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천량도사는 잠시 하늘을 보았다. 잠시 자신이 망설인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놈들에게 생각하고 움직일 시간을 준 탓이다.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량도사의 입이 다물어지며 이를 악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뿌득.
순간 천량도사의 발아래 땅이 오 치 이상 파였다.
꽈앙! 꽈앙! 꽈앙! 꽈앙!
디디는 땅마다 움푹 파인다. 천량도사는 굉음을 울리며 신형을 쏘아 보냈다.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기에.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들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다.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겁탈도 모자라 불쌍한 소저들을 인질로 잡고 도망가는 것이냐.”
천량도사는 집요하게 처음부터 쫓던 사혈련 무인의 뒤를 따라갔다. 혼자 도망을 갔을 때도 자신보다 느렸던 놈이다.
헌데 지금은 소저 한 명을 둘러업고 도망을 가니 그 속도가 훨씬 느려진 것이었다. 천량도사가 놈을 쫓는 이유는 또 있었다.
약 올리듯 자신이 멈춰 설 때마다 같이 멈춰 서서 상황을 살피는 것도 괘씸했지만, 바로 놈의 발걸음이 다른 자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느린 것이었다.
각자 다른 길로 도망가기 시작한 놈들 중에서 눈에 띌 정도로 느렸으니 원한까지 포함하여 천량도사의 먹이가 된 것이었다.
타다다닷. 꽈앙. 꽈앙!
천량도사는 소저를 안고 도망가는 놈을 눈 열 번 깜박일 동안에 따라잡았다. 놈의 등이 보이는 순간, 천량도사는 다 잡았다는 안도와 동시에 분노도 치밀었다.
소저를 앞으로도 얼마나 농락할 생각이었으면 검은색 천으로 감싸 애벌레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둘러업은 것이었다.
게다가 입까지 재갈을 물렸는지 끙끙거리는 신음이 귀에 들어왔을 때 천량도사는 분노로 순간 이성을 잃을 뻔했다.
‘추악한 욕심이 네놈의 명을 짧게 만드는구나. 소저를 두고 도망갔으면 내 봐주었을 터인데.’
천량도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차츰 머리가 식은 듯 맑아지기 시작한 천량도사는 몸을 숙이고 한 번에 다리를 뻗었다.
파바박. 꽈앙!
천량도사의 신형이 한 번 더 튀어 나가자 이제 놈의 등이 바로 코앞이다. 겨우 일 치 정도의 거리.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다.
천량도사는 검을 뽑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의 목을 향해 날렸다. 검은 살기를 가득 담고 바람을 쪼개며 사혈련 놈의 목에 닿았다. 그리고 이내 검날이 파고드는 순간.
“크아아아아악!”
엉뚱하게도 사혈련 놈이 아닌 천량도사의 입에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비명이 튀어나왔다.
미칠 것만 같은 통증. 천량도사의 입에서 연이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 또 한 번의 비명이 터졌다.
“으아아아아악!”
뼈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잠식하듯 뼛줄기를 타고,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신형이 이내 앞으로 기울여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지면(地面).
천량도사는 어찌할 수도 없이 얼굴을 땅에 처박고 뒹굴기 시작했다.
콰당탕탕.
달리던 속도에 붙은 탄력으로 인해 천량도사의 신형이 땅바닥 위로 튕기듯 수십 바퀴나 구른다.
입안으로 흙이 튀어 들어가고, 팔꿈치와 다리가 흙과 돌에 쓸려 나갔다. 수없는 고통이 살과 뼈를 통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땅을 구르는 동안에도 천량도사의 머릿속은 온통 의문으로 가득했다.
‘어…… 어째서냐. 더 이상의 화살도, 몸의 균형을 잃게 만드는 함정도 없었다. 또한 무엇인가가 날아오는 기척조차 없었다.’
타앗. 파박. 타아악. 쿵.
지면을 튕겨 나가던 천량도사의 몸이 이내 멈췄다. 천량도사는 온몸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느끼며 욱신거리는 몸을 뒤로 눕히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급작스러운 일에 내공조차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땅바닥을 구른 그의 얼굴에 박힌 돌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타다다다다닥.
