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여기 있다.”
“힘드셨을 텐데 빨리 구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바빠서 손이 모자라니 나라도 해야 하지 않겠느냐.”
천일영이 한 뭉치의 종이를 안과 혜 앞에 놓았다.
두껍지는 않지만 뭔가 중요한 내용이 적혀 있는 듯 심상치 않은 표정에, 곁에서 기웃거리던 당강용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것이 무림맹에게 다시 돌아갈 계책을 실행하기 위해 모은 자료입니까?”
“아니다.”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그게 무엇인데 공자님께서 그리도 힘들게 모으신 것입니까?”
“무림맹에 다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 무림맹이 제발 사천당문에게 돌아와 달라고 사정하게 만들 자료다.”
“아니! 그것이 무슨 자료이길래요?”
머리가 좋은 당강용이라도 종이에 적힌 내용이 무엇인지 바로 가늠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림맹이 사천당문에게서 가장 아쉬워할 것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답이 나오는 것 또한 사실.
“살생부(殺生簿)로군요.”
“그렇다. 너라면 명부(名簿)에 적인 이자들을 어찌하겠느냐.”
시험하듯 내용도 이야기하지 않고 묻는 공자의 의도가 당강용의 눈에 뻔히 보였다.
이 정도도 대답하지 못할 정도라면 문주의 자격조차 부끄러운 일이라는 의미.
당강용의 눈에서 이내 광채가 흘렀다.
무림맹의 목줄을 틀어쥘 살생부라면 몇 개로 나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라면 무엇일까.
서슴없는 대답이 당강용의 입에서 나왔다.
“죽입니다. 살려 둘 가치도 없고, 가문을 배반한 놈들을 용서할 이유도 없습니다.”
“나와 같은 생각이구나. 그렇다면 어떠한 방법을 택하겠느냐.”
“저희가 나서는 것은 안 됩니다. 살수를 고용하는 것이 가장 낫겠지요.”
천일영이 꺼내 든 살생부는 다름 아닌 사천당문이 멸문의 길로 들어섰을 때, 가문을 배신하고 다른 문파와 세가 품에 안긴 이십의 해독 전문가들이 적인 명부다.
팔랑.
당강용은 종이를 한 장씩 넘겼다.
그곳에는 자신도 잘 알고 있고 또한 오랜 시간 친분을 나눈 자들도 있었다.
한 장의 종이가 넘어갈 때마다 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찌 그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당강용은 마지막 종이를 넘기고, 이내 냉정하게 닫혀있던 굳은 입술을 열었다.
“최대한 빠르게 죽이는 것이 옳은 길입니다.”
“이 명부에 있는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너와 절친했던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더욱 죽여야만 합니다.”
“네 각오는 잘 알았다. 이 일은 귀문살에게 맡기도록 하지.”
“귀문살? 공자, 귀문살은 확실히 실력이 있는 집단이나 그 몸값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지금 저희 사정에는…….”
당강용의 말에 천일영은 안과 혜를 바라보았다.
안과 혜는 수만 장의 종이 더미에 파묻혀 있다가 문득 천일영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만 빼 들었다.
“사천당문의 수입을 늘리는 일은 어찌 되고 있느냐.”
“그게…….”
“말하기 곤란한 일이라 해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다. 숨김없이 말하거라.”
“전에 사천당문의 수입을 세 배로 늘리겠다고 했는데 그게 곤란할 것 같습니다.”
안과 혜의 말에 당강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가가 들어올 전각과 안과 혜를 위한 장원의 공사비를 생각하면 상당한 돈이 지급될 예정이다.
또한 무너진 사천당문을 바닥부터 다시 세우려면 만만치 않은 자금이 드는 것 또한 당연한 일.
허나 지금 사천당문은 탈탈 털어도 얼마 되지 않는 푼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혜와 함께 본가와 각 분가의 모든 장부를 조사했습니다. 그런데 돈이 지나칠 정도로 안 맞습니다.”
“그 금액이 얼마나 되느냐.”
“일단 사라진 돈이 많은데 그것만 얼추 계산해도 저희가 생각했던 세 배의 수입을 넘어섭니다. 이래서는 애초 예상과는 달리 여섯 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허!”
