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85화 (86/270)

85화

사람의 신체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몸의 구조와 뼈대의 위치를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훨씬 쉬워지니까.

혈도와 기맥, 그리고 단전과 온몸 구석구석도 잘 안다. 그러나 사람을 살리는 신체의 원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내 손은 목숨을 거두는 일만 했다. 그런 내가 사람을 살릴 자격이나 있는 것일까.’

한 장씩 천일영에게 읽혀지는 의학책들이 삼십 권을 넘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내용이 머리에 복잡하게 얽혔을 법도 했지만, 천일영의 빠른 손길은 다음의 책을 손에 잡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읽고 또다시 넘기는 책장의 사이로 인체의 원리와 치료법이 빼곡할 만큼 적혀 있다.

그러나 천일영은 넘기는 책장의 구절 하나하나를 모두 외우며 다음 책을 거머쥐었다.

천일영은 식사와 잠도 거른 채 꼬박 하루가 넘도록 의학책을 읽었다.

그리고.

급히 찾아온 묘충수가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천일영에게 도현의 상태를 말할 때까지 천일영은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천마님, 도현 님의 상태가 급변했습니다. 지금 가 보지 않으시면 아마 다시는 대화를 나누시지 못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알았다.”

훅.

순간 묘충수의 앞에서 천일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강대한 무공으로 경공을 쓴다고 하지만, 빠르게 신형을 날리는 데도 작은 바람 한 점만을 남기고 사라지는 천마의 신위에는 또 한 번 놀랄 따름이다.

팔랑.

천마가 남기고 간 작은 바람의 한 점이 하루 꼬박 읽고 있던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그 모습에 묘충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총 일백삼십 권의 책을 건네 드렸건만 하루 사이에 다 읽으신 것인가.”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옮긴 책들은 단 한 권도 남기지 않고 원래의 자리에서 치워져 있었고, 천마가 신형을 날리자 마지막 장이 넘어간 책만이 유일하게 책상 위에 남아 있는 것을 본 묘충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타깝지만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한들, 책을 읽는 것만으로 사람을 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천마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려고…….”

묘충수는 책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책을 손에 들고 제목을 보았다.

그것은 괴상한 이론으로 도배되고 언뜻 가능할 것 같지만 아무도 실행하지 못했던 백 년 전의 책. 역사에 기록된 천마 중에서 탈마의 경지에 올랐던 사람이 직접 쓴 것이었다.

“진기를 만들어 사람을 고치는 방법이 적혀 있는 책인가. 이것은 백 년 전 탈마의 경지에 오른 천마가 실행했다는 전설만이 남아 있을 뿐,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묘충수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아직도 책에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천마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유독 이 책만을 몇 번이고 읽은 이유가 무엇일까. 묘충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끼는 수하의 죽음을 미루려는 것이겠지만 이 책은 그저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일 터. 어찌 천마의 자리에 오르신 분이 시간을 허비하시는 것인가. 차라리 이 시간에 삼도천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과 대화 한마디라도 더 하실 것이지. 안타까운 일이다.’

천마의 허망한 마음이 황당한 미신 같은 책에 기대는 심정을 모르지는 않지만, 묘충수는 책장을 다시 한번 넘기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진기로 사람을 치료하다니, 턱도 없는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었기에.

타다다닷.

좁지는 않지만 경공술을 쓰기에는 무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복도 사이로 신형을 날리는 동안 천일영의 가슴은 심하게 뛰고 있었다.

무명암살대부터 계속 곁을 지켜 준 도현의 마지막을 배웅해야 하는 지금. 가슴속에는 온전히 슬픈 마음 하나만 남아야만 하거늘, 어찌하여 마지막에 책장을 넘긴 책 한 권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모든 책이 도현의 죽음을 예고하듯 고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지막에 본 백 년 전의 천마가 쓴 책만을 제외하고.’

손끝이 떨려 왔다. 오직 초절정 고수의 벽을 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술에 관한 책. 내용은 온통 이상하고 기괴한 것들뿐이다.

내공을 진기와 같은 성질로 변화시키고, 그것을 몸 밖으로 꺼내어 성질과 형태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냥 진기처럼 성질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과밀하게 밀집된 성질로 진기를 다듬고, 그것을 단전에 집어넣어 상처를 순식간에 고친다는 원리.

사람이 원래 가져야 할 진기보다 훨씬 강한 기운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천일영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상처를 순식간에 고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린다? 끊어지고 잘린 오장육부를 이어 붙이고 원래보다 더욱 강하게 만든다? 그것이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천일영은 떨려 오는 손끝을 들어 정면으로 응시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허나 너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다. 네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듣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그 시간에 너를 살려 보겠다, 도현.’

천일영은 도현이 있는 의실(醫室)의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닷새 뒤.

천일영은 천마의 방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이미 다 마신 스물의 술병이 바닥에 구르고 있었지만, 천일영은 또 다른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천일영이 술을 마시는 천마의 방은 엉망진창이었다. 전대의 천마가 사 놓은 여러 가지 사치품들이 방 안을 뒹굴고 있었고, 값비싼 족자와 그림들은 값어치와 상관없이 모두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때, 가치를 잃고 다 마신 술병들과 똑같은 취급을 당하는 고가의 물건 사이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술이 과하셨습니다. 그만 드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도현이냐. 오늘까지만 진탕 마시고 내일부터는 아예 금주할까 하는구나.”

