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십 년 전.
사건의 발단은 생각보다 작은 일이었다. 천일영이 극마의 경지를 눈앞에 두었지만 아직은 천마하고는 거리가 멀었을 때.
이때에도 이미 무명암살대를 건드릴 자는 없었다. 단주인 천일영의 무력도 공포의 대상이었지만, 무명암살대의 능력만으로도 천마신교의 마왕조차 무시 못 할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온전히 천일영 혼자서 단원들의 무공을 끌어 올려 만든 힘이었기에, 무명암살대는 천마신교는 물론이고 무림에서조차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천하제일의 무력을 자랑하는 무명암살대에도 단 한 가지의 약점이 존재했으니, 바로 정보였다.
무한대로 커질 것만 같은 힘을 두려워한 마왕들이 정보를 제한하는 것으로 무명암살대를 통제하려 했던 것이었다.
제한된 정보로 죽어 가는 단원들의 수가 많아지자 천일영은 안과 혜의 재능을 떠올렸다.
“안, 혜. 너희들이 정말 할 수 있겠느냐.”
“단주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언제가 되어야 은혜를 갚을 수 있는지 저희 둘은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에야말로 저희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허나 너희의 무공은 이류 무인이다. 일을 돕는 것은 무공의 수련을 계속하여 일류 고수가 된 다음부터다.”
“단주님, 저희의 특기는 정보입니다. 무공의 수련은 저희의 시간을 빼앗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닐 뿐입니다. 이것이 저와 혜의 생각입니다.”
“안 될 말이구나. 무공의 수련을 중지하는 것은 허락하지 못한다.”
“단주님! 그리하면 저와 혜는 앞으로 몇 년 후에나 단주님의 일을 도울 수 있습니다. 그때는 이미 늦은 것 아닙니까.”
“너희의 능력이 출중한 것은 안다. 허나 그렇다 해도 허락할 일과 안 될 일 정도는 구별하고 있다. 계속 무공을 수련하거라. 이후의 말은 듣지 않겠다.”
오늘 찾아온 것은 몇 년 후의 미래를 생각하고 안과 혜의 의중을 묻기 위함이다. 급하다 해도 원래부터 일류 고수가 된 이후부터 일임시키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천일영은 이때의 일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천일영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안과 혜가 더욱 정보에 몰입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수련할 시간에 정보를 모으고 가공하여 결과를 만들어 내면 당장에 도움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
그 때문에 천일영 몰래 안과 혜는 무공의 수련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일은 불과 일 년째에 천일영에게 들통났다.
천일영의 호통이 안과 혜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너희가 무공을 수련하지 않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 무공을 수련하지 않고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허락해도 좋다. 그러나 너희가 내 일을 도울 것이라면 이것은 안 될 일이다. 당장 연무장으로 나가거라.”
“아…… 알겠습니다. 허나 그전에 이것을 봐 주십시오.”
안과 혜가 떨리는 손으로 건네준 종이 뭉치. 시간이 없었는지 급하게 분류만 하여 넘긴 백여 장의 종이를 넘기는 동안 천일영의 눈에 경련이 일었다.
수많은 소문을 집대성하여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 내는 정보의 더미들. 그중 일부는 이미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며 정보를 모아 사실로 증명된 것들도 있었다.
‘이것을 단지 이 아이들이 해냈다는 말인가. 게다가 이 소문을 어찌 모았단 말이냐. 개중에는 하오문조차 모르는 정보까지 있다.’
천일영의 목울대가 울렁인다. 탐이 났다. 이 정도의 정보를 추려 내는 능력이라면 천일영뿐만 아니라 세상이 탐낼 것이었다.
‘하지만…….’
천일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이 탐난다고 하여 안과 혜를 이용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과 혜를 거둔 것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랐던 것이지 능력을 빼앗기 위함이 아니다.
“대단하구나. 그렇다고 해도 이것이 무공을 배우지 않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당장 연무장으로 나가거라.”
“아…… 알겠습니다, 단주님.”
거대한 호통 소리에 연무장으로 달려 나가는 안과 혜를 보며 천일영은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단지 안과 혜가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인데.’
무림인이 거두어들인 아이들은 숙명처럼 무림과 얽혀 든다. 주변의 환경이, 그리고 무림인의 아이라는 상황이 평범하게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무명암살대의 단주라는 지위로 인해 아이들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 호위를 붙이고 철저한 비밀을 유지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언젠가 안과 혜가 검을 들어야 할 날이 올 것이었다.
그러나.