당강용의 입에서 탄식 섞인 헛바람이 나왔다.
무려 육 할에서 칠 할.
그 많은 돈이 빼돌려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강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약초와 해독 같은 일은 딱히 정해진 금액이 없으니 마음대로 부풀린 모양이군요. 게다가 분가가 상단의 경영을 맡고 있으니 돈을 빼돌리기도 쉬웠을 터입니다. 창피하고 한심한 이야기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사라진 돈의 행방은 얼추 정리되고 있습니다. 다시 거두기만 하면 됩니다.”
“거둔다 해도 피 묻은 돈이 될 테지요. 사천당문에 어찌 이리 피바람이 그칠 날이 없어진 것인지.”
당강용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무지 얼마만큼의 사람들을 더 죽여야 이 일이 끝날까.
“이 일은 당 문주 너에게 온전히 전부 맡기마. 안과 혜와 상의하여 빼돌린 돈을 회수하거라. 그리고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다.”
“말씀만 하십시오.”
“여기에 적힌 사람 오십 명을 데려오거라. 또한 안과 혜와 함께 전국에서 구해야 할 것이 있으니 빠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사람과 구해야 할 것?”
순간 당강용의 눈앞에 새로운 종이 뭉치가 놓였다.
한 장씩 종이를 넘기는 사이, 당강용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야 공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
무엇을 하던 사람이기에 이토록 머리가 잘 돌아갈까.
나이는 젊어 보이지만 하는 짓은 노련한 책사보다 더 지독하다.
한두 수가 아닌 다섯 수에서 열 수 이상을 보는 사람.
당강용은 머리의 식은땀을 손으로 훔쳐 냈다.
“아무리 바쁘게 움직인다고 해도 한 달하고 보름은 걸릴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무림맹이 두 눈 뜨고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남궁천이라면 이제 슬슬 정신을 차리고 사천당문의 목줄을 또다시 조여 오겠지.”
“무림맹의 손아귀를 벗어날 방도가 있으신 것입니까?”
“이미 이렇게 될 줄 알고 열흘 전에 편지를 보냈다. 그 사람은 지금쯤 이를 갈며 무림맹으로 찾아가는 중이겠지. 그가 한동안은 무림맹을 뒤집어 놓을 것이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조금 있으면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무림맹의 발목을 잡기에 부족할지도 모르지. 그래서 당 문주가 가야 할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천일영은 언제쯤 가는 것이 좋을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당강용의 얼굴을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종남파다.”
“……!”
놀라는 당강용의 표정을 바라보던 천일영의 얼굴에 사악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놀란 당강용도 어째서인지 입가에 그 웃음이 옮겨 붙었다.
그것은 안과 혜도 마찬가지였다.
방 안에 있던 네 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사악하고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나쁜 짓을 꾸미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 * *
제갈현은 호북성(湖北省)에서 강서성(江西省)으로 접어드는 산속에서 손을 툭툭 털었다.
“아이고 허리야.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안 아픈 곳이 없구나. 뭐 그래도 아직 산적 정도 손봐 줄 만큼은 되는군.”
제갈현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다섯의 산적을 발로 툭툭 쳤다.
세간에는 머리가 좋고 기문진법(奇門陣法)이나 토목기관지술(土木機關之術)에 능하다고 알려진 제갈세가지만, 무림세가라면 응당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에 몸을 드러내는 법이다.
남궁세가나 모용세가 같은 검의 명문가까지는 아니더라도 제갈세가 역시 자신의 몸 하나 정도는 지킬 만큼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다.
“역시 검을 가지고 오기를 잘했구나. 오래 익힌 소천성검법(小天星劍法)으로 일격에 산적들을 쓰러트리니 기분도…… 쿨럭, 쿨럭. 뭐냐, 저건.”
제갈현은 혼잣말을 하다 사레가 들려 기침을 토했다. 눈앞에 열 명의 산적이 추가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마음 놓고 있던 제갈현의 사레들린 기침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왜 안 돌아오나 했더니 이런 허약한 놈한테 당한 것인가. 약해 빠진 놈들 다섯이 두고 보라며 나설 때부터 알아봐야 했건만, 하물며 설마 이런 학사 같은 놈에게 당하다니 산적 체면이 말이 아니구먼.”
