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한 달 뒤.
“안과 혜가 이번 일로 벌어들인 돈을 천마님께 바칩니다.”
“생각보다 일도 잘 처리했지만 호언장담한 만큼 큰돈도 벌었구나.”
안과 혜는 천일영의 앞에 금화 삼천 냥을 쌓아 올렸다. 두 번에 걸쳐 판매한 정보의 금액은 총 칠천 냥에 달했지만, 각각의 하오문 지부와 하오문의 본문에 수수료로 삼천 냥을 지불하고 귀천명 지회에서 정보가 나갔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비밀 유지비 천 냥이 나갔다.
천일영은 눈앞에 쌓인 삼천 냥 중에서 처음 안과 혜에게 주었던 이십 냥만을 제하고, 나머지 돈을 다시 안과 혜에게 건넸다.
“돈은 잘 받았다. 허나 이 돈은 다시 너희들이 가져가거라.”
“돈을 저희에게 주신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놀라서 두 눈이 튀어나올 듯한 표정을 짓는 안과 혜에게 천일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삼천 냥이나 되는 금화는 웬만한 성의 2할 정도를 살 수 있는 금액. 천하 오대 상단이나 움직일 만한 큰돈이다.
“앞으로 써야 할 돈이 많을 것이다. 너희는 천하의 모든 정보를 모으는 거점을 만들어야 할 것이니 이 돈조차도 모자랄지 모르지.”
“천마님께서는 큰 죄를 저지른 저희에게 앞으로도 일을 맡기시려는 것입니까?”
“이번에 너희들이 처리한 일을 보고 확신했다. 너희는 너희가 가장 잘하는 일을 하거라.”
“넓은 아량으로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다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천마님.”
안과 혜가 깊이 숙인 고개 사이로, 몇 방울의 눈물이 바닥을 적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때 금채홍이 금룡참월하검을 껴안고 들어오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어머나? 지금 울면 이따 흘릴 눈물이 없을 텐데?”
“히익!”
안과 혜가 금채홍을 보며 부들부들 떤다. 악귀 같은 수련을 진행하는 금채홍 때문에 매일같이 눈물을 흘리는 안과 혜가 서로를 껴안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일영은 안과 혜의 얼굴을 외면했다.
“과거에 게을리했던 수련이 아니더냐. 채홍이의 실력은 내가 보증하니 열심히 따르거라.”
“아…… 알겠습니다. 무공의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하여 일정한 경지까지 도달하면 더는 수련을 하지 않아도 될 터이니 걱정은 말거라.”
“그 경지가 어느 정도까지입니까?”
“음…… 초절정 고수 정도가 딱 좋겠구나.”
“초절정 고수!”
“놀랄 게 뭐가 있느냐. 열심히 하면 금방 경지에 오른다. 앞으로 한 이십 년 정도?”
입을 쩍 벌리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안과 혜를 보며 천일영은 금채홍에게 슬쩍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앞으로 더 막 굴리라는 의미다. 금채홍의 단정한 얼굴에서 차가운 기운이 서늘하게 풍겨 올랐다.
“오늘부터는 눈물을 쏙 빼는 정도가 아니라 두들겨 패면서 수련을 해야겠네요. 검면으로 맞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알게 될 거예요.”
“맞아 가면서 수련을 한다고요?”
“어머? 적들은 때리는 게 아니라 베고 찌른다고요. 맞는 게 행복한 거예요. 베이면 얼마나 아픈데요. 찔리면 죽고요.”
“자……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두 분을 죽이지는 않는답니다? 딱 죽기 직전에 패는 것을 멈출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금채홍이 살기 섞인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이 흡사 귀신. 안과 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일류 고수의 경지에 오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과거 천마님의 말씀은 최소한 일류 고수의 경지에 올라야 일을 시킨다는 것으로, 결국은 초절정 고수의 경지까지 오르는 것을 상정해 두고 말한 것이었다.
“어찌 그리 입을 벌리고 멍해진 것이냐. 죽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된 것이다. 그보다 무림맹과 사천당문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까지 했다. 그다음은 어찌하겠느냐?”
“아?! 다음은 사천당문의 안으로 파고들 것입니다. 천마님께서 소개해 주신 당양희 소저를 통해 이미 다음 일을 진행해 놓았습니다.”
“이번에도 정확하게 알고 있구나.”
