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귀주성 귀천명.
하오문 귀주성 지회의 회주 윤의강이 눈앞의 두 여인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가득 내보냈다.
다 해진 것도 모자라 군데군데 찢긴 옷자락을 보고 있자니 욕지거리가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전에 애꿎은 한숨부터 쏟아져 나왔다.
이 거지와 같은 모습의 여인 둘이 한때 무림맹에서 못 잡아 안달이 났던 그 음양쌍녀라니.
“모양새를 보니 구걸하는 방법은 잘 알 것 같구나. 밥은 안 줘도 되겠군.”
“크릉.”
윤의강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못된 소리를 내뱉자 예랑이 안과 혜 사이를 가로막았다.
산서성에서 귀주성으로 오는 동안 안과 혜와 제법 친해진 예랑이 은근하게 화를 품은 얼굴로 윤의강을 향해 반쯤 이빨을 드러내자, 안과 혜가 윤의강의 말에 붉어진 얼굴로 예랑의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향하게 했다.
“괜찮으니 이를 드러내면 안 돼. 착하지, 예랑아?”
“컹컹.”
할짝. 할짝.
예랑이 달래 주기라도 하듯 안과 혜의 얼굴을 번갈아 핥았다.
그런데 잠시 안과 혜의 얼굴을 핥던 예랑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갑자기 일그러진 표정을 지은 예랑이 이내 안과 혜의 얼굴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입안 가득 뭔가를 모으기 시작했다.
“크르릉. 퉤!”
순간 인상이 구겨진 예랑이 거칠게 침을 뱉었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발길을 돌려 벽을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더러운 것을 핥았지만 아무래도 아는 사람의 것이니 삐친 표정을 보여 주는 것은 미안하다는 것처럼.
그러나 계속 코를 킁킁거리며 침을 우물거리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안과 혜의 얼굴에서 난 맛이 더러웠던 모양이다.
예랑의 행동에, 가뜩이나 얼굴이 붉어졌던 안과 혜는 새빨갛게 터져 나갈 것만 같은 색으로 물들어 바닥을 바라보았다.
한눈에도 창피함으로 기가 죽은 것이 보일 정도.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천일영은 독하게 먹은 마음 한구석이 조금 물러지며 기어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씻고 옷도 갈아입어야겠구나. 의강아, 사람들에게 비단옷을 준비시키고 씻을 곳을 찾아다오.”
“어이구. 저 상태로 그냥 다녀도 화가 안 풀릴 판국에, 씻기고 옷까지 사 주려는 것입니까?”
“나는 상관없다만 잠시 이곳에 안과 혜를 맡길 것인데 오히려 의강이, 네가 제일 곤란하지 않겠느냐.”
“하아……. 알겠습니다. 냄새를 풍기면서 돌아다니면 제가 제일 괴롭겠지요.”
윤의강이 방문을 열고 시녀를 불러 몇 가지 명을 내리고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안과 혜를 바라보았다.
“천마님께서 너희를 돌봐 주라 명하셨기에 참는 것이다. 허나 그것을 내가 너희를 믿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를 절대 믿지 않는다. 그것을 잊지 말거라.”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는 단 한 순간도 그것을 잊지 않을 것이니 마음껏 하대하셔도 될 것입니다.”
“도대체 얼마를 씻지 않았길래 저 늑대가 침을 다 뱉는 것이냐.”
“아……. 언제 씻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 습니다.”
혜가 창피함으로 물든 얼굴 끝에 힘겨운 대답을 내놓자 윤의강이 슬그머니 옷깃으로 코를 막았다. 방 안에 들어선 지 제법 시간이 지나자 안과 혜의 몸에서 나오는 악취가 농밀해져 숨을 쉬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당최 씻지도 않고 무엇을 한 것이냐.”
“무…… 무공의 수련을…….”
“히익! 무공 연습이라면 온종일 땀을 쏟아 내는 일인데! 그렇게 땀을 흘리고도 씻지 않고 살았다고?”
“씻는 시간, 먹는 시간, 자는 시간을 줄이고 무공에만 매달리기로 했어서…….”
“쳇. 그동안 시간을 허투루 보낸 것만은 아닌 모양이군.”
고집스러울 정도로 집요하게 안과 혜를 노려보던 윤의강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과거에 자신들로 인해서 벌어진 일의 원인을 찾고, 편한 생활을 버린 채 반성하는 마음으로 여태 노력을 해 왔다면 무조건 욕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윤의강은 조금 측은한 표정을 얼굴 한 면에 드러내다 이내 다시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서 윤의강이 안과 혜를 받아 준다고 느끼게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용서는 오직 천마가 해야 하는 법. 자신은 그분의 뜻에 따를 뿐이다.
