세웠다.

“공자님, 잠시 서란이를 이대로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냐. 서란이는 너무 어린 몸이다. 객잔의 일이 고될 것인데 그것을 두고 보는 것은 내키지 않는구나.”

“그것이 아니라 서란이가 범상치 않습니다. 이미 객잔의 경영에 탁월한 수완을 보이는 평수찬과 비견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계산은 전표를 들여다보기만 해도 끝내고 재고와 발주를 보는 눈도 탁월합니다.”

“그 정도란 말이냐?”

“그 정도면 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객잔에 물건을 납품하는 자들에게서 가격까지 깎아 놨습니다. 저 작은 몸을 가진 아이 앞에서 노련한 상인들도 혀를 내두릅니다. 서란이는 똑똑한 것이 아니라 천재입니다. 그런데도 잘난 체하지 않고 음식을 나르는 일까지 합니다.”

“……!”

순간 천일영의 결심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예서란이 총명한 정도가 아니라 천재성을 보인다면 그것은 거두어들인 사람으로서 더 큰 일을 하도록 뒤를 봐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서란이가 끝내지 못한 공부를 하게 하고 싶구나. 학당에 아이를 받아 줄 수 있는지 알아봐야겠다. 이참에 혜령도 학당에 다니고 친구들도 사귀었으면 한다.”

“학당 말입니까? 그렇다면 문제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학당에서 제자를 받아들이는 시기가 아니지만 아마도 서란이와 혜령이 모두 받아 줄 것입니다.”

“그것을 어찌 아느냐?”

“사실은 몇 번이고 학당의 훈장님께서 찾아오셨었습니다. 별유천지의 현판에 쓴 글을 누가 적었는지 물어보러 왔었지요. 공자님이 쓰신 것을 알게 되면 아마 훈장님이 먼저 기뻐할 것입니다. 또한 훈장님은 저하고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건청은 천일영을 학당으로 안내했다. 무작정 쳐들어가 학생을 받아 달라고 생떼를 쓸 생각이었던 천일영으로서는 의외로 쉽게 일이 풀린다.

‘학당의 훈장은 나이가 오십을 넘어선 사람으로, 과거 꽤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라고 했던가. 스치는 소문으로도 인품이 좋고, 아이들에게 엄하기는 하지만 또한 따스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건청이 안내한 학당에서 만난 훈장은 소문처럼 인자해 보였다. 그러나 눈 안에 숨긴 안광마저 천일영의 눈을 속이지는 못했다.

천일영은 건청이 제대로 안내했다고 생각하며 아이들을 받아 달라고 입을 뗐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은 훈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공자께서는 아이 둘을 받아 달라고 하셨는데 한 아이는 다섯 살, 또 한 아이는 열일곱이지만 병으로 일곱 살 정도로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를 받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허나 제가 조금 꾀를 부려도 되겠소?”

“훈장님의 꾀라니, 궁금하군요.”

“다름 아닌 학당의 현판에 걸 글을 써 주십시오. 그리하면 아이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물론 글을 안 쓰셔도 아이들을 받겠습니다.”

“제가 어찌하든 아이들은 받아 주신다는 말씀입니까. 소문대로 훈장님의 인품이 재미있으십니다.”

“아이를 받는 것은 훈장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 그러나 핑계를 만든 것뿐이지요. 허허허.”

천일영은 훈장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손수 나무를 잘라 커다란 붓으로 글자를 썼다. 그리고 무극지검을 꺼내 들어 글자의 모양을 따라 테두리를 깎아 냈다.

그야말로 사람의 솜씨가 아닌 듯 깨끗하게 새겨진 글씨. 현판은 건청의 손길에 따라 학당에 위에 걸렸다.

용선심형학당(容善心泂學堂).

훈장의 얼굴에 밝은 웃음이 지어진다.

천하제일이라 할 만한 명필. 학당을 시작한 지 칠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지금까지 현판을 달지 않았었다. 그가 원하는 만큼의 글을 쓸 만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고맙소이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것이오. 헌데 공자는 이런 명필을 쓰면서도 어찌 이름을 알리지 않는 것인가?”

“한때 중원에 이름을 알렸었으나 제 그릇이 감당하지 못하여 조용히 살기로 했습니다.”

훈장의 눈이 잠시 천일영의 표정을 읽어 보았다. 그것은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천하를 누린 사람의 눈빛. 패왕이다.

결코 그릇이 작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높은 이름이 가진 무게가 허망하다는 것을 아는 도외인(度外人)의 안광. 훈장의 손길이 천일영을 잡았다.

“사람의 탈을 쓴 패도(霸道)의 무리와 인연을 끊고 항주에 온 지 칠 년. 허나 귀인을 만났으니 오늘은 즐거운 날이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 어떠시오?”

“그러지요.”

천일영은 훈장과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며 때아닌 즐거움에 제법 시간을 즐겼다. 훈장과 천일영. 둘은 서로 천하를 논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른 채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객잔의 영업이 끝나고 일하는 사람까지 모두 돌아간 지금. 심각한 천일영의 얼굴에 예서란은 약간의 곤란함을 느꼈다. 공자를 돕고 싶어 객잔의 일을 시작한 것인데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상하게 했나 싶은 것이었다.

“서란아, 네가 객잔의 일을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러나 공부도 계속했으면 하는구나. 오늘 학당에 혜령과 서란이의 이야기를 했다. 내일부터 나가면 될 것이다.”

“정말입니까? 공부를 계속해도 되겠습니까?”

예서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괴물의 모습이었을 때도 매일 밤 머릿속에서 사서오경을 외우다 잠이 들었다.

아직 못다 한 공부가 너무도 많았기에 더 이상 배우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든 세월이 오 년이었다.

“서란아, 아이의 몸이니 어른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이냐. 그래서 객잔의 일을 그리도 하는 것이냐.”

“솔직하게 말하면 그런 것도 있습니다. 인정을 받고 싶습니다.”

“이미 내가 너를 인정했다. 너는 어른이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진짜다. 내가 거짓말을 하겠느냐.”

“공자님, 저를 어른으로 본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자세는 무엇입니까?”

예서란이 뾰로통한 얼굴로 공자를 바라봤다. 이유는 공자가 자신을 무릎 위에 앉혀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당과까지 입에 넣어 주려는 상황. 예서란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른은 무릎 위에 올리고 당과를 먹여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여운 것을 어쩌란 말이냐.”

예서란의 마음속에 기나긴 한탄과 한숨이 남는다.

‘이 사람은 글렀다. 객잔의 식구 중에서 공자님이 나를 가장 일곱 살로 보고 있다. 조카를 바라보는 눈길이라니. 사실은 공자님께 가장 어른으로 보이고 싶은 것인데…….’

예서란은 마음속으로 날카로운 검을 품었다. 언젠가 이 검으로 공자님의 마음속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가진 자신을 베고 진정한 모습을 보이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지만 결국 예서란은 공자가 먹여 주는 당과를 베어 물었다.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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