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어찌할 수 없다.
당양희는 자신의 동생을 고쳐 주겠다던 공자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불안한 마음이 가슴속을 휘저었다.
벌써 항주에 온 지 오 일. 공자는 조카와 온종일 놀고 예서란이라는 아이를 챙기기만 했다. 또한 밤에는 건청과 사귀진, 그리고 유향설과 여동생하고 술잔을 기울일 뿐 사천성으로 가자는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동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지금, 당양희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어이 입을 열었다.
“공자님, 동생의 걱정으로 밤사이 꿈에조차 나올 정도입니다. 사천성으로는 언제 발걸음을 하실 생각이신지요.”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다. 사천성으로 가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구나.”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저는 사천당문을 배신한 몸. 어차피 죽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죽기 전에 동생이 먼저 죽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당양희는 자신도 모르게 진심을 토했다. 당추필을 배신하고도 사천당문의 충의는 변함없다 했지만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당추필을 배신한다는 것이 사천당문의 등에 칼을 꽂는다는 것을.
그러나 당양희가 진심을 말했음에도 천일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 도착해야 너와 네 동생이 죽지 않는다.”
“하지만 공자님…….”
“안다. 그러나 서두름은 너와 네 동생은 물론, 가문까지 죽음으로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을 잊지 말거라.”
당양희의 고개가 순간 바닥을 향했다. 기다리는 동안 다급한 마음이 절망으로 온몸에 스며들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기도 했지만, 공자가 방금 말한 것은 또 다른 의심을 품게 했기 때문이었다.
‘가문까지 멸족의 길로 들어선다? 그것은 생각도 못 해 본 일인데 어째서 그런 말을…….’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당양희는 의심을 가슴에 품은 채 억지로 기다리는 길을 택했다. 아니, 기다리는 것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당양희의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천일영이 기다리는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도착했다.
* * *
다음 날.
천일영에게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맹금류를 훈련시킨 것으로 하오문의 높은 자들이 비밀 정보를 교환할 때 쓰는 것이었다.
[음양쌍녀. 산서(山西)성의 현무산(玄武山).]
천일영은 손끝에 기를 모아 발화시켜 종이를 태웠다. 현무산이라면 숨어 살기에는 제법 좋은 곳이다.
허나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어 했던 음양쌍녀가 고립된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의외였다. 어딘가에서 정체를 숨기고 한자리를 만들어 제법 잘살고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었다.
‘숨어 사는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너희들의 명운이 달라질 것이다.’
천일영은 무릎에 앉힌 혜령의 입에 당과를 넣었다. 곁에 있는 예랑의 입에도 당과를 넣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워서 삐쳐 있는 둘에게 이 정도는 해야 화가 풀리기 때문에 천일영은 아낌없이 시간을 들여 노여움을 풀고 환심을 사려 애썼다.
특히 혜령보다 예랑의 삐친 것이 오래갔다. 한번 삐치면 웬만해서는 화를 풀지 않는 예랑은 최소 삼사일을 달래 줘야 화가 풀린다.
‘헉!’
그때, 곁을 지나가던 예서란이 예랑과 혜령의 모습을 보자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선다. 어제 일을 생각하자니 창피함으로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어제도 창피했지만, 혜령이 공자님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구나.’
예서란은 천일영이 눈치채기 전에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공자가 또 자신을 무릎에 앉히고 당과를 먹여 준다면 도저히 거절할 자신이 없었기에.
잠시 당과가 입속으로 들어오던 생각을 떠올린 예서란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 * *
다음 날 산서성 현무산.
깊은 산속의 물가에는 여러 가지 보기 드문 물고기가 노니는지, 예랑이 물속 가까이에 코를 들이대고 신기한 듯이 바라본다. 과거 산속에서 살던 시절에도 보지 못했던 맑은 물이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오랜만에 산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좋은가 보구나.”
“컹컹.”
“산속으로 돌아오니 이곳에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느냐? 원래 네가 살던 곳은 이런 곳이었을 터다. 원하면 이곳에서 살아도 된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천일영의 얼굴을 한 번 흘끔 바라본 예랑은 고개를 저으며 곁에 바짝 달라붙었다. 마음을 읽었는지, 혹은 천일영의 곁에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것인지 예랑은 조용히 얼굴을 비볐다.
“그러냐. 같이 있고 싶은 것이구나.”
“컹컹.”
천일영은 산서성의 현무산까지 예랑과 같이 왔다. 처음 예랑은 천일영에게 안길 때 죽어 가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새로운 천지일축공을 경험하고는 만족스러운 듯했다.
천지일축공을 쓰는 내내 천일영의 얼굴을 핥아서 조금 곤란하기는 했지만. 천일영은 기분이 좋은 예랑과 함께 휘적휘적 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안과 혜는 그동안 어찌 지냈을까.’
