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드르륵.
천일영이 술을 한잔 기울이는 동안 열린 방문 건너편에서 은소혜가 숨을 헐떡이며 서 있었다. 은소혜는 천일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물을 한 움큼 쏟아 냈다.
“공자님, 어찌 이리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오셨습니까.”
“미안하게 되었구나. 허나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왔으니 용서해 주는 것이 어떠냐.”
“용서고 뭐고가 있겠습니까. 소녀는 공자님이 찾아 주셔야 겨우 뵙는 처지인 것을요.”
은소혜는 급히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옷깃으로 닦아 내고 천일영의 곁에 앉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예뻐 보여야 했지만, 천일영은 은소혜의 부은 두 눈을 보며 조금은 마음이 아려 왔다.
“밤마다 잠을 못 자고 운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더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천일영이 슬쩍 눈짓으로 윤의강을 바라보자 은소혜가 살포시 웃으며 천일영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소문은 과장되기 마련입니다. 있는 그대로 믿으시면 안 됩니다.”
“허나 너의 두 눈은 사실이라고 말하는구나. 많이 부었다.”
“보통은 알아도 모른 척하기 마련입니다. 공자님은 소녀가 숨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아 책임이라도 지시려는 것입니까.”
천일영은 은소혜의 원망이 드러나는 눈 위로 손을 올렸다. 그리고 두 눈 위로 진기를 흘려보냈다.
은소혜는 천일영이 행동하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했다. 믿었으니까.
그리고 눈 사이를 흘러 몸 안까지 흘러드는 기운에 살짝 몸을 떨었다. 전에 심하게 손을 떨 때 손끝을 통해 넣어 준 기운처럼 마음이 평온해지고 눈에 붓기가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전히 신기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책임을 지라는 것은 눈의 붓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다. 허나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구나.”
“피하시는 것도 능하십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다. 반한 제가 잘못인 것을.”
은소혜가 자신의 눈 위를 덮었던 천일영의 손을 잡고 가슴 위에 올렸다. 천일영은 조금 놀라면서도 손을 빼면 은소혜가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 하여 가만히 있었다.
“몸을 만지는 사람에게는 손찌검하는 게 아니었더냐.”
“제가 제 손으로 이끈 공자님의 손입니다.”
은소혜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열기가 섞인 입술에서 들뜬 입김이 나올 때, 순간 옆에서 더욱 강한 열기가 훅하고 느껴져 깜짝 놀란 은소혜와 천일영이 고개를 돌렸다.
타 죽을 듯한 열기가 나오는 곳엔 혼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온갖 시기와 질투가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윤의강이 있었다.
“어이구, 아주 두 분이 난리입니다. 따로 방을 잡아 드릴까요?”
“오호호, 아닙니다. 제가 조금 과했습니다. 그런데 손님을 혼자 두고 어째서 아직 아무도 안 들어오는 것인지 제가 알아볼까요?”
조금은 창피한 마음에 은소혜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때마침 문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거라.”
문이 열리자 송체란이 약간의 땀과 함께 지친 표정으로 들어섰다. 머리카락도 조금은 헝클어진 것이 천혜향루를 대표하는 기녀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다.
“제법 늦었구나. 또한 어찌하여 이리도 헝클어진 모습인 것이냐?”
“아?! 죄…… 죄송합니다. 누굴 좀 묶고 오느라…….”
“누굴 묶어? 아! 그렇군. 아니다, 고생이 많았다.”
상황을 눈치챈 윤의강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송체란을 맞이했다. 꽤나 날뛰는 민가희를 묶는 데 애를 먹었는지 송체란은 윤의강에 곁에 앉아 시원하게 술을 한잔 들이켰다.
“어차피 조금 전 민가희를 끌고 갈 때 제 본래의 성격이 전부 탄로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술 한잔 급히 마시고 취기에 기녀로서의 연기를 다시 시작할까 합니다.”
“하하핫. 역시 천혜량루 최고의 기녀구나. 아까의 말과 행동을 이렇게 무마하는 것도 훌륭하거니와 목이 말라 급히 술을 들이켜는 핑계로도 나무랄 데가 없구나.”
한순간에 분위기를 돌려놓은 노련한 송체란의 말에 모두 술잔을 기울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두 시진 후.
제법 달아오른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고, 술병이 스무 병쯤 방 안을 구르고 있을 즈음이었다.
문득 천일영은 그리운 느낌의 기감을 느끼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깜짝 놀란 은소혜가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일영은 잠시 망설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 때문에 놀랐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일어서신 것입니까?”
