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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귀환기-84화 (85/270)

84화

천마의 방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마왕들은 천일영의 목소리에 온몸이 저려 왔다.

마염지의 발악에 가까운 표정이 천마의 방에 패악의 기운을 떨쳤지만, 이내 새로운 천마의 기세에 집어삼켜지고, 패범휘와 소초련, 그리고 나머지의 마왕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목천향은 잠시 상황을 보고 있었지만 무명암살대 단주의 살기에 숨이 넘어갈 듯한 공포를 느끼고, 자신이 마왕이라는 입장까지 잊은 채 고개를 숙였다.

“내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것에 불만이 있는 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거라.”

“…….”

아주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마왕들의 눈에 긴장이 감돌았다. 천마가 살아 있을 때 그 목숨을 직접 거두고 천마신교의 정점에 서는 일은 이때까지 없었던 일이다.

초유의 사태에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가운데, 의외의 인물이 거친 숨을 토하며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새로운 천마가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런가.”

파천마왕 패범휘. 그가 무릎을 꿇으며 천일영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이미 검을 들고 천마의 방을 찾는 천일영을 보았을 때 이렇게 될 줄 예상하였다. 어차피 누군가는 기울어져 가는 천마신교를 위해 검을 뽑아야 했을 때다.

그것이 비록 돈에 팔려 온 비천한 살수라 할지라도, 지금의 천마신교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필요한 사람이었으니 패범휘는 이 기회를 이용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다.

패범휘가 고개를 숙이자 연이어 소초련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 역시 이날이 오기를 고대했습니다, 천마님.”

연이어 독천마왕 서가흔, 사독마왕 갈현평도 무릎을 꿇자 이내 천검마왕 목천향도 무릎을 꿇었다.

이 흉악하고 포악한 기운을 어찌 견디랴. 그러나 이 또한 천마신교에 가장 어울리는 기운이 아니던가. 마왕들은 극마의 경지에 도달한 살수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말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직 한 명, 마염지만큼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마염지는 고개를 숙이지 않을 것인가. 내가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마땅치 않다면 이야기를 하거라. 다만 이후의 일이 어찌 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마염지는 독기를 품은 마음을 한 수 접고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키운 살수 놈의 명령을 듣는 것이 자존심을 긁었지만, 지금은 명을 늘려야 할 때.

그러나 마염지가 고개를 살짝 들어 다시 한번 바라본 천일영의 모습은 이미 지옥까지 모두 절단할 만큼의 서늘함이 서려 있었다. 그야말로 패왕의 풍모.

‘이미 패범휘는 알아보았던 것인가.’

마염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아니, 인정하기 싫었지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천마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눈앞의 비천한 살수였기에.

“전대 천마의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르거라. 장례는 천마신교가 허락하는 내에서 가장 크게 치르고 그의 공적을 널리 알리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비록 끝이 좋지 않았으나 전대 천마 역시 영웅이었음을 잊지 말거라.”

“모든 것은 천마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모두 나가거라. 이후의 것은 나중에 말할 터이니.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네.”

육대 마왕이 모두 자리를 비우고 나자 천일영은 천마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대 천마의 피가 섞인 공기에서 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지만, 천일영은 개의치 않고 한쪽 팔을 의자에 기댄 채 머리를 짚었다. 눈앞에 보이는 천마의 시신. 천일영의 눈에 후회와 죄악의 색이 비쳤다.

“당신과 나의 죄. 누구의 죄가 더 큰지는 모르겠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당신을 천마라는 올무에서 풀었어야 했건만. 몸에 맞지 않는 자리였어도 당신이 더는 죄를 짓지 말게 해야 했다. 그랬다면 도현이 죽게 될 일도, 창희문과 금태석이 죽어 버린 것도, 안과 혜에게 이런 일을 겪게 만든 것과 귀천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백이나 죽게 된 것 모두 막았을 터인데.”

천마가 변하고 천일영이 극마의 경지에 오르자 그에게 천마의 자리에 앉으라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거부했다. 그 자리에 앉은 순간 진정으로 마지막 남은 마음조차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자리를 외면한 채 살아온 대가가 마음을 갉아먹었지만, 천일영은 무너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빨리 돌아오거라. 너희에게 죄가 있겠느냐. 내가 천마의 자리에 늦게 오른 것을 탓할망정 너희에게 죄를 물리지는 못할 터이다.’