과거 천일영은 음양쌍녀에게 자신의 성을 따서 천안과 천혜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이후 몇 년이 지나고 천일영은 이름이 사람의 성품을 따라간다는 속설을 떠올렸다.
안은 이름대로 남자 같은 성품으로 자라고, 혜는 조신한 소저로 자란 것이었다. 심지어 안이 남자 옷을 입고 다닐 때는 자신의 이름 짓는 실력을 한동안 원망하기까지 했었다.
“크르릉.”
“너도 눈치챈 것이냐. 하지만 괜찮다. 내가 아는 아이들이다.”
물가를 지나고 숲이 한참 우거져 길조차 나지 않은 곳. 천일영은 두 사람의 그리운 기감을 느끼고 발걸음을 옮겼다.
예랑도 천일영의 말을 듣고 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왠지 긴장한 듯 주변을 열심히 돌아본다. 예랑은 한순간, 갑자기 몸을 날려 어느 한 지점을 코로 가리켰다.
“뭔가 있는 것이냐.”
“컹컹.”
예랑이 가리킨 곳을 보니 함정이 몇 가지 설치되어 있었다. 기관 장치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닌 것으로, 기껏 나무를 깎아 화살처럼 만들어 놓은 것.
그러나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면 충분히 목숨을 잃을 만한 것이기도 했다. 분명 안과 혜가 만들어 숨겨 놓았을 터인 함정을 찾아낸 예랑에게 천일영은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기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을 사람의 냄새로 찾은 것이구나. 대견하다.”
“컹컹.”
천일영이 예랑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손을 떼자, 예랑은 한 번 더 쓰다듬으라고 앞발을 들어 올려 천일영의 손을 툭 친다.
어딜 한 번만 쓰다듬고 마느냐는 듯한 표정.
천일영은 예랑의 머리를 계속 쓰다듬으며 숲길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는 좁은 길을 따라 걷기를 반 각. 그곳에는 다 쓰러져 가는 움막이 있었다.
‘요령 없는 녀석들. 당장에 무너지지 않는 것이 신기한 집이구나. 하긴, 좋은 곳에서 부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면 당장에 죽였을 테지만.’
살림살이조차 없고, 이가 빠진 밥공기 두 개만 우물가에서 뒹군다. 천일영은 이곳에 안과 혜가 없는 것은 알고 있었다. 2리쯤 떨어진 곳에서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천일영은 안과 혜가 걷고 살아가는 흔적들을 따라갔다. 그리고 도착한 곳.
따악. 따닥. 따악!
슬펐다. 두 사람의 신형이 움직이는 곳에는 오직 후회와 슬픔만이 남아 있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서로에게 목검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 그 모습이 과거를 잘라 내려는 발악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한 서로를 당장 죽일 듯이 덤비는 모습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뿜어 나오는 살기는 서로에게 절망으로 비치듯 하여 주변의 동물들까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날 정도다.
따악. 따다닥. 파앙. 휘이익.
안이 혜를 공격한다. 일류 고수 끝자락 정도의 실력이었다. 검에 실린 무게가 무겁고, 속도는 바람을 갈랐다. 또한 검기가 안정되게 검 끝에서 머문다. 필시 오랜 시간 무공을 연마했을 터.
‘팔 년 전 그날 이후 계속 무공을 연습한 것인가.’
시간이 멈춰 있었다. 안과 혜에게는 팔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도망친 날로부터 조금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다.
휘이잉. 파앙!
안의 눈에서 안광이 터지며 혜에게 검을 날렸다. 순간 보인 빈틈을 조금도 놓치지 않는 뱀과도 같은 눈.
그러나 혜가 매와 같은 시선을 돌리며 안의 검줄기를 흘리고 몸을 돌려 안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자칫 죽을 정도의 위력. 이것은 비무가 아니었다. 실전이었다.
따악! 파앙!
“커헉!”
“일어나지 못해!”
혜는 자신이 휘두른 목검에 안이 쓰러지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사생결단이라도 낼 듯한 모습.
옆구리를 직격으로 맞은 안은 숨조차도 쉬기 어려웠는지 한동안 거친 호흡을 들이켜다, 기어이 입에서 피를 토하고 손짓으로 혜를 말렸다.
“커헉, 그…… 그만!”
“그렇게 옆구리를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그 버릇이 일 년 동안이나 고쳐지지 않는다니.”
“젠장, 빌어먹을.”
부들거리며 일어서는 안의 손에서 목검을 타고 한 줄기 피가 흘렀다. 물집이 터지고 또 터져서 결국에는 피부가 뭉개지고 흐르는 피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혜는 자세를 잡으며 다시 한번 살기를 퍼트렸다.
“그때 우리가 강했더라면, 우리는 천마님의 말씀대로 무공을 계속 배워야 했어.”
“그랬다면 우리 때문에 사람이 죽고 다칠 일도 없었겠지.”
