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88화 (89/270)

88화

집에는 손님이 남아 있었다.

사귀진과 유향설도 지금까지 천일영의 집에 있었고, 당양희 역시 초조한 심정을 드러내며 방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천일영은 자리를 오래 비웠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사귀진과 유향설은 사실 이미 떠났어야 하는 사람들이지만 천일영이 사천당문을 치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곁에 있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를까 하여 남아 있는 두 명의 사파인들에게 천일영은 불편함이 없도록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파바방!

그러나 기특한 사귀진과 유향설이 곁에 있어 주는 것과는 별개로, 천지일축공으로 집을 향하는 천일영의 마음 한편이 꿈틀거리며 편치 않았다.

안과 혜를 오랜만에 만나고 도현 역시 제법 시간이 흐른 후에 얼굴을 봤기 때문인지 조금씩 욕심이 고개를 든 탓이다.

꿈처럼 매일같이 그려 왔던 생활. 여동생과 조카, 그리고 건청과 금채홍. 또 사귀진과 유향설, 그리고 안과 혜와 도현이 모두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예랑도.

“응?”

순간 끼쳐 오르는 소름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그것도 모자라 심장이 쿵 하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든다. 천일영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러고 보니 예랑을 두고 왔구나. 이를 어쩐다.”

안과 혜를 다시 거두고 생각지 못한 도현까지 만났기 때문인지 예랑을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한번 삐치면 삼사일이나 가는 예랑이다. 그런데 귀천명에 두고 왔으니 이 일을 어쩔 것인가.

“최소한 한 달은 삐치겠구나.”

지금에 와서 발걸음을 돌린다 한들 삐친 예랑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다른 핑곗거리를 찾는 것이 나을 터.

천일영은 미안한 마음에 한숨 한 번 내쉬고 도현이 건네준 편지를 펼쳤다. 기쁜 소식이 적혀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편지를 읽는 천일영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굳어져 갔다.

서하린과 윤의강을 통해 대략적인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도현의 편지를 읽어 보니 천마신교의 상황이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특히 유일하게 천일영의 편이라 했을 만큼 오랜 시간 친분을 쌓아 온 명천마왕 소초련의 입장이 매우 안 좋았다.

“명천마왕 소초련조차 알지 못하도록 다른 마왕들이 숨기는 것이 있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벌이는 것인지. 소초련 곁에 일단 도현이 있으니 지금 당장은 괜찮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는 명천마왕의 자리조차 위태로워지겠구나.”

편지를 읽는 도중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전대 천마가 정신을 놓았을 때보다는 낫다는 정도일까.

한번 크게 휘청였던 천마신교는 과거의 경험으로 천마가 없는 지금 제법 큰 위기 없이 잘 꾸려 나가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천일영은 천마신교가 흘러가는 방향에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짙은 어둠 속에 똬리를 튼 구렁이가 숨어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망할 놈들. 떠나면 신경 쓸 일이 없을 줄 알았건만 끝까지 발목을 잡는구나.”

편지를 읽던 천일영의 눈길이 한곳에 고정되듯 멈추었다. 편지의 마지막 구절.

“다른 마왕들이 무엇을 꾸미는지 소초련과 캐내겠다고? 이 말은 깊이 파고들겠다는 말이지 않은가. 자칫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인데.”

시간이 없다. 도현과 소초련, 두 사람 모두 천일영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다. 천일영의 이가 꽉 다물어졌다.

* * *

하남성(河南省) 무림맹.

사천당문 당주 당용택은 반쯤 고개를 떨구고 의자에 앉아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씁쓸한 눈빛으로부터 애써 시선을 피했다.