도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놓인 술병을 바라보자 천일영이 피식 웃으며 또 한 잔의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도현아, 내가 천마의 자리에 오른 이후 네 말투가 지나치게 공손해졌구나. 죽었다 살아서 그런 것이냐.”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단주와 천마라는 자리의 차이 아니겠습니까. 천마님께 함부로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도현은 말을 꺼낸 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한껏 드러내는 천일영으로부터 눈길을 피했다. 도현이 공손한 말투를 쓰는 것은 천일영이 천마라는 자리에 올랐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이번만큼은 꼼짝없이 죽을 것으로 생각했을 때, 느닷없이 나타난 천마가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고쳤다.

‘그게 어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 묘충수조차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으니.’

도현은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어 가며 자신을 살릴 방도를 찾은 천마에게 존경심과 강한 애착이 생겨 더는 함부로 말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피했던 눈길을 되돌려 천일영의 얼굴에 흐르는 표정을 본 도현은 마음이 쪼개지듯 아파져 왔다. 그 천일영이 이런 표정을 지을 줄이야.

“너만은 그러지 말아다오, 도현아. 안과 혜가 돌아오지 않는 지금 너마저 그런다면…….”

“알겠습니다. 정 원하신다면 막말을 일삼지요. 그나저나 술을 끊으신다고요?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술.”

“모르겠구나. 더 이상 취하지를 않으니. 아무리 일부러 취하려고 애를 써도 안과 혜가 돌아오지 않고 네가 죽을 뻔한 그 이후로는 술에 취하지를 않는구나.”

“찾지 않으실 겁니까? 안과 혜 말입니다.”

“내가 찾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 아이들이 자신의 발로 돌아와야 의미가 있는 것이지.”

툭.

안과 혜를 그리워하는 얼굴이 떠오르고, 이내 떨어트리듯 술잔을 내려놓은 천일영의 눈이 조금씩 감겼다.

극마의 경지에 오른 이후 잠을 자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았을 때만 그럴 뿐이다.

지치고 괴로운 마음으로 뜬 눈을 감지 못한 채 여러 밤을 지새우다 보면 그 어떠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지라도 지치고 힘든 것은 마찬가지.

도현은 눈이 감긴 천일영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제는 조금 쉬셔도 됩니다. 망할 단주. 아니, 망할 천마님.”

도현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천일영의 몸을 들어 침소에 눕혔다. 안과 혜가 서후량의 책략에 휘말려 돌아오지 않은 지 벌써 칠 일.

그동안 천일영이 단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도현은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안과 혜는 도대체 어디에…….’

안과 혜가 도망을 가고 귀천명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는 것 정도는 흔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천일영은 안과 혜를 데려오라는 명을 끝내 내리지 않았다.

딸을 잃었지만 찾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현은 잘 알고 있었다.

“돌아오면 자신들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굴레에 빠지게 되고, 또다시 천마신교의 일을 하게 될 것을 걱정하는 것 때문이겠지요. 애도 낳아 보지 않고서 잘도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다니 신기한 일입니다.”

도현은 조용히 천마의 방에 켜져 있는 단 하나의 불을 껐다. 작은 빛 하나에 일렁이던 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것이 마치 천마의 마음과 같아서 도현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암흑과도 같은 이 방이 천마님의 마음 같구나. 그러나 본인은 어둠에 빠진 마음을 지킬 생각도 하지 않으니 결국은 내가 곁에서 지켜 드릴 수밖에. 내일부터는 일부러 정신없는 일이나 일으켜서 천마님의 마음을 바쁘게 해야겠다.’

양손을 펼쳐도 얼마 가지지도 못하고 쥘 것조차 없이 천마신교에 모든 것을 빼앗긴 천마가 딸마저 잃고 삶을 포기할까 걱정되는 도현은 절대로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한 번 다짐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천마의 방을 나서는 도현의 눈에 캄캄하고 빛 한 점 없는 침소가 너무도 불길해 보인다.

무명암살대의 단주로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온 그가, 천마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똑같은 절망 속에 살아야 한다는 것처럼 느껴져 도현은 손에 힘을 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날을 기점으로 마음에도 없는 도현의 잔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 * *

현재.

타다닥. 타닥. 화르륵.

천일영이 내공을 가득 실은 무극지검으로 안과 혜가 살던 낡은 집의 벽을 때리자, 밀집된 거대한 내공이 터지며 한순간에 담벼락부터 집터까지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흔적조차 모조리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불꽃을 바라보는 안과 혜의 얼굴에 회한의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에 와서야 후회한들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끝내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사람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지난날의 후회는 끝을 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느꼈다.

지난날을 되뇌며 후회의 괴로움에 빠져드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이다.

“이곳에 있기를 몇 년이냐.”

“칠 년입니다.”

“칠 년이라면 오랜 시간이구나. 그러나 과거를 잊기에 충분한 시간도 아니지. 지금부터 귀천명으로 갈 것이다. 너희에게는 괴로운 곳일 테지만 불만은 듣지 않겠다.”

“상관없습니다. 죽음으로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죄가 있는데 장소 따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러냐.”

천일영은 잠시 안과 혜가 살던 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았다. 예랑이 매캐한 냄새 때문에 땅에 고개를 숙이고 양 앞발로 코를 덮기 직전까지.

예랑의 눈에 매캐함으로 눈물까지 고이자 천일영은 불타는 집에서 등을 돌렸다.

“돌아가자. 남아 있는 후회만큼이나 집이 오래 탈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천일영은 예민한 코와 눈을 가진 예랑을 안아 들고 산서(山西)성의 현무산(玄武山)을 나섰다.

몸을 짓누르는 죄의 무게에 다시는 꺾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고개를 억지로 세웠지만,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했던 마음 한 귀퉁이에 작은 불안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안과 혜는 굳게 다문 입술과 함께 세상 밖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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