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
천일영은 성도의 외곽에 있는 허름한 다루로 들어섰다.
지은 지 오래된 다루는 겉으로 보기엔 제법 운치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이 생각보다도 더 오래전에 지은 건물인 것 같았다.
하지만 오래된 냄새 뒤에 따라오는 향긋한 차향은 천일영의 마음에 들었다.
다루 백향(百香).
백 가지의 차를 다루고, 원한다면 각기의 다른 차를 섞어 명차에 뒤지지 않는 향을 피워 낸다고 하는 곳. 천일영은 다루의 오래된 계단을 밟고 올라 이 층으로 향하여 눈앞에 보이는 낡은 방문을 열었다.
드륵.
천일영이 문을 열자 안에는 날카로운 기운을 숨긴 한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약조된 시간보다 오래전에 도착해 있었는지 이미 제법 많은 양의 차를 입에 댄 듯한 모습.
하지만 그는 천일영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차를 음미한 후 입을 열었다.
“명차라고 함은 싸구려를 섞어 뛰어난 맛을 내는 것도 포함입니까?”
“그렇다고 생각한다만 지금 마시는 차는 고급품을 섞어 또 다른 명차의 맛을 낸 것이 아닌가.”
“본래의 맛이 사라지고 전혀 다른 맛이 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맛이기는 하지만 본질을 생각한다면 싸구려로도 비슷한 맛을 낼 수 있을까 궁금하던 참입니다.”
남자는 웃으며 찻잔 하나를 천일영 앞에 놓았다.
쪼르륵.
남자는 찻잔에 여러 가지 차를 섞어 만든 새로운 향을 피워 냈다.
“본디 본가라는 것은 가문의 중추지요. 차로 비교한다면 명차 그 자체입니다. 허나 분가라는 싸구려 차를 섞어 본가라는 명차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사천당문에 필요한 것은 이 다루처럼 지어진 지 오래되어 퀴퀴한 냄새가 나는 본가가 아니다. 그대가 따라 준 이 차처럼 새로운 향기를 피워 내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니겠는가. 이 새로운 향도 시간이 오래 지나면 본가를 상징하는 것이 될 테지.”
“틀린 말은 아니십니다. 공자님, 먼저 제 딸아이를 살려 두신 것에 대해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자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는 다름 아닌 당양희의 아버지이자 사천당문 제일 분가를 맡고 있는 당강용이었다.
“편지에 적힌 내용을 보니 사천당문에 새로운 향을 피우려 하시는 것이더군요. 허나 제가 그것을 허락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공자님께서 딸아이를 인질로 잡고 제 아들의 병을 고친다는 핑계로 목숨 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는 하나, 저는 제 자식조차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인질로 잡은 적은 없구나. 당 소저에게는 기다리라 했을 뿐이다. 당 소저가 사천성의 집으로 돌아가면 해남도의 일로 당용택이 가만두지 않을 터. 또한 아들의 몸도 당 소저와 약조한 것이니 이 일과는 상관없이 고칠 것이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원한다면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도 된다. 나는 네 아들의 몸을 고치고, 당 소저는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허나 당소저가 집으로 돌아간다 해도 그때까지 사천당문이 남아 있겠느냐.”
“허허……. 딸아이의 편지대로 이상한 분이시군요. 딸아이가 돌아온다 해도 공자님의 말씀대로 사천당문은 멸문하여 남아 있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편지에 적힌 대로 하기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사천당문의 멸문은 확정된 것이다. 지금 사천당문은 무림 공적이 되기 직전. 무림에 사천당문이라는 이름을 보존하려면 내가 제시한 방법만이 유일한 것을 모르지 않을 터다.”
당강용은 공자의 말에 심장이 울컥대며 아파져 오는 것을 느꼈다. 분명 눈앞의 공자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딸아이가 편지에 쓴 공자의 경지를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별개로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공자에게서 단 한 치의 빈틈도 발견할 수 없었다.
형제로서 사천당문 문주의 자리에 올라 있는 당용택을 상대한다 해도 마음만 먹으면 치명상 정도는 입힐 실력을 갖추고 있는 당강용조차 끼쳐 오르는 소름을 참아 내기 어려운 초고수.