“보고 싶었던 사람이 오고 있구나. 순간 마중이라도 나갈까 하여 나도 모르는 사이 몸이 일으켜졌다.”
“보고 싶었던 사람이요?”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무래도 옆에서 헤벌쭉한 표정으로 술을 마시는 저 친구가 나 몰래 선물을 준비한 모양이구나.”
천일영이 들뜬 표정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윤의강을 바라보자, 은소혜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타박하듯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보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하면 응당 여인일 터. 은소혜는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정으로 심장이 쪼개지듯 아파져 왔다. 그리고 일각이 지난 후, 방문 밖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오거라.”
드르륵.
문이 열리고 공자가 보고 싶었던 사람의 정체가 확인된 순간, 은소혜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자가 보고 싶어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자. 여인이 아닌 것만으로도 은소혜는 눈물이 핑 돌았다.
“도현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네, 잘 지냈습니다. 바로 따라가지 못해서 죄송하기만 할 따름입니다.”
“남아서 내가 해야 할 일의 뒷감당을 하는 너다. 도현아, 나야말로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그런데? 떠나시고 얼굴색이 많이 좋아지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근심이 한가득하십니까? 제가 곁에 있으면 이것저것 챙길 터인데 설마 밥도 잘 안 드시고 매일같이 술만 드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만나자마자 잔소리인 것이냐.”
잔소리가 싫은 듯, 혹은 그리웠다는 듯 천일영은 웃으며 도현의 술잔을 가득 채웠다.
천일영과 도현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암살을 나갈 때에도, 심지어 천마가 된 이후에도 언제나 항상 함께하던 도현이다.
“오늘은 술이나 진탕 마시자.”
“좋습니다. 근데 저만 옆구리가 허전하니 기녀 한 명 불러 주십시오.”
“별일이구나. 보통 여자에 대해서는 달리 말이 없던 네가 아니냐.”
“본의 아니게 매일같이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당하니 오늘만이라도 기분 좀 풀어야겠습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강요당하다니?”
“그…… 있습니다. 소씨 성을 가지신 분 곁에 있다 보니 강제로…….”
천일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소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명천마왕 소초련을 말하는 것이었다.
소초련이 여자이기도 하고 원래 남자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덩달아 도현도 여러모로 여자를 만나기가 눈치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때 도현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송체란이 몸을 일으켰다. 기녀를 데리고 오기 위함이었다.
“민씨 성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 기녀를 데려오지요.”
“하하핫. 부탁한다.”
잠시 후 송체란이 데려온 사람은 기녀로서는 나이가 제법 많은 이십 대 후반의 초야화라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초야화는 청초한 느낌을 가득 풍기는 절세 미녀였다.
천일영은 은소혜와 버금갈 정도의 미모를 가진 초야화를 보며 또 한 번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어째서 천혜향루는 일류 기녀가 아닌 사람이 더 미모가 출중한 것이냐. 은소혜야 손버릇 때문에 그렇다 해도 초야화 역시 보기 드문 미녀다.”
“아……. 은소혜의 손버릇이 저에게 물든 것이라……. 찰지게 소리가 나도록 올려붙이는 따귀는 아직도 제가 소혜보다 두 수 정도 위입니다.”
“손버릇이 나쁜 기녀라. 마음에 드는구나.”
“에엣?”
초야화를 칭찬하는 천일영에게 은소혜는 자신도 모르게 살짝 질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머나?’
자신이 삐져 있는 사이, 천일영의 손길이 허리에 감겼다. 은소혜는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가 손길을 이끌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먼저 몸에 손을 댄 적 없던 사람이, 따스한 손길로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 오자 은소혜는 조금 놀라면서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여간에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노시는 데 일가견이 있으신 분입니다.”
“삐친 네 얼굴을 보는 것보다는 이것이 나으리라 생각했을 뿐이다.”
그때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초야화가 도현의 술잔에 맑은 술을 따르며 중얼거렸다.
“나쁜 남자.”
손에 술잔을 들고 있던 송체란도 입안에 술을 털어 넣고는 중얼거렸다.
“동감이에요. 나쁜 남자.”
그리고 붉어진 얼굴의 은소혜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도 밉기는커녕 한 순간도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으니.”
도현이 세 여인의 말을 듣고는 술잔을 들어 올리며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부터 변하시지를 않는군요. 도대체 몇 명의 여인들 마음속에 불을 지르는 것인지.”
“응? 내가 뭔가를 했던가?”
“본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부분에서 질이 더 나쁩니다.”