“안, 그리고 혜야. 너희들은 앞으로 같은 옷을 입는 것은 물론이고, 남자 옷을 입는 것도 안 된다. 정체를 숨기려면 과거의 모든 것들은 지우거라.”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과거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도 되겠지. 의강아, 내가 맡긴 것을 주겠느냐.”
“싫지만 드리겠습니다.”
윤의강의 집무실 안쪽의 기관 장치가 돌아가자 작은 소리를 내며 문 하나가 열렸다. 윤의강은 그곳에서 두 자루의 검을 꺼냈다.
“이…… 이것은!”
안과 혜는 가슴 한 켠이 뜯겨 나갈 것만 같은 심정과 함께, 더러운 얼굴에 자국을 내며 눈물을 흘렸다.
오래전 아버지가 준 선물. 별학맹검과 비룡맹검이었다. 눈앞에서 놓친 검을 두고 도망갔을 때를 얼마나 후회하며 살았던가. 지금도 매일같이 후회를 반복해 왔다.
허나 지금 눈앞에 먼지 한 점 없이 안과 혜가 가지고 다녔을 때와 같은 두 자루의 검.
검집과 손잡이를 묶은 금색의 실에서 나오는 빛이 얼른 다시 손에 쥐라고 유혹하듯 얼굴에 어른거렸지만, 안과 혜는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과거를 잊지 말라고 주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뜻을 붙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주인이 돌려받는 것이 마땅하여 내가 잠시 보관한 것이다.”
“천마님, 저희는 이것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한 번 버렸던 검. 주인이라 칭할 자격이 없습니다.”
“한 번 내 손으로 너희의 품에 안긴 물건이다. 너희가 이것을 받지 않는다면 두 번이나 내 마음을 무시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또한 너희는 이제 내 일을 도와야 한다. 무공도 일류 고수의 경지에 들어섰으니 오히려 과거에 내가 너희에게 검을 주었을 때보다 합당한 물건이 되지 않았느냐.”
“천마님…….”
윤의강은 금화가 삼백 냥에 달하는 검이 일류 고수에게 합당한 물건인지는 둘째로 하고, 천마의 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여간에 물러. 무르다고!”
“너도 도현이랑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순간 안과 혜의 얼굴이 굳었다. 그동안 그토록 궁금했던 것.
“천마님, 도현 님은 그날 이후 어찌 되었는지요.”
“도현? 잘 있다. 죽을 뻔했지만 잘 살아나서 매일같이 나한테 잔소리를 퍼부었지.”
“하아, 다행이다.”
안과 혜가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동안 크게 자리 잡고 오랜 시간 괴롭혀 왔던 일. 도현의 일을 알아보자니 잘못되었을까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살아온 시간.
해가 바뀌고 흘러간 시간이 많아질수록 진실의 행방이 마음을 꺾어 내듯 짓눌렀지만, 더욱 큰 죄가 생기는 것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기만 해 왔다.
하지만 도현이 무사한 것을 알게 되니, 안과 혜는 안도하는 마음 한편으로 진실로부터 고개를 돌린 또 다른 죄악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드르르륵!
순간 윤의강의 방문이 거칠게 열리며 동시에 세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덩치가 산만큼이나 크고 우락부락한 얼굴을 가진 여인들은 안과 혜의 꼴을 보고 한 번의 비웃음을 코에서 뿜어내고는 뒷덜미를 잡고 방 밖으로 끌어내었다.
“회주님의 명대로 껍데기가 벗겨질 정도로 때를 밀면 되는 것이죠?”
“피가 나도 상관없다. 모래로 문지르든 돌멩이로 긁어내든 광이 나도록 때를 벗겨 내 사람으로 돌려놔라.”
“알겠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을 하는 안과 혜를 바라보는 세 여인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윤의강이 뭐라고 명을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거대한 신장을 가진 여인들은 반항 한번 못하는 안과 혜를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안과 혜는 이것이 마치 도현의 일로부터 고개를 돌린 죗값을 치르는 듯 느껴져 눈을 질끈 감았다.
* * *
깨끗하게 씻겨지고 윤의강이 시녀에게 명하여 사 온 비단옷을 입은 안과 혜가 천일영 앞에 앉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두 여인의 모습은 천일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아까 찾아온 시녀들이 얼마나 박박 문질렀는지 여기저기 피딱지가 앉아 있는 모습이나 혹은 옷의 문제가 아니었다.
씻고 난 이후에도 안과 혜의 얼굴과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팔의 피부는 거칠고 온갖 흉터로 가득했다.
무공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은 그 무엇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먹는 것까지 등한시했는지 안과 혜는 씻은 후에도 퀭하고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차라리 시커먼 땟국물이 얼굴과 피부를 가리고 있을 때가 나아 보일 지경이다.
“얼굴과 몸의 상태가 심각하구나.”
“상관없습니다. 움직이는 데 지장만 없는 몸이면 됩니다.”