하지만 이 사람의 손을 잡으면 멸문의 길을 애써 피할 수 있을지라도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다. 일의 성패를 떠나 감당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선택하라고 하지는 않겠다. 길은 두 갈래가 아니라 오직 한 갈래만이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너의 양심이 희생을 걱정한다면 하루 정도는 생각할 시간을 주도록 하지. 그것으로 너의 마음이 달래진다면 좋겠구나.”
“후우……. 아닙니다. 생각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도 형님인 당용택 문주가 저지른 짓은 착실하게 사천당문을 멸문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제안한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일모레다. 그때 이 일을 마무리 짓도록 하지.”
“무림맹에서 이 일을 받아들이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만.”
“그것에 대한 것은 이미 처리되었다. 남궁세가로 증표 하나를 보냈으니 아마 삼 일 후에는 도착할 것이다.”
“증표?”
천일영은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당강용은 깊은 한숨과 함께 또다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당강용이 많은 양의 차를 마시는 것은 긴장으로 입이 마르기 때문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아이에게 편지가 왔을 때는 기뻐했지만, 내용을 읽어 갈수록 당강용은 떨리는 손길을 주체하지 못했었다.
‘처음에는 자식과 문주인 형님, 둘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의 문제인 줄 알았다. 허나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건대 이것은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당강용은 또 한 잔의 차를 들이켰다. 아무리 마시고 마셔도 마른 입안은 적셔지지 않고 갈증만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으니까.
* * *
이틀 뒤 사천당문 본문 앞.
말이 좋아 본문이지 이곳은 본가와 일 대부터 십 대까지 분가의 집이 모두 모여 있는 곳.
그만큼 다른 세가의 수십 배나 되는 면적을 가지고 있는 곳이자 사천당문 그 자체다.
그러한 곳이니 정문 또한 그에 합당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천일영은 느긋한 걸음걸이로 사천당문 본문의 문 앞에 섰다.
“사천당문에 무슨 볼일이 있는 것인가?”
“일 분가 분주 당강용과 약속이 있다.”
“잠시 기다리시오.”
정문을 지키는 다섯의 무인 중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일각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 안으로 들어섰던 무인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왔다.
“당 분주님의 말로는 의원이라고 하던데 어째서 검을 가지고 다니는 것이오?”
“무서운 세상이지 않은가. 비록 검을 잘 쓰지는 못해도 호신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이다.”
“흐음…….”
무인은 잠시 고민했다.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고, 눈이 확 뜨일 만큼이나 잘생겼지만 영 비실거리는 느낌이 계집 같은 느낌을 준다. 검을 지니고 있다 해도 위협이 될 만하지는 않을 듯하다.
무당파라면 해검지(解劍池)가 존재하여 모든 검과 무기를 풀고 들어가야 하지만 보통의 세가는 신분만 확실하다면 도검류의 소지를 허락하기도 하니 무인은 고민하기를 그만두었다.
“원래대로라면 허가하지 않을 것이지만 당 분주님께서 그대로 모시라 하니 들어가거라. 하지만 다음부터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후에는 검을 두고 오도록 하지.”
“따라오거라.”
활짝 열린 거대한 문을 통과하여 사천당문의 본문으로 들어서자 천일영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혈련의 천주나 천마신교의 천마 중에서 당당하게 오대 세가 안에 무력 없이 발걸음을 한 사람은 아마 천일영이 처음일 것이다.
조금 재미있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던 천일영은 유독 시끄럽고 번잡스러운 기운이 풍기는 한곳을 응시했다.
‘저곳이 본가인 모양이군. 지금쯤 난리가 났을 터다. 구파일방과 명문 세가에서 매일같이 압력을 넣고 있을 것이니.’
웃음이 나온다. 천하의 오대 세가다. 무림맹에서 독을 해독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사천당문뿐이기에 겨우 명줄을 이어 가는 것일 뿐, 그마저도 없었으면 이미 사천당문의 현판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터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안과 혜가 모은 정보에 따르면 구파일방과 다른 명문 세가에서 사천당문의 해독을 전문으로 하는 무인들에게 접근한다고 했던가. 이미 사천당문의 무인들을 빼돌리려고 혈안이 된 것이지.’