안과 혜는 또다시 무공을 연마하지 않았다. 천일영이 붙여 준 스승에게 하루 두 시진 수련을 받는 것을 제외하면 오직 정보만을 탐닉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안이 남자의 옷을 입기 시작했다. 여자가 들어서지 못하는 곳에서 정보를 캐려는 방편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일 년이 흘렀다.
천일영이 천마신교에 접근하여 정보를 탈취하려는 세력들로 인해 상당한 애를 먹고 있었다.
천마신교는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이미 귀주성 전투에서도 당대 천마가 극살태마신공(劇殺台魔新功)의 영향으로 지나친 살심에 빠져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이후 상태가 더욱 나빠져 일에서 손을 놓은 탓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혼란은 천일영 스스로가 원인이었다.
얼마 전에 오른 극마의 경지. 마왕들은 비천한 살수 출신의 인간이 극마의 경지에 오른 것을 극히 경계하면서도, 만일을 위해 마왕들끼리의 견제 역시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천일영을 품어 천마신교의 정점으로 올라갈까 하여 매일같이 마왕들이 보이지 않는 싸움에 매달린 것이었다.
이 일로 인해 무명암살대의 제한은 더욱 심해졌다. 천일영이 무명암살대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는 책략이었다.
천마신교에 닥쳐온 일련의 사건들은 스스로의 발목을 묶으며 깊은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미 망가지고 있는 무림 3대 세력인 천마신교 앞에서 무림맹과 사혈련, 그리고 일부 새외무림(塞外武林)과 혈교, 또한 거대 상단까지 천마신교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하오문에는 정보의 대가로 날마다 거금의 금화가 쌓이고 있었으며 개방의 방도들조차 천마신교의 정문 앞에 있는 도시 귀천명(鬼天命)에 진을 치고 있을 지경이었다.
평소라면 천마신교의 견제로 발길조차 하지 못할 귀천명에 개방의 방도까지 마음껏 활개를 칠 정도로 체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었다.
“단주님, 이제는 무명암살대의 손발이 다 잘렸는데 밖의 일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있습니다.”
“마왕들이 가지고 있는 인력의 동원은 어떠하더냐.”
“천마신교의 주전력이 움직이면 그로 인해 지금 당면한 사태가 밖에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천마가 문제구나. 극살태마신공은 무인이 새로 태어나게 만드는 무공. 강제로 가르친 무공 때문에 이 지경이 되다니.”
“허나 극살태마신공은 단주님도 강제로 사사받은 무공입니다. 단주님은 잘 견디시지 않았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지.”
이 년이었다. 단 이 년만 더 흘렀어도 천일영 역시 미쳤을 것이었다.
극마의 경지에 빠르게 들어서며 살심의 유혹을 벗어났지만, 불과 일 년 전 길에서 이야기하는 아녀자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검을 빼어 드는 일까지 있었다.
그 마약과도 같은 쾌락은 지금 생각해도 온몸이 저려 올 정도. 살심을 강제로 꺾어 아녀자들을 죽이는 일만은 피했지만, 천일영은 순간 이성이 사라지고 살심에 빠져든 죄악감으로 한동안 검을 바라보지도 않았었다.
“근데 천마는 안 하실 건가요?”
“몸에 맞지 않는 자리다. 관심 없구나.”
“극마는 되셨는데, 천마는 왜 안 하십니까.”
의중을 떠보는 도현의 은근한 눈빛. 천일영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단박에 알아차리고 단호히 입을 열었다.
“안 된다. 생각도 하지 말거라.”
“마음을 읽지 마십시오. 말도 안 꺼냈는데 미리 답을 들으면 놀랍니다.”
“안과 혜는 아직 이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이용할 생각도 없다.”
“마왕 영감들에게 아직 정체가 들통나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또한 전에 단주님이 가져오신 백여 장의 정보 뭉치 덕분에 무명암살대 단원들이 수십이나 살았습니다. 이제는 더는 미룰 때가 아닙니다.”
천마를 안 할 거면 안과 혜라도 당장 필요하다는 의미다. 어찌 그 마음을 모를까.
천일영 역시 안과 혜라는 유혹이 마음을 휘저었다. 그 아이들이 도와준다면 지금의 위기를 빠르게 해결할 수 있었다.
마왕 영감들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천일영이 책임지고 있는 무명암살대 단원 천 명. 이들은 반드시 살려 내야 했으니까.
“이번 일만 해결될 때까지라면 어떻습니까. 앞으로 길어야 일 년일 것입니다. 그동안만 안과 혜의 지혜를 빌리지요.”