천일영의 곁에 앉아 있던 윤의강도 한숨을 쉬었다. 제법 좋은 옷을 사 오라 했는데 입혀 놓고 보니 얼굴과 옷이 따로 노는 느낌이 들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거지한테 최고급 비단옷을 입혀도 이보다는 나을 듯했다.
하지만 안과 혜는 자신들의 모습에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천마님께서 저희를 찾으신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떠한 일을 맡기시려는 것입니까?”
“마음의 준비는 끝난 모양이구나. 안, 그리고 혜야. 너희는 사천당문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캐내거라. 인원의 구성과 각 분가의 모든 것까지 알아내야 한다. 또한 총전력과 파견을 나가 있는 무인들까지 모조리 파악하고, 심지어 기르는 강아지의 이름까지 알아낼 정도로 사천당문이라는 문파의 껍데기 안을 파고들어야 할 것이다. 사천당문 안에 있는 종이 한 장에 적힌 내용까지 모두 알아내거라.”
“기한은 얼마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열흘이다. 가능하겠느냐.”
“알겠습니다. 저 안과 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천마님께서 알아 오라 명하신 것을 기한 내에 찾아내겠습니다.”
타악.
천일영이 탁자 위에 금화 이십 냥을 올렸다. 그것을 본 안과 혜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천일영은 상관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개방을 통하든 다른 정보망을 사든, 돈이 드는 일이 있다면 가차 없이 쓰거라. 또한 하오문의 정보망도 공짜로 사용할 수는 없는 법. 아무리 친분이 있는 윤의강이라 해도 그냥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예산은 너희가 알아서 운용하거라.”
“미천한 저희에게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천일영은 안과 혜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었지만, 애써 몸을 돌리고 문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윤의강은 천일영이 밖으로 나서자 안과 혜에게 고갯짓을 한 번 하고 따라나서 음흉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렵니까?”
“내가 여기에서 다른 볼일이 있었던가?”
“에이, 왜 이러십니까. 천마님이 보고 싶어 매일같이 우는 여인이 있습니다.”
“매일같이 우는 여인?”
“하여간에 여자를 홀려 놓고 기억도 못 하시다니, 나쁜 남자라도 되실 생각이십니까? 같이 가시지요.”
* * *
윤의강이 잡아 이끄는 대로 천일영이 발걸음을 한 곳은 다름 아닌 천혜향루.
도착하여 잠시 생각에 잠겼던 천일영은 슬그머니 뒷머리를 긁었다. 윤의강에 말대로 전에 은소혜에게 귀천명을 다시 찾아오면 들른다고 했던 것이 기억났다.
기루에 들르는 것이 내키는 일은 아니지만 약속한 것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발걸음을 되돌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 일.
천일영은 천혜향루에서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방으로 가는 길에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 천일영에게 반했던 기녀 민가희였다. 민가희가 울먹이는 표정을 지으며 한걸음에 천일영 앞으로 다가왔다.
“어머, 공자님! 저를 만나시려고 다시 오셨군요.”
“너를 만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구나.”
“오호호. 전에도 아닌 척을 하시더니 공자님께는 만날 때마다 농담만 하십니다.”
“아니, 진짜다.”
“어머, 참. 공자님도.”
민가희가 천일영에게 찰싹 달라붙으려고 몸을 기대기 시작했다. 헌데 이번에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끄응! 끄응! 아니, 왜 내가 다가가려고 하기만 하면 몸이 밀려나는 거지? 저번에도 그러더니. 하지만 내 사랑을 방해할 수는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자님에게 다가갈 거야.’
민가희는 종아리에 근육 모양이 보일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해 몸을 밀착시키려고 애썼다.
젖 먹던 힘까지 모두 내어 발에 얼마큼이나 힘을 주었는지, 나무로 만든 마룻바닥에서 찌걱 하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후욱! 후욱!
입에서 토해지는 거친 숨결과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민가희가 보여 주는 사랑의 무게.
하지만 그때 곁을 지나가던 기녀 송체란이 민가희를 보고 기도 안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년아, 무슨 강간마 같은 표정으로 손님을 덮치려고 하고 있니? 네 표정을 보면 손님 기가 밤새 빨리고 내일 아침에 목내이가 되겠다.”
“아니야. 내 사랑의 표정이 강간마 같다니!”
덥석.
송체란이 웃는 얼굴로 천일영에게 조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있는 힘을 다한 손아귀로 민가희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민가희는 송체란에게 끌려가면서도 양손을 뻗어 간절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오늘 밤 꼭 저와 술을 마실 것이라고 믿사와요.”
“이년아, 공자님이 왜 너랑 술을 마시냐. 소혜와 술을 드시지. 암튼 남의 사랑 방해하지 말고 따라와. 이 눈치 없는 것아.”
“공자니임~~~.”
천일영이 빠르게 사라지는 두 여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것은 민가희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송체란에게 아주 많이 잘했다는 표식으로 손을 흔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