천일영이 씁쓸한 생각에 사로잡혀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어느새 일 분가의 문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는 일 분가의 분주라는 자존심도 버리고 당강용이 직접 마중 나와 서 있었다.
‘표정을 보니 모든 각오와 준비가 끝난 모양이군.’
당강용은 자신의 방으로 천일영을 안내하고 차를 따랐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을 대접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긴장한 당강용 자신이 빨리 목을 축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직접 접대하는 것이다.
지금도 울컥거리는 심장. 마른침을 삼킨 당강용이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분가는 이번 일에 동의했습니다.”
“전부는 아닌 모양이군.”
“삼 분가와 오 분가가 반대했습니다만 상황을 보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반대했다면 문주에게 보고했을 것입니다. 이미 사천당문은 눈치를 보는 자들이 속출하는 실정입니다.”
“이탈한 자들은 얼마나 되는가.”
“약 스무 명입니다. 아직은 이탈이 크지는 않습니다만 시간문제겠지요.”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강용은 사천당문 본문 안에서 연락만을 책임지는 하인을 불렀다.
“문주님과 만날 것이다. 면담을 할 것이니 시간을 받아 오거라.”
“문주님께서는 지금 시간을 내기 힘들 터인데요?”
하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곤란한 얼굴빛을 띤다. 하인의 행동으로 보아 이미 무너져 가는 사천당문 안에서는 연락 체계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강용은 화를 내는 대신 품 안에서 천에 쌓인 것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것을 보여 드리면 바로 만난다고 하실 것이다.”
“알겠습니다.”
못마땅한 표정을 보이던 하인이 억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강용은 하인이 본가로 향하자 문을 닫고 조금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만 들어 왔던 멸문이 코앞에 닥치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소라면 당강용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자가 면전에 대고 불쾌한 표정을 지을 것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몹쓸 꼴을 보였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술이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독이 들어 있지 않다면.”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십니까.”
“일단 따라 보아라.”
천일영이 살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당강용은 심장이 덜컥하는 느낌으로 온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냥 보통의 웃음일 뿐이다. 술을 마시기 전에 농담 한마디 하는 평범한 모습이다.
그러나 당강용은 이상한 기운이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말과는 다르게 독이든 그 무엇이든 넣어 보라는 것 같은 느낌. 무서울 것 없는 패왕과도 같은 풍모에 당강용은 천일영 몰래 침을 삼켰다.
“사천성이 자랑하는 랑주(郞酒)입니다.”
“처음 마셔 보는 술이구나.”
천일영이 한 잔의 술을 비우자 당강용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딸아이가 절대 공자님을 거스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허나 제법 공자님과 오랜 시간을 보낸 딸아이조차 공자님의 정체는 모르는 듯하더군요.”
“그럴 리가 있나. 당양희는 내가 객잔 주인인 것을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네? 객잔 주인?”
황망한 표정으로 천일영을 바라보던 당강용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 농담은 재미있었지만, 방금의 농담은 별로입니다.”
“농담이 아니다. 네가 술에 독을 타지 않았기에 진실을 말해 줬건만. 허나 이 맛있는 술은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표정 나쁜 하인 놈이 달려오고 있으니.”
순간 당강용은 깜짝 놀랐다. 연락을 맡은 하인은 보통의 평범한 사람이다. 기감을 펼쳐도 느끼기 힘들뿐더러 사천당문 안에는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사람이 수백이나 있다.
그런데 어찌 그의 기운을 딱 집어서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설마 하는 마음으로 놀란 눈을 세 번 깜박였을 때, 그제야 당강용의 귀에 나무로 만든 복도를 달려오는 하인의 발소리와 기운이 느껴졌다. 공자의 말은 진짜였던 것이었다.
“헉헉헉, 분주님! 지금 당장 문주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아…… 알겠다.”
이제부터 계획의 시작이다. 그동안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당강용은 끝내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도 쓰여질 사천당문의 역사에서 자신이 하는 짓은 후대가 대대손손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강용은 기어이 눈을 뜨고 분연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