“이 학사같이 허약한 사람을 잡으러 열 명이나 몰려온 것인가? 산적이라고는 하나, 덩치가 아까운 일이로군.”
“원래 산적은 그런 거다. 그리고 산적은 말이 많은 놈을 싫어하지. 그러니 닥치고 일단 돈이나 내놔라. 그리고 네 몸뚱이는 쓰러진 놈들의 치료비로 팔아야겠다.”
“사십이 넘은 늙은 몸 팔아 봐야 얼마나 받는다고. 쪼잔한 놈들.”
스으윽.
제갈현의 검이 위로 천천히 올라왔다. 검에 스며드는 내공.
사실은 몸을 오랜만에 움직여 옆구리가 아팠지만, 제갈현은 애써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검보다는 머리를 굴리는 것에 자신이 있다지만 너희 정도는 내 상대가 아니다.”
“무림인이었나. 하지만 네놈이 모르는 것이 있다. 산적도 다 같은 산적이 아니라는 것이지.”
순간 제갈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적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 뒤로 일백에 달하는 신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삼백이 넘는 산적을 거느리고 있는 나, 팔만건의 이름도 들어 보지 못했느냐. 녹림 십팔 채 중 한 명인 것을. 이 산에서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말거라.”
“허허…… 나 제갈현이 이런 곳에서 곤경에 처할 줄은 몰랐군.”
“제갈현? 무림맹 군사 제갈현? 푸하하하하핫. 이놈아, 네놈이 제갈현이면 나는 천마신교의 천마다. 늙은 데다 미친놈이기까지 하니 이거 값도 얼마 못 받겠군. 애들아, 이놈을 당장 묶어라.”
“예!”
팔만건의 고함에 산적들이 제갈현에게 몰려들었다.
순간 제갈현의 눈이 백이 넘는 신형을 한꺼번에 훑었다.
‘역시 산적은 산적이군. 진형도 없고 오직 숫자만 믿는 것인가.’
제갈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제갈세가의 무공에는 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교적 무공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 외 다른 한 수가 숨겨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제갈현은 검을 넣고 소매로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팔만건이라고 했지?”
“그렇다.”
“얼굴과 이름 잘 기억했다.”
순간 소매 속에 있던 제갈현의 손이 뻗어 나갔다.
그 빠르기가 상당한 수준이라 팔만건은 제갈현의 뻗어 나오는 손을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피비비비비빗.
적엽비화(摘葉飛花). 제갈세가가 자랑하는 암기술이다.
수십 개의 비침이 서로 뒤엉키며 날아가자 앞줄에서 달려오던 산적 스물이 비명을 토하며 쓰러졌다.
“커헉!”
“쿠헥”
“크악!”
쓰러진 산적들은 눈을 까뒤집으며 입에서 거품을 토해 냈다.
첫 번째 줄의 산적들이 쓰러지자, 뒤를 따르던 무리의 발걸음이 일제히 느려졌다.
생각도 못 한 불의의 일격이 자신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암기술이라는 것을 알고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었다.
파팟.
순간 제갈현의 손길이 또다시 소매 속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산적들이 일제히 움찔한다.
“안 덤비느냐?”
“젠장…….”
산적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음을 아예 멈춰 섰다.
그러자 뒤에서 붉으락푸르락하던 팔만건의 얼굴에 핏대가 오르기 시작했다.
팔만건은 암기를 피하려고 부하들의 뒤에서 고개만 빼 들고 고함을 질렀다.
“네놈! 치사하게 암기를 날리다니! 당장 검을 뽑아라. 남자답게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
“검? 검이라면 이길 수 있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제갈현은 허탈한 웃음을 한 번 지은 후 소매에서 손을 빼고 검을 들어 올렸다.
이내 검에서 아지랑이 같은 검기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본 팔만건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보통 놈은 아닌 모양이구나. 허나 이 많은 수를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딱히 이길 생각은 없다.”
“뭐라고?”
“도망갈 거거든.”
순간 제갈현이 산적들의 옆으로 튀어 나가듯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