도현이 죽음에서 돌아오고, 안과 혜가 웃는 얼굴은 아니지만 돌아와 준다면 더 이상 무엇을 바랄까.

전대 천마의 죄를 짊어진 천일영의 자리가 이미 피로 물들었다 한들, 아끼는 사람들이 돌아올 장소만 지킬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견뎌 낼 터.

‘나만 참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한다면.’

천일영은 전대 천마의 시신을 모시러 온 사람들이 곁을 채우고, 이내 시신의 손끝이 하얀 천으로 덮일 때 굳은 얼굴로 마왕들을 맞이했다.

다음 날.

귀천명에서 이십 리 떨어진 산속. 안과 혜는 무명암살대가 만든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서후량으로부터 몸을 피신한 이후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단숨에 달려왔었다.

하룻밤 사이 눈물로 지새운 안과 혜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은 고통을 견디며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곳에서 눈물만 흘릴 수도 없기에 안은 혜의 뺨에서 물기를 지우며 입술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혜, 돌아가야 해. 가서 우리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아야지.”

“흑, 우리가 단주님의 말씀대로 무공의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면.”

“지금 후회를 해도 창희문 조장님과 금태석 조장님은 살아나지 않아.”

“도…… 도현 님은 괜찮으실까?”

“서후량과 추자룡, 두 명을 상대했다면 아마도…….”

새삼 죄의 무게가 안과 혜의 심장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러나 억지로 안은 혜를 안아 일으켰다. 깊어지는 죄의 무게가 자꾸만 자리에서 일어서라고 몸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

“죽는다고 해도 단주님이 목을 쳐 주실 거야. 어차피 그분께서 거두신 목숨. 다시 없어질 목숨으로 돌아간다 해도 후회는 없어.”

“그래, 우리가 단주님의 말을 듣지 않고 자만했던 결과니까.”

어두운 숲의 안에서 나와 안과 혜는 손을 꼭 잡고 귀천명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떨어지는 발걸음이 무겁고 힘겨웠지만 이를 악물고 곧게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귀천명에 들어섰을 때.

귀천명은 평상시와 달랐다. 기묘하게 슬프면서도 이상하게 들뜬 기운이 겹쳐 있는 느낌. 온 마을을 감싸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기운이 이상하게 느껴진 안이 옆을 지나던 아낙에게 말을 걸었다.

“마을 분위기가 이상한데, 무슨 일이 있나요?”

“행색을 보아하니 지금 막 귀천명에 오신 듯하네요. 오늘 천마신교에 새로운 천마가 천명(闡明)되었습니다. 그래서 소란스러운 거예요.”

“새로운 천마요?”

“네, 아침부터 떠들썩한데 천마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없기에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발표로는 천씨 성을 가지신 분이라고 하네요. 천마의 자리에 오르면 존함은 성 이외에는 알려지지 않는답니다.”

“처…… 천씨의 성!”

안에게 대답하던 아낙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안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나 본데요. 앞에 객잔이 있어요. 오늘은 새로운 천마님이 자리에 오르신 날이라고 술과 음식이 무료라 하니 그곳에서 쉬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그곳에 자리가 없다면 건너편에 장례식장이 있어요. 일단은 그곳에서도 음식을 받을 수 있답니다.”

“장례식장이요?”

“네, 어제 무림맹 놈들이 귀천명 주민 이백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합동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어요.”

“그…… 그것이 무슨!”

털썩.

아낙이 자리를 뜨자 안은 혜의 손은 잡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금세 알기는 어려웠지만, 잠시의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동안 머리 좋은 안과 혜는 일의 경과를 금세 알아차렸다.

“아…… 안 돼. 단주님이 천마의 자리에 오르시다니……. 그리고 귀천명 주민들이…….”

“어떡해, 안. 단주님이 천마의 자리에 오르신 것은 분명…….”

“우리 때문이다. 그토록 천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꺼리시던 분이신데 우리 때문에 억지로 천마의 자리에 오르신 거야.”

“우리가 일에 실패하고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이백 명이라니.”

