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천일영의 얼굴에 비웃음이 지어졌다.
“가볍다. 너무도 지나치게 가벼운 도다. 겨우 이것이 강한 도법이었더냐.”
“놈! 감히!”
당왕귀는 급격히 차갑게 식는 자신의 심장을 느꼈다. 불같은 공격이 허무하게 꺾이자 마음도 꺾일 뻔한 것이다.
그러나 당왕귀는 수십 년간 치열한 혈전을 벌여 온 노련한 무인이다. 다음의 공격을 어찌해야 할지 삽시간에 생각이 떠오른 당왕귀는 급히 몸을 빼내어 도를 다시 휘두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이…… 무슨!’
당왕귀의 얼굴에 당혹의 빛이 떠올랐다. 몸은 생각대로 빠르게 뒤를 향했지만 검은 천일영의 손가락에 잡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몸만 뒤로 빠지고 팔이 쭉 펴진 꼴사나운 광경. 얼굴은 이내 당혹의 빛 대신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쿠우웅.
당왕귀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며 강대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모든 내공을 최고치까지 끌어 올리지 않았었다.
숨겨 둔 한 수를 위해 모든 힘을 다 내지 않는 무림인들의 특성은 당왕귀도 마찬가지. 당왕귀는 자신의 숨겨 둔 실력을 모두 발휘하기 시작했다.
“놈, 그동안 봐주며 상대를 했더니 기고만장한 표정을 하고 있구나. 허나 내 모든 힘을 다 끌어내게 만든 것만은 칭찬해 주마.”
“칭찬? 너무 많이 들었던 거라 특별히 감흥이 없구나. 게다가 네놈이 나를 칭찬할 입장이나 되느냐.”
“뭐라?”
“하수 따위가 고수를 칭찬해 봐야 별로 기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개 놈의 새끼가!”
후화아아악!
당왕귀는 자신이 가진 모든 내공과 외공을 합쳐 도를 당겼다. 얼굴에 핏발이 곤두서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를 정도.
후우웅. 파가가가각.
당왕귀의 몸에서 나오는 내공이 주변을 잠식하며 나무가 기울고 풀이 눕기 시작했다.
곁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당강용의 몸도 흙먼지와 함께 뒤로 밀려났다. 다리에 내공을 집중시킨 당강용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것이 아버지의 진짜 경지. 감탄사가 입에서 토해져 나온다.
“아…….”
당강용이 감탄과 탄식을 동시에 토해 내는 순간이었다. 뜻밖에 응당 다음 공격을 시작했어야 할 당왕귀의 입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런…….”
모든 힘을 전부 내었건만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도. 당왕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도를 회수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했건만 끝내 단 두 개의 손가락에 잡힌 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주 조금만이라도 움직였으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보았을 것이다.
‘미동조차 하지 않다니.’
당왕귀의 눈동자가 황망함으로 물들고, 가슴속에서 불길한 느낌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채워 가는 불길함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고 당왕귀는 이를 악물었다.
휘이잉.
왼 손가락 두 개로 도를 움켜잡고 있는 천일영의 오른손이 도의 면을 향해 날아갔다.
까아아앙! 파자자자작!
믿기지 않았다. 일 장 길이에 일백오십 관의 무게를 자랑하던 도. 돈으로 환산해도 금화 오백 냥은 넘을 정도의 명도다. 그런데 이 거대한 명도가 눈앞에서 단 한 번의 장권으로 수천 조각이 되어 깨져 나간다.
후두두둑. 투두두둑.
당왕귀는 도의 손잡이만 든 채 두 눈을 끔벅였다. 머릿속에는 온통 부정의 생각만이 떠올랐다.
도가 부서진 것은 믿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검과 도가 부딪힌 것도 아니고 장권에 쇳덩이로 만든 도가 부서지다니, 무공의 법칙을 뒤흔드는 일이다.
검과 도가 왜 존재하는가. 손보다 물리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일이 가능해서는 안 된다.
“네놈은 아직도 모르는구나.”
“무엇을 모른다는 말이냐.”
“수공을 잊고 있다는 것 말이다. 사실 네놈은 검을 반만 뽑을 만큼의 가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네놈이 수공과 도법을 같이 사용했다면 그때 딱 반만 검을 뽑았을 만큼이었겠구나.”
“이런 미친 새끼가!”
당왕귀는 손잡이만 남은 도를 집어 던지고 암룡구궁신법(喑龍九穹身法)으로 몸을 급히 뒤로 빼내었다. 이것은 상대편과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함.
그는 사천당문이다. 바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당왕귀는 손가락에 비침 통 열 개를 꽂았다. 보통은 다섯 개만 손가락에 끼울 수 있는 비침 통을 열 개나 끼워 상대의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내는 당왕귀만의 비법이다.