중원에는 정의와 협을 실천하는 사천당문의 외형적 모습으로 눈을 속이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십이 년간 맡은 바 일을 처리하지 못한 죄인으로서 진실의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는 무림맹에서 사천당문의 명분을 세워 주기 힘들게 되었소. 사천당문의 문주께서는 이번 일의 뒤처리 이후 당분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시오. 앞으로 적어도 오 년은 지나야 황실에서 의심의 눈길을 거둘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맹주님께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이랄 게 있겠소. 허나 해남도의 일은 워낙에 규모가 컸던 터라 무림맹도 의심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 문제겠지요.”

무림맹 맹주 남궁천의 눈에 가느다란 살기가 잠시 흘렀다. 원래라면 사천당문 따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을 필요도 없을 터다.

허나 지금 당장 갈아 마셔도 시원치 않을 사천당문이 위기에 처하면 가장 곤란해지는 것은 무림맹이었다.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도 단죄의 검을 들이밀지 못한 채, 오히려 죄인을 보호하는 입장에 처한 남궁천의 속에서 화가 가득 차올랐다.

그러나 잘잘못을 떠나 지금에 와서는 해야 할 일이 너무도 자명한 탓에 남궁천은 한숨부터 내쉬고 입을 열었다.

“당추필의 일은 어찌 된 것이오? 당추필 본인이 해남도에서 일에 실패하고 사천당문 본문에 와서야 죽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오?”

“사천당문의 가장 비급 독인 반고일독(反顧一毒)에 당했습니다. 사지가 터져 나가고 오장육부가 쏟아져 내려 죽었지요.”

“사천당문의 독이라면 응당 내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럼에도 사천당문의 독에 죽었다? 이 일의 경위에 대해서 짚이는 것은 있는 것이오?”

타박하는 듯한 느낌이 담긴 거친 남궁천의 말투에 당용택은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에 답답하기로만 따지자면 남궁천보다 당용택이 궁금한 것이 훨씬 많다.

“독이란 것은 조금만 배합을 달리해도 성질이 변합니다. 그 때문에 하나의 독을 새로이 만드는 것보다 이미 존재하는 독의 성질을 바꾸기가 쉽지요. 허나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알려지지 않은 비급 독에 손을 댄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이것이 가능한 인물을 꼽자면 마교의 사독마왕 갈현평이나 이미 죽은 독천마왕 서가흔 정도가 손을 댈 수 있는 인물이겠지요.”

“그렇다면 마교의 인물이 해남도 사건에 관련되었다고 생각해도 되겠소?”

“어디까지나 예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맹주님의 말씀대로 가장 가능성이 있는 일이겠지요.”

당용택의 대답에 남궁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천마신교가 독에 대해서 사천당문보다 한 수 아래인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만 그것은 십이 년 전까지의 일이다. 귀주성 전투에서 무명암살대 단주 천일영이 터트린 독, 화골명천(化骨命千) 때문에 세간의 평가가 달라진 탓이었다.

화골명천은 모용세가의 문주 모세룡을 비롯하여 천량도사마저 이 년이나 정양하게 만든 무서운 독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천은 흰색의 번들거리는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사천당문의 문주께서는 조용히 계시되, 한 가지 일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찾으십시오. 반고일독에 손을 댄 자를 말입니다.”

“내 아들을 죽인 자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사사로운 제 감정이 앞설지라도 맡기시겠습니까?”

“그러니 당 문주께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남궁천은 말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등을 돌렸다.

무림맹의 맹주를 떠나 같은 오대 세가의 문주에게 보이는 행동으로는 지나치게 예의 없는 것이지만, 그의 행동은 이번 일도 실패하면 그다음은 없다는 의미라는 것을 당용택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맹주께서 원하는 것을 가져오지요. 그것이 목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다 죽어 가는 것일지라 할지라도요.”

“상관없소이다. 입만 열린다면 그 어떤 상태라도 괜찮소. 하지만 문주, 빨리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드르륵.

당용택이 문을 열고 나가자 남궁천은 방 한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검이 한 자루 놓여 있었다.

어용지천참대검(御用地天斬代劍).