“처음부터 전대의 천마 때문에 천마신교가 위태로웠어. 아버지는 모든 어그러진 일을 되돌리려 억지로 천마의 자리에 오르신 거야. 우리가 실패하지 않았기만 했어도 단주님은…….”

안은 비틀거리며 일어서 혜의 손을 잡고 귀천명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넋이 나간 듯, 무엇엔가 홀린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귀천명의 마을 입구에 도달했을 때 혜가 울부짖는 목소리로 안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어디 가는 거야, 안!”

“나는…… 우리는 돌아갈 수 없어. 분명 단주님은…… 아니, 아버지는 우리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계실 거야. 아버지가 천마의 자리에 오른 것은 다른 이유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를 지키기 위한 것도 있어. 아버지를 천마의 자리로 몰아넣은 것과 다름없는 우리가 돌아가는 것은 안 될 일이야. 게다가 우리의 실수로 이백 명이나 죽었는데 어찌 돌아갈 수 있겠어.”

“실패하고 수백의 사람들이 죽게 만든 죄가 큰데도 우리가 죽임조차 당하지 않도록 아버지가 지켜 주시는 것인가.”

“아버지……. 하다못해 선물로 주신 검만이라도 가져왔으면. 버려둔 채 땅에서 뒹굴고 있는 검을 보시고 뭐라 생각하셨을까.”

안과 혜는 망연한 얼굴로 귀천명 너머 보이는 거대한 성벽에 연결된 문을 바라보았다.

천마신교로 연결된 그 문 앞에 서기만 하면 무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안과 혜는 눈물을 흘리며 성문으로부터 눈을 돌렸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도저히 가지 못하는 곳.

일에 실패했지만 기꺼이 웃으며 자신들을 받아 줄 아버지의 얼굴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죄송해요, 아버지.’

안과 혜는 서둘러 귀천명을 떠났다. 새로운 천마가 천명되어 마을은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겨 흘렀지만, 어제 흘렀던 피의 기운은 아직 어둠처럼 귀천명을 갉아먹고 있었기에.

안과 혜는 비록 거리에서 씻겨 나갔지만 아직도 떠돌고 있는 피의 냄새가 자신들 때문이라는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마을 어귀를 빠져나갔다.

“참회멸죄(懺悔滅罪)조차도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사치일 뿐.”

안과 혜는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천마신교의 성채를 바라보았다.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이에서는 부러질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지만 안과 혜는 천마신교의 성채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이내 깊은 숲속으로 몸을 숨겼다.

이틀 후.

“천마님, 그저 죄송할 뿐입니다. 저희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도현 님의 목숨을 살릴 수 없습니다.”

“도현의 상태는 지금 어떠한가.”

“서후량이 도현 님의 배 속에서 일부러 검을 휘저은 탓에 간장이 상하고 오장육부가 도려져 있습니다. 구멍이 뚫린 폐 역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앞으로 하루 정도 더 살면 다행일까 싶을 정도의 상태입니다.”

천마신교 최고의 의원 집단인 활생명인(活生命人)의 수장 묘충수의 고개가 깊이 숙여졌다. 도현을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 아무리 애를 써도 도리가 없음을 고개를 숙이는 걸로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런가. 도현은 이제 죽는 것인가.”

“아뢰옵기 죄송하오나 처음부터 저희의 힘이 미칠 만한 상처가 아니었습니다.”

천일영은 천마의 의자에서 급히 일어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묘충수는 천마가 도현을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하여 자리를 옮기려는 것으로 생각하여 뒤를 따랐지만, 도착한 곳은 활생명인의 모든 의학 자료를 모아 놓은 곳, 활생명인당(活生命人堂)이다.

“천마님? 어째서 이곳에 오신 것인지요?”

“도현의 몸을 치료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거라.”

“감히 천마님의 명에 거역하겠습니까. 허나 책에 적힌 것 중 그 무엇 하나 도현 님에게 해 보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상관없다. 모두 꺼내라.”

“예.”

묘충수와 활생명인당의 의원들이 꺼낸 책은 사람의 높이에 몇 배나 이르는 양이었다.

천일영은 그중에서 약초에 관련된 책을 제외한 나머지의 의학 서적을 하나씩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안과 혜가 돌아오지 않는 지금, 도현마저 잃을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천일영은 급히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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