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05화 (106/270)

105화

“이건 제법 대단하지 않더냐.”

밤의 객잔은 낮과는 또 다른 정취를 자아내며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야명주와 횃불이 어우러져 풍기는 분위기가 천하일품이라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

그 모습이 과거 천마신교에서 검집이 달빛을 반사하는 밤과는 너무도 다르기에, 천일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작은 웃음을 지었다.

“오랜만에 걷고 싶은 밤이구나. 같이 가겠느냐.”

“원하신다면 어디까지든 따라가겠습니다.”

천일영은 객잔의 밖으로 나와 우차가 대기하는 곳을 둘러보고 산속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짐승들이 객잔에서 나오는 밝은 빛에 이미 몸을 피신한 지 오래된 듯 주변의 소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함이 마음에 든 천일영은 건청과 금채홍을 데리고 좀 더 깊은 산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고요함은 평생을 비명과 함께 살아온 천일영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때, 금채홍이 천일영의 옷깃을 잡으며 조용히 말을 꺼냈다.

“공자님, 아까 건청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희에게 공자님이 만드신 무공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구나.”

“어째서입니까? 저희가 배우기에 모자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너희는 종남과 아미파의 무공을 배워 오지 않았더냐. 내가 만든 무공과는 내가기공(內家氣功)부터 내공심법(內功心法)까지 모두 다르다. 또한 익숙한 보법을 바꾸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새로 배우는 것보다는 원래부터 익히고 있던 무공을 연마하는 것이 훨씬 효율이 높다.”

“그래도 배우고 싶다면요?”

“내 무공은 내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여러 무공의 장점만을 모은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배우고 싶다면 그리하도록 하마.”

“정말이죠?”

“꽤나 혹독하게 가르치게 될 것 같구나. 그리고 천마삼검(天魔三劍), 천마현신(天魔現身), 천마앙복(天魔仰伏), 천강혈룡검법(天降血龍劍法) 같은 마교의 무공도 가르쳐 주지.”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내가 만든 내공심법을 배운다면 지금의 기를 유지하면서도 마교의 무공을 배우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다.”

“에헤헤헤.”

금채홍이 웃는 얼굴로 천일영의 곁에 바짝 붙었다.

하지만 그때 고요하고 단란한 저녁의 한때를 방해하는 기감이 천일영에게 느껴졌다.

“건청아, 채홍아. 아무래도 손님이 오는 듯하구나. 그것도 한둘이 아닌 모양이다.”

“손님이요?”

“제법 재미있는 손님이구나.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손님으로서는 최악이라고 해야 하나.”

천일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꺼낸 지 반 각 후.

이내 금채홍과 건청의 귀에도 제법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데도 숲의 적막함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음은 기껏 열 명이나 스무 명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눈 세 번 깜박하자 이내 다급한 비명이 들려왔다.

“제발 좀 떨어져라, 이놈들아! 처음에는 이백이 따라오더니 어째서 점점 불어나는 것이냐.”

“죽여. 저놈을 잡아 죽여라!”

밤의 어둠을 뚫고 이내 다급한 신형이 보이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마른침을 삼키고, 굶주린 배를 움켜쥔 채 달려오는 사람.

그는 제갈현이었다.

“저 망할 놈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이야.”

“아시는 분입니까?”

“예전의 악연이다.”

천일영이 말을 끝마칠 때쯤, 제갈현이 반쯤 눈을 뒤집은 채 눈앞에 서 있는 세 명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도망가시오! 뒤에 산적들 수백이 따라오고 있소!”

“산적 수백이라.”

타닥.

천일영은 순간 미친 듯이 달려가는 제갈현을 잡아 세우려 손을 뻗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제갈현의 상판이 유독 거슬렸던 천일영은 일부러 목 아래의 옷을 잡아챘다.

이내 당겨지는 옷깃에 제갈현은 목이 졸려 고함을 질렀다.

“꿰애애애애액!”

“도망가지 말고 잠시 서거라.”

천일영은 제갈현의 돼지 멱따는 소리를 들은 척도 안 하고, 더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건청에게 집어 던지고는 금채홍에게 눈짓을 했다.

“잠시 멈추시지요.”

“시끄럽다. 네년은 뭐냐! 잔말 말고 당장 저놈을 넘겨라. 그리하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산적들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건청에게 붙잡혀 있는 제갈현을 덮치려는 순간, 그 앞으로 금채홍이 금룡참월하검을 들고 산적들을 가로막았다.

금채홍은 산적들을 향해 한 번 웃음을 지었다.

눈은 웃지 않는 채로.

“여기에서 더는 앞으로 못 가십니다. 이 앞에는 저희가 만든 객잔이 있거든요.”