다 잡은 놈이 도망가는 발소리. 이제는 늦었다. 놈과의 거리가 너무 떨어져 버렸다. 이를 악물고 다시 쫓는다 한들 따라잡지도 못할 것이고, 무엇보다 구르며 다친 상처 이전에 급작스럽게 통증을 느낀 곳이 예사롭지 않았다.
“크으윽.”
천량도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통증이 시작된 곳은 지금도 미칠 듯한 고통을 주고 있었다. 천량도사의 손길이 고통으로 쑤시는 곳을 향했다. 바로 엉덩이였다.
“이…… 무슨…….”
천량도사의 손끝에 찌를 듯 만져지는 것.
“비침?”
천량도사는 자신의 엉덩이 양쪽에 꽂힌 비침들을 만지며 사색이 되었다. 한쪽 엉덩이에만 거의 오백 개의 비침이 꽂혀 있었다. 양 엉덩이를 전부 합치면 천 개쯤 되는 양일 터다.
‘미치겠구나. 그렇지 않아도 깊이 박혔는데 구르는 동안 살 속으로 파고든 것까지 많으니.’
천량도사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소름 역시 끼쳐 올랐다. 얼마만큼의 내공을 비침에 때려 박았는지 지금도 끊임없이 비침들이 살 속으로 파고들었다.
“흐아아아압!”
천량도사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도 최대한 내공을 끌어 올렸다. 비침을 몸 밖으로 밀어내기 위함이다.
천량도사는 빠져나오는 비침의 위치를 하나씩 살폈다. 대부분은 엉덩이에 박힌 것이지만 그중 일부는 등과 다리의 혈도에도 정확하게 박혀 있었다.
“이런 실력을 가진 자가 있다니.”
비침의 위치가 얼마나 절묘한지 천량도사의 심장이 떨린다. 일부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는 곳도 있었지만, 몇몇 개는 내공을 바로 쓰지 못하도록 혈맥과 기도를 가로질러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량도사는 자신이 당황해서 내공을 끌어 올리지 못하고 땅에 얼굴을 처박았다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비침 때문이었다.
“끄으으으윽.”
비침을 밀어내는 동안 천량도사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팠다. 아파도 너무 아팠다. 차라리 검에 살을 베였어도 이렇게까지 아프지는 않았을 터다.
투두둑. 투둑. 투두두두둑.
수백 개의 비침이 한 뭉텅이씩 바닥으로 떨어진다. 천량도사는 살 속에 박힌 비침을 모두 밀어낸 후, 흙바닥을 뒹구는 한 움큼의 비침을 집어 들었다.
천량도사는 자세히 비침을 살피는 동안 또 한 번의 의문에 빠졌다.
“마치 사천당문이 쓰는 비침 같구나. 허나 이렇게 얇고 긴 비침이 어디에서 날아온 것인가.”
천량도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감도 한계까지 펼쳐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기감의 끝에는 사방으로 도망가는 네 명의 사혈련 놈들만 잡힐 뿐 아무도 없었다.
“설마?”
천량도사는 문득 사천당문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의 이십 리나 떨어진 사천당문에서 비침이 날아올 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천량도사는 깨달았다.
“내가 벌써 사천당문으로부터 이십 리나 떨어진 곳까지 온 것인가.”
생각도 못 한 일이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와 있으리라고는. 천량도사의 얼굴에 침통한 표정이 흘러내렸다.
터덕. 터덕. 터덕.
천량도사는 미련 없이 성도의 입구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미 사혈련의 놈들을 응징하기에는 너무 멀리 도망간 놈들 때문에 침통한 표정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이십 리나 떨어진 곳까지 흘러나온 자신의 실책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게 더 다급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량도사는 한동안 산길을 더듬어 왔던 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십 리쯤 걸어갔을 때였다. 갑자기 멈춘 발걸음의 건너편에는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신형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자신이 따라오라고 했던 화산파의 제자 다섯 명.
그들이 모두 엎어진 채 기절해 있었고, 그들의 엉덩이에도 각각 천여 개의 비침이 꽂혀 있었다. 제자들은 얼마나 아팠는지 눈까지 까뒤집고 침까지 흘린 채 기절해 있었다.
천량도사의 입에서 허망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억하심정으로 이렇게 내공을 때려 박아 비침을 날린 것인가.”