타앙. 파방. 따다닥!
결의에 차 있지만 서글픈 눈. 안과 혜는 눈이 마주치자 서로의 목을 다시 노렸다.
파바밧. 따악.
안과 혜를 바라보던 천일영의 가슴에 묵직한 느낌이 쿵 하고 떨어졌다. 겨우 팔 년이 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예뻤던 얼굴은 전부 트고 흉터가 자리 잡고 있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또한 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를 튀기는 손은 이미 남자의 손보다 더 우악스러웠다.
그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안과 혜라 하겠는가. 개방의 방도 같은 옷차림을 하고 무공에만 열중하고 있는 여인 둘. 천일영의 눈에 작은 물기가 맺혔다.
‘내가 더 일찍 이 아이들을 찾았어야 했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당장이라도 지금 하는 비무를 그만두라고 하고 싶었다. 인제 그만 후회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예랑이 천일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작은 소리를 내었다.
“크릉?”
“왜 그러느냐?”
예랑은 천일영의 마음을 느꼈는지 한 번 고개를 들어 바라보고는 이내 안과 혜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예랑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안과 혜의 1장 거리 앞에 조용히 앉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검을 마주하던 안과 혜도 예랑을 순간 바라보고 검을 멈추었다.
“하얀색 늑대? 보기 드문 아이구나. 헌데 우리가 좋은 것이니? 꼬리까지 흔들고.”
“아냐, 혜! 털을 보건대 누군가가 기르는 녀석이야. 그런데 어째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 함정은 어떻게 통과했고?”
“컹컹!”
예랑이 고개를 돌려 천일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자, 예랑의 고개를 따라가던 안과 혜의 시선이 천일영을 발견하고 굳은 듯 얼어붙었다.
과거와 다른 모습이지만 자신들을 바라보는 표정과 눈빛. 세상에서 자신들을 이렇게 바라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어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있을까.
“처…… 천마님!”
안과 혜가 목검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잠시 떨리는 눈길을 보내다 이내 무릎을 꿇었다. 그녀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순간. 자신들의 고집 때문에 죽어 간 사람들의 혼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용서를 비는 것은 생각도 해 본 적 없다. 단지 그때 다 하지 못한 무공을 지금까지 해 왔으니 조금은 죄가 덜해졌을까.’
애써 떨리는 손길이 멈추고, 이윽고 안과 혜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떠올랐다. 무공을 연마하지 않고 세상을 우습게 봤다. 그 때문에 숨어서 무공의 수련을 해 왔다.
이것이 안과 혜의 속죄였다. 그리고 지금 죄의 대가를 갚아야 할 시간이 온 것이었다.
“천마님을 뵙습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안과 혜가 고개 숙여 인사드립니다.”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고개를 숙이는 안과 혜를 보자 천일영의 가슴은 뜯겨 나갔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식과도 같은 아이들. 행복까지는 아니어도 이렇게 망가져 있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
천일영은 입에서 하마터면 용서한다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손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그래서는 안 되는 일. 천일영은 억지로 살기를 흘리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과거의 일을 잊지는 않고 있구나. 허나 여전히 너희는 죄의 대가를 갚을 능력이 없다. 너희의 목숨값은 지나치게 싸구나.”
“알고 있습니다. 속죄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천일영은 무극지검을 빼어 들고 안과 혜의 머리 사이에 들이밀었다. 서슬 퍼런 검강이 무극지검의 빛을 더욱 무섭게 달궜다.
“죽은 자들의 목숨값은 치를 방도가 없다. 그들도 무명암살대의 일원들. 공양해 줄 가족도 없는 그들의 혼을 어찌 달래겠느냐.”
“그것은…….”
“속죄는 어차피 불가(不可)하다. 또한 죽은 자들도 그것을 바라지는 않을 터. 그러니 사자(死者)를 대신하여 그들이 하던 일을 받거라. 그것이 너희를 대신해 죽은 자들에 대한 공양이다. 그들의 이름을 품고 따라오거라.”
“천마님, 그것은 아니 될 말입니다. 저희는 이미 한 번 배신을 한 몸입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뭔가 착각을 하는 것이 아니냐. 나는 너희를 믿지도, 또한 용서한다는 말도 한 적이 없다.”
“그 말씀은…….”
“너희들의 목숨. 죽은 자들을 대신해 내가 잠시 맡을 뿐이다.”
안과 혜에게서 눈물이 떨어져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꿈에서라도 천마님과 다시 함께할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얼마나 바랐는가. 믿어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거지 취급을 해도 상관없었다.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안과 혜는 다 떨어진 옷을 한 번 다듬고 절을 올렸다.
‘이 목숨이 찢겨 나간다 해도 다시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맹세를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꺼내는 순간 그 빛이 바랠 것만 같았기에.
안과 혜는 갈라져 피가 흐르는 손을 쥐며 흔들리지 않으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