“푸훗.”
“오호호호.”
“깔깔깔.”
도현의 말에 세 여인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후 해가 뜨기 직전까지 즐거운 술자리는 계속되었다.
* * *
도현이 해가 뜨기 직전 몸을 일으켜 세웠다. 명천마왕 소초련이 아무리 바람막이가 되어 주고 있다 한들, 다른 마왕들의 눈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니 도현은 해가 뜨기 전에 천마신교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도현이 아무도 보지 못하게 천일영의 품 안으로 편지 한 장을 집어넣었다.
“아직은 따라가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다. 안과 혜도 있으니.”
“그 아이들을 다시 거두신 것입니까?”
도현의 입가에 살며시 웃음이 그려졌다. 그동안 안과 혜를 지키지 못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편치 못했다. 도현은 가슴속에 커다란 짐이 하나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과 혜에게 안부 전해 주십시오.”
“그 말을 들으면 안과 혜가 꽤나 기뻐하겠구나.”
“다시 뵐 때까지 부디 건강하시길.”
도현이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은소혜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천일영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님은 이곳에서 나가신 이후 저를 기억하실까요.”
“기억하다마다.”
“그럼 언제 또다시 뵐 수 있겠습니까.”
“사 개월 후에 다시 오마.”
“사 개월……. 짧지는 않은 시간이네요. 하지만 기다리겠습니다. 약조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약속하마.”
천일영은 몸을 일으켜 윤의강과 함께 천혜향루를 나서 하오문의 지회로 들어섰다.
윤의강이 잠시 취기를 떨칠 겸 씻으러 들어가고, 천일영 혼자 윤의강의 방문을 여니 그곳에서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다 탁자에 엎어진 채 잠이 든 안과 혜가 있었다.
눈 밑에 진하게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까보다 더욱 짙은 색으로 변해 있었고, 새벽 공기가 건조했는지 피부는 각질과 함께 이리저리 들떠 있었다.
‘그 예뻤던 애들이…….’
천일영은 독하게 품었던 마음의 한 켠이 또다시 무너지고 또한 무뎌지는 것을 부정하지 못했다. 과거의 일이 아무리 어두운 그림자처럼 발목을 움켜쥐고 있어도 천일영의 움직이는 발걸음을 막아서지는 못했다.
‘여기까지만 도와주자. 정말로 여기까지만이다.’
천일영이 안과 혜의 손을 잡고 진기를 밀어 넣었다. 조금 전 은소혜에게 넣었던 진기의 수백 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진기가 몸 안으로 밀려 들어가자 안과 혜의 얼굴에 거친 부분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여기저기 흉측하게 생겨 있던 흉터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다.
얼굴과 몸에서는 윤기가 흐르고 갈라진 머릿결도 곱게 정돈되었다.
천일영은 허공에 금빛 진기의 실을 띄우고 몸 안 스무 군데에 매듭을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항주로 발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자제심을 잃고 안과 혜를 꼭 안아 주며 괜찮다고 말을 할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윤의강이 몸을 씻고 집무실 문을 열자 안과 혜가 탁자에 몸을 기대고 잠든 것이 보였다.
“쯧.”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한들, 밤을 새우고도 몸 하나 편히 눕히지 못한 채 잠이 든 것이 마땅치는 않았다. 때문에 윤의강은 잠시 침소에 들어가 잠을 자라는 말을 꺼낼 요량으로 안과 혜의 등을 흔들었다.
안과 혜는 윤의강의 손길이 닿자마자 즉시 눈을 떴다. 한껏 긴장한 상태로 잠이 들어 바로 깬 것이었다. 안과 혜는 눈을 비비다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
“안? 네 얼굴이…….”
“혜? 너도 마찬가지야. 얼굴에 흉터가 모두 사라졌어.”
놀랄 만큼이나 깨끗하고 윤기가 흐르는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영문을 알기 위해 끙끙거리는 안과 혜를 보며 윤의강은 한숨을 지었다.
“하여간에 물러. 물러도 너무 물러!”
천마라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나 물러 터져서야 어디에 쓰겠나 하는 생각이 든 윤의강이었지만, 이내 천일영이 남기고 간 선물이라는 것을 눈치챈 안과 혜가 웃음을 짓는 것을 보자 결국은 윤의강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직은 자식을 가져 본 적이 없지만, 아버지라는 생물은 하나같이 바보인 모양이다. 윤의강은 절대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자식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 절대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서가 아니다. 진짜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다.
‘하지만 송체란이라면?’
윤의강은 떡 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침부터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