“이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혜는 품 안에 있는 편지 하나를 천일영에게 건넸다. 그것은 당양희를 통해 사천당문과 내통한 편지였다.
천일영은 편지를 펼쳐 읽고는 손에 내공을 모아 불을 붙여 태웠다. 당양희는 이로써 사천당문의 문을 여는 열쇠로의 역할을 다했다.
“사천성(四川省)에 다녀오마. 그동안 너희가 할 일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맡겨 주십시오. 이미 그다음의 일도 진행 중입니다.”
천일영은 안과 혜를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계획하는 일의 첫머리만 알면 이미 끝을 예상하고 한꺼번에 계획을 세우는 안과 혜의 출중한 능력에 마음속으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무공만 좀 더 제대로 수련한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다.
천일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음을 지었다.
“금채홍이 금룡참월하검의 면으로 때리는 것은 정말로 아프다. 뭐, 그래도 다녀와서 치료 정도는 해 줄 터이니 열심히 수련하고 있거라.”
“히익! 네…… 네에.”
귀천명 하오문 지회의 문을 열고 나온 천일영은 마을 입구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제 사천당문의 본문을 치러 갈 시간이었으니까.
* * *
사고낭산(四姑娘山).
이십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산속을 빠르게 이동하는 남궁서우는 무림맹 맹주의 첫째 아들 남궁세강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사촌 관계에 있지만 남궁세강은 무림 제일의 가문 남궁세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존재다. 그의 아버지는 명망 높은 무림맹의 맹주 남궁천. 남궁세강 역시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의 인망과 실력을 두루 갖춘 존재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사천당문의 당용택을 기회가 있는 대로 죽이라는 명령. 또한 아무도 모르게 은밀함을 최우선으로 하여 죽여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 말은 남궁세가 이전에 무림맹과 사천당문이 떠도는 소문처럼 깊은 밀월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창천 아래 가장 푸르고 높은 자리에 있어야 할 남궁세가. 그뿐인가. 천하제일검가(天下第一劍家)로서 악독한 무리를 물리치고 협을 실천해야 하는 곳이다.
중원의 푸른 하늘 아래 협의 중심이 있다면 그 또한 남궁세가다. 그러한데 어찌 사천당문의 문주를 치라는 것인가.
‘하지만 이 일을 해내지 못하면 나의 미래가 없는 것도 사실이지.’
남궁서우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애꿎은 일이다. 협을 지키려면 가문의 배신자가 되고,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협을 버림과 동시에 세상의 도리를 저버리는 일이 된다.
잠시 생각건대 협과 자신의 미래 둘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냐고 한다면.
‘당연히 나의 미래다.’
남궁서우는 야심으로 가득 찬 자신의 가슴을 한 번 두들겼다.
나이 마흔셋에 이미 초절정 고수. 남궁세가 안에서도 그의 실력은 이름이 높다 못해 차기 문주의 오른팔이 될 것이라는 소문도 흔하게 도는 입장이다. 그 미래를 버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남아 대장부라면 당연히 꿈꿔야 할 자리다.’
남궁서우의 마음에 결심의 빛이 서렸다. 더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남궁서우는 자신의 손을 들어 뒤따라오는 수하들의 발걸음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망할, 놈들도 머저리는 아니라는 말인가.”
남궁서우는 이를 악다물고, 깊은 숲 너머를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생각하지도 못한 일에 자신의 미래가 푸른빛에서 회색빛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면서.
* * *
천일영은 사고낭산의 깊은 산맥을 달렸다.
분지 형태로 되어 있는 사천성으로 빠르게 들어갈 수 있는 산이지만, 험난하고 그 높이가 천하에 이름을 알릴 정도라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드물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곳이다.
아름답고 이름 높은 네 개의 봉우리가 처녀처럼 수줍게 산세를 숨기고 있어 경치에 홀린 사람들이 오르다 죽는 곳.
천일영은 사천성으로 가는 낮은 산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들어온 깊은 산속을 천지일축공으로 빠르게 가다가도 문득 한 번씩 발걸음을 멈추고 아름다운 산세에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경탄이 나오게 만드는 풍경. 그러나 맑고 푸름만이 있어야 할 깊은 산속 한가운데에서 풍기는 어울리지 않는 기운에 천일영은 양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없는 이 험난한 산에 살기를 숨기고 있는 무인 이십 명이라. 평소라면 그냥 지나쳐도 될 법하지만, 놈들의 기운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구나.’