“객잔? 우리 허락도 안 받고 그런 걸 만들었단 말이냐? 이것들이 미쳤구나.”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줄 알았으면 인사를 드렸을 텐데요.”

산적 두목 팔만건은 숨을 몰아쉬며 고운 자태의 금채홍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구름 속에 숨은 달빛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여인의 얼굴을 비추니 그야말로 절세의 미모다.

팔만건은 숨을 들이켜며 금채홍의 몸을 음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훑었다.

그러나.

그때, 금채홍이 금룡참월하검을 반만 뽑아내자 날 선 검날이 달빛을 반사하여 팔만건의 눈을 비췄다.

금채홍은 자신의 몸을 훑는 팔만건의 눈길을 검날로 돌린 후 서늘한 목소리를 내었다.

“허락이라면 지금 받아도 되는 것이겠지요?”

“네년이 지금 협박이라도 하는 것이냐.”

“협박은요. 어디까지나 허락입니다.”

금채홍의 서슬 퍼런 표정에 팔만건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시커먼 옷을 입고 있으니 숫자가 삼백이나 된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당연지사.

지금은 당당한 저 여인이, 산적의 수가 삼백이라는 것에 한 번 놀라고, 곧 끌려가서 겁탈당하게 될 처지가 되어 두 번 놀라는 모습을 상상하니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그때, 천일영이 팔만건의 은근한 표정을 눈치채고 제갈현에게 객잔의 불빛을 가리켰다.

“저기로 뛰어가라. 가서 건청이 보냈다고 하면 될 것이다.”

“아니! 당신들도 도망가야 합니다. 저놈들이 지금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그 수가 엄청납니다. 당신들도! 나도! 지금 여기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괜찮다.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고 있거라.”

천일영은 제갈현의 등을 한 번 밀고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건청과 금채홍에게 나직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처리해라. 다만 팔다리는 붙여 놓고.”

“알겠습니다.”

“네!”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건청의 신형이 튀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로 금채홍이 나풀거리는 비단옷을 휘날리며 금룡참월하검의 빛이 어둠을 갈랐다.

건청은 원래 검과 권을 같이 사용하는 무인.

검을 들지 않았지만, 독룡수(毒龍手)와 건곤산수(乾坤散手)가 바람을 찢으며 산적들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파앙. 퍼억. 콰직!

그야말로 뼈를 부러트리지만 않다 뿐이지 사지가 찢길 것만 같은 고통이 산적들의 폐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게다가 달빛을 반사하며 산적들 사이를 파고드는 금채홍의 검면이 인정사정없이 주변을 가른다.

달빛이 만드는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산적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른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빠악. 뻐억. 콰지지직.

순간 제갈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두 사람의 신형이 어둠 속에서도 제갈현의 눈에 선명하게 박히고, 이내 잔상이 되어 사라진다.

제갈현은 천일영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대…… 대단한 무인들이군요. 헌데 공자는 그냥 보기만 하는 것이오?”

“보다시피 나는 싸움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연약한 사람이라. 이런 비실비실한 몸으로 뭘 하겠는가.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고수다 보니 모든 걸 맡길 뿐이지.”

“듣고 보니 그렇군요. 내 공자가 말한 대로 객잔으로 피신해 있겠소이다. 큰 은혜를 입었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천일영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제갈현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객잔으로 뛰기 시작했다.

‘흐음,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인데 뜻밖에 좋은 것을 가져다주었구나.’

천일영은 삼백의 산적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노병천이 호북성에서 오는 길을 객잔으로 연결하고 싶은데 돈이 많이 들어 고민이 된다고 했던 말이 떠오른 까닭이다.

‘삼백 명이면 길을 만들고도 남겠구나.’

스르르릉.

검을 뽑는 소리와 함께, 이미 사십 정도에 달하는 산적을 쓰러뜨린 건청과 금채홍의 땀방울 사이로 서늘한 공기가 닿았다.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며 급속도로 한 방향을 향하는 바람을 두고 건청과 금채홍은 문득 천일영이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아직 몸풀기도 안 끝났는데 공자님이 마저 처리하실 모양인가 봐요.”

“산적 놈들, 차라리 우리한테 맞는 게 나았을 텐데.”

“명복을 빌어야 할지. 그런데 내공을 일으키셨을 뿐인데 바람이 몰려들다니 공자님은 정말로…….”

금채홍의 아련한 눈길이 천일영의 신형을 뒤쫓았다.

신속을 넘어서는 속도.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밀려났던 공기가 터트리는 굉음과 함께, 다시 밀린 공기가 자리를 찾아가며 세찬 바람이 불어닥친다.

휘이이잉. 콰앙! 파앙!

촤아아악! 퍼버버버벅. 파아아아악!

건청과 금채홍의 눈길이 황홀한 빛을 띠며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리 아름다운 검로를 그릴 수 있을까.