“하아……. 이제 겨우 열여섯 된 애들이다. 그 아이들을 이런 피 냄새나고 음모가 끊이지 않는 곳으로 데려오라는 말이냐.”
“마왕들이 손발을 다 잘라 놓은 무명암살대로는 이제 절멸의 길로 들어서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나치게 강해진 무명암살대를 숙청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안과 혜는 단주님께 소중한 자식입니다. 그러나 무명암살대의 천 명에게도 단주님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도현의 말에 천일영이 심장이 얼어붙듯 가라앉았다. 빠르게 피를 뿜어내던 심장이 멈춘 듯한 느낌.
천 명과 두 명의 목숨. 재어 보지 않아도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는 자명한 일이다. 천일영이 잠시 생각에 잠기다 힘겹게 입을 열려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는 것을 천일영도 모르지 않았으나, 입은 떨어지지 않고 잠시의 망설임이 계속 마음을 혼란케 했다.
그러나 천일영은 결국 입을 열었다. 아니, 열 수밖에 없었다.
“알았다. 앞으로 일 년만이다. 이제부터 도현, 네가 안과 혜를 맡아 일을 처리하거라. 나는 다른 무명암살대와 같이 일을 하겠다. 안과 혜는 비교적 덜 위험한 일에 투입하고, 내가 위험한 일을 맡도록 하지. 그리고 무명암살대 제7대대를 안과 혜의 호위로 붙여라. 그 아이들은 무공의 수련을 중단하고 이류 무인 초입이다. 이 전쟁터 같은 곳에서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한다.”
“이제야 마음을 정하셨군요. 단주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빠르게 일을 끝내고 안과 혜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고 싶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일을 안과 혜가 너무 기뻐하지 말았으면 하는구나. 내 입장 때문에 자주 찾아가지 못하니 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인가. 나는 아비로서 실격인 모양이다.”
“아닙니다. 오히려 아버지로서 너무 훌륭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돕고 싶은 마음으로 어른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단주님은 냉정하면서도 안과 혜의 일이라면 바보가 되는군요.”
“바보라. 그럴지도 모르지.”
씁쓸한 기운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천일영의 표정을 본 도현도 마음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다.
무명암살대라는 거대한 무력 단체가 아이 둘에게 의지한다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만, 단주가 단원들을 살리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 온 대가가 이런 식으로 찾아온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단주는 얼마나 천마신교에 가진 것을 더 빼앗기게 될까. 자식으로 키운 아이들까지 내놓는 지금, 단주의 마음이 어떠할지는 묻지 않아도 뼈저리게 사무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도현아, 전에 사들인 검 중에서 제법 좋은 것이 있을 것이다.”
“안과 혜에게 주실 건가요?”
“하다못해 검만이라도 쓸 만한 걸 쥐여 주고 싶구나. 여차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비룡맹검(飛龍猛劍)과 별학맹검(別鶴猛劍)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단주님! 하나에 금화 삼백 냥짜리 검입니다. 너무 과합니다.”
“그것이 금화 삼백 냥밖에 하지 않는 검이었나? 도현아, 더 좋은 검은 없더냐.”
“역시 딸들 이야기만 나오면 바보가 되는 것이 맞는군요. 제가 쓰는 검이 얼마짜리인지는 아십니까?”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여간에 단주는! 금화 한 냥짜리입니다. 근데 금화 삼백 냥짜리 검도 성에 안 차십니까? 더 비싼 건 안 됩니다. 그냥 비룡맹검(飛龍猛劍)과 별학맹검(別鶴猛劍)으로 가져가십시오.”
씨익.
순간 천일영의 웃음을 본 도현은 뒷골이 번쩍이는 느낌이 들었다.
‘당했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것인가. 내가 가져가라 했으니 무를 수도 없고, 하여간에 이 망할 단주!’
명검을 가져다주는 것에 불만이 나오는 것을 처음부터 봉쇄해 버린 천일영은 붉으락푸르락하는 도현의 얼굴에 대고 웃음을 흘렸다.
“너도 아버지가 돼 보면 내 마음을 알 거다.”
“흥, 저는 그렇게 무른 아버지는 안 될 겁니다.”
“검은 잘 가져가마.”
천일영은 안과 혜에게 줄 선물로 마음의 무거움을 조금 덜고 싶었다.
이 검으로 아이들이 무공에 조금 더 관심을 두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 정도의 검이라면 불의의 기습에도 한 번 정도는 견뎌 줄 터.
안과 혜가 기뻐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진 천일영은 빠른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