천량도사는 기절한 제자들의 혈도를 짚어 깨우고, 서로 부축하여 엉금엉금 걷는 제자들의 발걸음에 맞춰 성도로 돌아왔다.
천량도사는 제자들을 의원에 맡기고 급히 객잔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이 들어 급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천량도사는 객잔 주인을 보자마자 다급히 입을 열었다.
“아까 도움을 요청했던 여인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 그것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말하게.”
“희한하게도 사라졌습니다. 갈아입을 옷을 주고 방에 들여보냈는데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길래 들어가 보았지요. 헌데 원래 입고 있던 찢긴 옷만이 남아 있고 방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인들이 걱정되어 찾아보았지만, 흔적조차 찾지 못하던 참입니다.”
“이…… 이런!”
천량도사는 급히 여인들을 찾기 위해 등을 돌렸다. 순간 당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며, 천량도사의 어깨로 뻗어 나오는 손이 있었다. 분명히 살기가 가득 섞인 기운. 천량도사는 이를 악물고 내공을 끌어 올리며 뒤를 돌았다.
장권으로 상대의 목줄을 때리고 그대로 이 일의 경위를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어딜 그냥 가십니까. 동전 칠십 개입니다.”
“뭐…… 뭐라?”
“옷값 말입니다. 여인들을 돌봐 주면 비용을 내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안 내고 튀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튀긴 누가 튄다는 말인가! 나 천량도사일세!”
“천량도사고 만냥도사고 동전 칠십 개나 내십시오.”
“끙. 알겠네.”
천량도사는 급한 마음에 은자 한 냥을 던지고 빠르게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성도 안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각각 골목에 서서 분주하게 웅성거리고, 여인들은 급히 집으로 발걸음을 하는 것이 한눈에도 보통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 듯했다.
천량도사는 길목에서 핏대를 세우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급히 다가갔다.
“실례하네. 혹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는가?”
“네? 지금 막 성도에 오신 모양입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사천당문 안에서 굉음이 울리고 비명이 터져 나왔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 성도 안에서는 난리가 났습죠. 사람들도 우왕좌왕하고 서로 어찌 된 것인지 묻기 바쁩니다요.”
“굉음과 비명?”
“네, 한 시진 동안 계속 난리였습니다.”
“망할.”
천량도사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사천당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천당문 앞에서 제지를 당하고 지금의 때에 이른 것이었다. 천량도사는 지금도 무슨 일이 자신에게 벌어진 것인지 얼떨떨하고 앞뒤가 가늠되지 않았다.
이렇게 맞추고 저렇게 끼워도 모두 아귀가 안 맞는 탓이었다.
‘사천당문이 벌인 일이라면 어찌하여 사혈련의 무인이 나를 유인한 것인가. 사천당문이 아무리 정도를 벗어났다 해도 그것은 전 문주 당용택이 있을 때의 일이다. 새로 문주가 된 당강용은 형의 잘못을 되돌리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그가 사혈련과 손을 잡았을 리는 없을 터. 또한 나는 무엇 때문에 유인을 당한 것인가.’
하지만 문제가 그것뿐이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는 또 한 가지.
‘어디에선가 날아온 비침. 누가 날렸는지도 모르고 혀를 내두를 만큼이나 정확한 비침이었다. 이런 것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은 이제 기껏해야 당강용 정도만이 남았을 터인데 내가 사혈련 놈들을 추적하는 동안 그는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아무리 생각을 해도 생각은 제자리를 맴돌고, 답이 보이지 않는 해괴한 일에 천량도사의 고심은 깊어만 갔다.
* * *
한 시진 후, 성도에서 삼십 리 떨어진 곳.
천일영이 자리한 곳에는 사귀진과 귀문살 무인 셋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천일영은 사귀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강간을 일삼는 패악한 놈이 된 기분은 어떠하냐.”
“푸하하핫. 좋습니다. 천량도사를 골려 주니 아주 속이 후련합니다.”
사귀진과 귀문살 무인 셋은 검은 천으로 돌돌 만 여인의 신형으로 다가갔다.
도망가기 편하게 천을 감아 놓기도 했지만, 두꺼운 천으로 가려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아우,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사귀진이 곱게 감긴 천을 하나씩 벗겨 내자 그곳에서 안과 혜, 그리고 금채홍이 신형을 드러냈다. 겁탈당한다고 했던 소저들의 정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