“네놈이야말로 내가 사천당문의 초고수임을 잊고 있구나. 그까짓 수공이나 도법은 이제 됐다. 십오 년간 폐관 수련을 하는 동안 겨우 오 년 동안만 수련한 도법이다. 그러나 사천당문의 잊힌 비급 무공을 부활시키는 데 십 년의 세월을 바쳤다. 이제 그것을 네놈에게 아낌없이 퍼부어 줄 것이다.”
“호오? 기대되는구나. 언제 시작할 것이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냐?”
“놈! 어디서 그따위 말을!”
순간 당왕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살기는 더욱 날카롭게 변하고, 주변으로 마구 뿜어져 나오던 내공은 몸으로 갈무리되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기묘한 어두운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당왕귀의 몸에서 기묘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을 하자면 불꽃처럼 보이는 빛이었다.
“사천당문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약하고 모자란 선대들에 의해서 잊혀진 무공이기도 하지. 그것을 내가 되찾았다. 이것으로 네놈과의 싸움도 끝이다.”
“끝이 난다면 다행이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지루하던 참이다.”
“크하하핫. 입만 산 놈 같으니. 그 짜증 나는 주둥이부터 꿰뚫어 주마!”
순간 당왕귀의 몸에서 빛무리가 번쩍이기 시작했다. 당왕귀는 당용택과는 비교도 못 할 속도로 비침 통을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사천당문의 역사상 가장 강하고 흉포한 무공이다. 죽이기 전에 특별히 네놈에게만 말해 주지. 이 강대한 무공의 이름은…….”
“만천뇌우(滿天雷雨)냐?”
“이…… 이 망할 놈이! 그것을 어찌!”
“아니……. 그만큼이나 몸에서 번쩍거리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느냐.”
“놈!”
당왕귀는 당혹감에 붉게 물든 얼굴로 비침을 날렸다. 혼자 몸으로 날리는데, 그 수가 무려 삼천 개에 달했다. 순간 비침이 사방으로 퍼지며 번개와도 같은 뇌의 기운을 가득 담고, 새카만 밤하늘에 떨어지는 천둥과도 같은 속도로 천일영에게 날아갔다.
“망할 놈! 이것으로 끝이라 생각하지 말거라. 네놈은 뇌(雷)의 기운에 온몸을 꿰뚫려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죽을 것이다.”
당왕귀는 첫 번째 비침 삼천 개를 날리자마자, 어느새 손가락에 새로 끼운 비침 통 열 개로 또다시 비침을 하늘을 향해 날렸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비침은 당왕귀의 내공으로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고 사방으로 퍼지며, 뇌의 기운을 가득 담고 천일영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말 그대로 뇌우(雷雨). 뇌의 성질을 가진 비침은 상대편의 혈도를 뚫고 관통을 할 만큼 강력하다. 그리고 지금 그 강력한 비침은 사방에서 이십 장의 넓이로 천일영을 덮쳤다.
“수백 년 만에 되찾은 만천뇌우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네놈은 죽음으로 새로 만들 사천당문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런 말은 새로 만들고 난 후에나 하는 것이다.”
천일영과 당강용의 곁으로 뜨거운 바람이 몰려들었다. 당강용은 자신의 주위로 급격히 바람이 몰아닥치는 것을 느끼고 순간 얼어붙었으나 이내 눈치를 채고 서 있던 자리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분명 공자가 보낸 바람일 테니까.
휘이이이잉!
첫 번째 바람이 천일영과 당강용을 감싸고, 이내 두 번째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리고 세 번째와 연이어 네 번째 바람까지 불어닥쳐 겹겹이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파캉! 파지지지직.
순간 뇌의 기운을 가득 담은 비침이 첫 번째의 바람을 꿰뚫었다.
파지지지직!
순간 당강용의 마음속에 불안한 마음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만천뇌우라면 수백 년 전에 무림에서 당해 낼 자가 없다고 하던 전설의 무공.
그만큼 강한 무공인데 겨우 바람 따위로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리고 당강용은 이내 눈앞에서 만천뇌우가 두 번째 바람을 뚫는 것을 보고 급기야 침을 삼키기에 이르렀다.
휘이이이잉. 파지지지직!
순식간에 두 번째 바람도 뚫리고 연속으로 세 번째 바람까지 만천뇌우에 뚫려 나간다.
정면과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육천 개의 뇌우를 막기에는 역부족. 그리고 이내 비침은 네 번째 바람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비침은 비명과도 같은 고음을 쏟아 내며 바람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비침이 막 네 번째 바람을 뚫는 순간이었다.
휘이이잉! 후와와와왕!
만천뇌우가 네 번째 바람의 중간을 딱 통과할 때였다. 빠르게 돌던 바람이 급작스럽게 더욱 속도를 높이며 돌기 시작했다.