천일영의 인상을 찌푸리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기운. 잠시 물이 흐르는 곳에 서서 무인들이 이동하는 방향을 보니 사천성 성도(成都)를 향해 가고 있다.
‘무엇이 목적인지 훤히 보이는 것은 나만이 아닌 모양이군.’
남궁세가의 무인에게 다가가는 또 다른 살기. 서로를 견제하며 다가가는 두 개의 거대한 살기 앞에서 천일영은 조금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의 이득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 무슨 짓이든 다 하는 무리. 몰랐던 사실은 아니지만 새삼 눈앞에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니 착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천일영은 잠시 고개를 들어 태양의 위치를 가늠하여 시간을 보았다. 사천성에서 만나야 할 사람을 기다리지 않게 할 만큼 여유 있는 시간.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니 일단은 가 볼까.”
씁쓸하고 착잡한 마음은 둘째다. 그보다는 재미있는 구경이 먼저다. 천일영은 언제 씁쓸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웃음을 한가득 지으며 신형을 날렸다.
한편.
남궁서우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비침을 바라보며 욕지거리를 날렸다.
“이 개 놈의 새끼들이 우리가 오기까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냐!”
“커헉!”
챙. 챙. 채쟁. 채앵.
수천의 비침이 날아오는 것을 보며 검으로 쳐 내는 사이, 어느새 한 명의 수하가 온몸에 수백의 비침이 꽂히며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남궁서우는 빠르게 몸을 뒤로 날리며 수하들에게 고함을 질렀다.
“나무 뒤로 몸을 숨겨 비침을 피하라!”
“네!”
하지만 그 명령이 부하들의 명을 재촉하는 것인 줄 상상이나 했을까.
비침은 각기 다섯 개의 방향으로 수하들에게 날아갔다. 수천의 비침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다섯의 방향을 향했지만, 각기 다른 사천당문의 무인들이 날린 터라 실제로는 수십에서 수백의 방향을 이루며 남궁세가의 무인들의 몸을 꿰뚫기 시작했다.
퍼벅. 퍼버벅.
“크악.”
“커헉.”
순간 다섯의 무인이 쓰러졌다. 남궁서우는 목울대로 넘어가는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허망한 눈길로 수하들이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비록 기습이라고는 하지만 기감으로 적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 사천당문의 무인들 역시 상대가 자신들을 눈치챘음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남궁서우는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가는 길이 아니라면 한참의 시간이 더 걸린다. 시급을 요구하는 남궁세강의 명이 부딪혀 싸우다 죽는 무인보다 우선이다.
그러나 남궁서우의 인상은 이내 찌그러졌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싸움이 아니라 학살이다.
‘망할 놈들. 어째서 공격하는 것을 숨기지 않는가 했더니 위치가! 저놈들은 높고 아래가 훤히 보이며 바위로 몸을 가릴 수 있는 위치다. 이것을 어찌 뚫는단 말인가.’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지리적인 이점을 한껏 살려 또 한 번의 비침을 쏟아 내었다. 기관 장치가 움직이며 비침이 쏟아져 나오는 소리가 섬뜩하게 남궁서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피비비빗! 콰앙. 후두두두두둑!
만천화우(滿天花雨). 폭우이화정(暴雨梨花釘). 폭우이화침(暴雨梨花針).
대량으로 날릴 수 있는 암기 수법이 차례로 터지며 이제는 수천이 아니라 수만의 비침이 쏟아져 내렸다.
남궁서우는 비침이 날아드는 소리를 듣자 즉시 커다란 바위가 지면에 박혀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분명 놈들은 자신이 있는 곳을 미리 알고 방향을 트는 기괴한 비침을 날렸을 것이다. 같은 자리를 고수하는 것은 죽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파바바박!
자신이 서 있던 나무에 수천에 달하는 비침이 박히는 것을 본 남궁서우는 신속히 몸을 날린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숨. 비록 이번에 사천당문에서 날린 비침으로 다섯의 수하들이 또다시 비명횡사했지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툭.
남궁서우는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천뢰구(天雷球)를 보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런 개 같은…….”
순간 천뢰구에서 거대한 소리와 함께 빛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