스릉.

남궁천은 검을 조용히 들어 올렸다. 묵직한 검의 무게가 팔을 타고 흐르자, 남궁천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진다.

십오 년이나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한 검. 그러나 밖으로 나가지 못한 세월 동안 검 안에는 원한이 맺히고, 분노가 가득 채워져 이제는 손이 닿지 않아도 모든 것을 베어 버릴 만큼의 서늘한 예기가 풍겨 나왔다.

이류 무인이라면 검을 만지는 대로 죽거나 기절을 할 것이고, 일류 고수라 할지라도 어용지천참대검의 검 자루를 쥐면 혼이 나가 미쳐 버릴 터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어 피를 쏟은 자리에 자라난 만년한철을 죄가 없는데도 죽인 사람들의 피로 담금질하여 만든 검이다. 이제 곧 네가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피를 빨아들이거라.”

우우우우웅!

검에서 방을 흔들 만큼이나 강한 떨림과 함께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남궁천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검날에 손가락을 그었다.

검날에 맺힌 남궁천의 피는 이내 어용지천참대검 속으로 사라졌다. 피를 머금은 검은 이내 예기를 숨기며 정적과도 같은 어둠을 피워 냈다.

한편.

무림맹의 거대한 정문 밖으로 나서는 당용택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남궁천이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 그가 모를 리 없으니까.

‘반고일독은 몸의 혈도에 자리를 잡고 하루 뒤에 죽이는 독이다. 허나 추필이가 죽은 것은 독에 당한 지 열흘이나 지나서였지. 반고일독에 손을 댄 자를 찾으라는 것은 죽음으로 이르는 시간이 늘어난 반고일독으로 종남의 도사 놈들을 모조리 죽일 생각인가.’

원한을 갚고 이득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반고일독의 성질은 은밀함이다.

아주 작은 양만으로도 혈도에 자리를 잡고 일시에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독. 독에 대해서는 천하에 이름을 떨칠 만큼의 실력을 갖춘 당추필조차 자신이 독에 당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열흘이나 지나서 죽는 독은 세상에 없다. 아니, 하루 뒤에 죽는 반고일독을 만들기 위해서조차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는가. 열흘 뒤에 죽는 독의 제조법만 놈을 잡아서 캐낸다면 종남은 물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황실의 일부 인간들까지 모조리 죽일 수 있을 터!’

비록 독에 관하여는 천하제일이라 불리는 사천당문의 문주로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지만, 가문의 보존과 힘을 되찾기 위해서는 그 무슨 짓이든 전부 다 하겠다는 일념으로 당용택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당용택의 얼굴에 남들은 알아보지 못한 작은 웃음이 걸렸다.

‘내가 사냥감이 되었다고 생각했었지만 아직은 사냥꾼이다. 전부 물어뜯어 주마.’

당용택의 눈에 번들거리는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 *

천일영은 항주에 도착하자마자 급히 윤의강에게 전서구를 날렸다. 언제나 윤의강과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상공을 맴돌고 있던 맹금류가 편지를 끼운 통과 함께 순식간에 사라졌다.

“일단 예랑은 안과 혜를 호위하고 지키며 쓸쓸해하지 않도록 달래 주는 역할로 십 일만 그곳에 둔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윤의강이 알아서 둘러대겠지.”

천일영의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편지로 예랑이 삐치는 것을 한 달에서 열흘쯤으로 줄였지만, 당분간은 털을 쓰다듬는 것도 못 하게 하려는 예랑의 표정이 눈에 선히 보였다.

“내가 예랑을 기르는 것인지, 예랑이 나를 길들이고 키우는 것인지.”

천일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자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는 금채홍을 바라보았다.

순간 왜인지는 몰라도 가슴속을 휘젓던 불안함이 모두 사라졌다. 천일영은 신기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금채홍을 향해 떼어지는 발걸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천일영은 금채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잠시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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