주변의 파편과 흙먼지, 그리고 풀까지 모두 빨아들인 바람은 급속하게 비침의 힘을 꺾어 나갔다. 그리고 바람은 힘을 잃어 가는 비침을 전부 집어삼키며 하늘로 높이 올라갔다.
“이…… 이건!”
하늘로 올라간 바람은 비침을 한곳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간, 허공에 떠 있던 비침 육천 개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어디론가 날아간 것인지, 아니면 온통 바람의 날카로운 힘에 견디지 못하고 서로 부딪혀 소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무려 십 년간이나 고생해서 되찾은 비기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한 당왕귀의 이가 갈렸다.
“마…… 만천뇌우가!”
“입버릇 같은 것이다만, 바람은 하수나 쓰는 것이라 좋아하지는 않는다. 허나 그조차도 꿰뚫지 못하다니 이것이 진짜 만천뇌우일 리가 없구나.”
“크윽! 놈, 만천뇌우는 네놈의 말대로 미완성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완성된 사천당문의 무공은 이제부터가 시작인 것을. 네놈은 검을 기어이 뽑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니.”
당왕귀가 또다시 손가락에 비침을 끼우자 천일영은 툭 떨어지듯 웃음을 지었다. 이번에는 양손에 무려 스무 개의 비침 통을 끼우는 것을 보고 비웃음과도 비슷한 웃음을 떨군 것이었다.
“이제 됐다. 네놈의 무공은 볼 만큼 전부 본 것 같구나. 나머지는 아들에게 맡기고 이제 쉬거라.”
“네놈! 검을 뽑지 못하겠느냐!”
순간이었다. 화를 참지 못하고 이성의 줄이 뚝 끊어진 당왕귀. 그의 몸에서 흉흉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선천진기까지 모두 끌어 올려 자신의 생명을 태우며 눈을 번득인다.
천일영은 그 모습을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포기하지 못하고 다 가지려는 사람의 눈빛. 수많은 미련을 담은 당왕귀의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던 천일영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훅.
콰직!
당왕귀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온몸을 떨었다. 아니다. 보지 못했다. 자신의 몸에 생긴 변고만 눈치챘을 뿐.
상대의 무공에 놀라서 떨리던 몸이 서서히 잦아들고, 이내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이 지나자 몸에 생긴 변고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경련이 일어난다.
주륵.
입에서 흐르는 한 줄기의 피. 그것은 당왕귀의 몸에서 흐르는 마지막 피였다. 혈관을 타고 빠르게 돌았어야 할 피는 이미 멈췄으니까. 당왕귀의 몸이 고요했다. 적막이 감도는 것처럼.
“네…… 네놈…….”
“아까부터 말했을 것이다. 수공을 잊고 있다고. 사천당문에는 삼양신장(三陽神掌)이나 비서장(飛絮掌) 같은 훌륭한 장법도 있건만, 잃어버린 무공이나 도법 따위에 정신이 팔려 있으니 네놈의 명줄이 짧아진 것이다.”
“크…… 크헉”
당왕귀는 천일영의 손에 들린 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심장.
당왕귀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에 뚫린 구멍을 보았다. 상대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쑤셔 넣고 심장을 움켜쥐며 그것을 밖으로 빼낼 때까지, 느끼지도 못했고 알아차리지 못하기까지 했다.
갑자기 눈앞에서 없어진 적이 피를 뿜어내는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고 다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는.
털썩.
당왕귀의 신형이 무너지며 땅으로 쓰러졌다. 사천당문의 가장 높은 자리에서 아들조차 도구로 생각하는 죄악의 대가를 치른 것처럼.
화륵.
천일영은 자신의 손에 든 당왕귀의 심장에 내공을 터트려 불을 붙였다.
아직도 잔경련을 일으키며 과거를 반복하려 피를 뿜으려는 심장. 하지만 이젠 끝이다. 심장은 불에 삼켜지고 근육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태워졌다.
이것으로 사천당문의 상징이 사라진다. 피를 부르는 과거의 관습과 낡은 유산은 그렇게 타올라 허공으로 재가 되어 날아갔다. 그것을 조금은 쓸쓸한 눈으로 바라보던 천일영이 당강용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두 명이나 되는 혈육의 죽음을 모두 목도하게 했다.”
“각오했던 바입니다. 무너지는 사천당문을 살리기 위해서는 누군가 해야 했을 일. 게다가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아버님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또한 아들과 딸까지 모두 잃었겠지요.”
“그렇게 생각해 주면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지겠구나. 나는 이제 네 아들의 몸을 고치러 가겠다. 사천당문의 문주가 된 네가 나와 함께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될 터.”
“알겠습니다.”
“당왕귀가 쓰러졌으니 본가의 사람들도 마음이 꺾일 것이다. 마무리 짓거라.”
“감사합니다, 공자님.”
훅.
천일영은 당강용의 아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