“크아아악.”

“커헉.”

“사람 살…….”

“꽤애애액.”

한 번의 검로가 그려질 때마다 산적이 삼십 명씩 날아간다.

사방으로 널브러지는 산적들은 눈 한 번 깜박일 사이에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자! 잠깐!”

“기다리시오!”

“살려 주시오!”

눈앞에서 날아가는 신형.

남은 절반의 산적들은 달빛조차 가르는 섬뜩한 검의 섬광에 온몸을 떨며 병장기를 집어 던지고는 무릎을 꿇었다.

건청과 금채홍은 천일영의 무공을 보면서 새삼 눈을 반짝였다.

“저런 무공이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해도 어찌 배우고 싶지 않을까요.”

“나 역시 동감이다. 저건 한번 보는 순간 헤어 나오지 못할 지경이니.”

검의 섬광이 잦아들자, 금채홍은 할 일이 없어진 금룡참월하검을 검집에 넣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자의 일검에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아팠는지 정신을 잃고 나뒹굴고 있었다.

다만 일부러 쓰러뜨리지 않고 남겨 둔 것인지 산적 두목 팔만건만은 여전히 이를 악물고 독기 서린 눈으로 천일영을 노려보았다.

“네놈, 감히 녹림 십팔 채의 채주 중 한 명인 나를 건드리다니. 녹림맹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녹림 십팔 채?”

“녹림 십팔 채를 관장하는 녹림맹에서 이 사실을 알면 네놈을 죽일 것이다. 또한 수만의 산적이 모여 네놈의 객잔을 태우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갈 터. 그러니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잘못했다고 사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 재미있겠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나는 녹림의 열여덟 번째 채주 팔만건이다. 네놈은 내 얼굴과 이름을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이군.”

“……!”

순간 팔만건의 관자놀이에 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눈앞의 계집 같은 놈의 말 따위 무시해도 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가진 말의 무게가 무거웠다.

팔만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거짓말이라니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하는구나.”

“개소리? 녹림 십팔 채의 채주 중에서 팔만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다.”

“뭐…… 뭐라고? 그걸 네놈이 어찌 아느냐.”

“과거에 그런 것을 아는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녹림의 산적 두목이라면 어느 정도 무공을 다루는데, 너는 삼류 무인도 못 되는구나. 산적이라기보다는 사기꾼이군.”

순간 천일영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산적 무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진 자부터 무릎을 꿇은 자까지 서로가 얼굴을 마주 보며 뭔가 이야기를 하던 중에 건장하고 키가 큰 산적 한 명이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다.

“공자, 팔만건이라는 이름이 정말로 녹림에 없습니까?”

“없다.”

다시 한번 산적 무리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웅성거림엔 아까의 혼란과도 같은 소란이 아니라 분노와 증오가 짙게 배어 나왔다.

한동안의 웅성거림이 계속되는 가운데, 수십의 산적들이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번 병장기를 손에 든 산적들은 팔만건을 향해 살기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두목, 녹림의 채주가 아니라는 말이 사실이오?”

“나는 분명 녹림의 채주다. 내 말보다 저놈의 말을 더 믿는 것이냐.”

“평소 이상하다고 생각했소. 두목은 매달 녹림맹으로 거금의 상납금을 보냈다고 했소. 그 덕에 우리는 굶주리고 겨우 입에 풀칠만 해도 다행이었지. 헌데 단 한 번도 녹림맹에서 전서구가 오거나 찾아온 사람이 없었소이다.”

“이놈들이 미쳤구나. 내가 너희를 거둔 것을 잊은 것이냐!”

“우리의 생활이 전보다 더 비참해진 것을 어찌 두목이 모르시오. 허나 두목은 날이 갈수록 잘살고 있더이다.”

살기와 증오는 산적들의 비틀린 마음으로 금세 스며들었다.

그것은 처음 몇 명부터 시작된 감정이었지만 이내 삼백의 산적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콰직!

어둠을 가르고 누군가가 날린 도끼 하나가 팔만건의 어깨에 박혔다.

“크악. 네놈들! 잠시 내 말을 들어 보아라. 사실을 말할 터이니, 제발!”

“진실이라면 진작에 이야기했어야지. 또한 두목의 목이라도 바쳐서 우리의 생명을 건져야겠으니 잔말 말고 목숨을 공양하시오.”

“으윽! 네놈들!”

콰직. 콰직. 촤아악.

차례대로 날아오는 수십 개의 도끼에 팔만건의 사지가 잘려 나갔다.

그 누가 몇 번이나 팔만건을 도륙하는지는 어둠이 숨겨 주었기에, 산적들은 마음을 다하여 모든 증오를 팔만건에게 풀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천일영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냥 한번 해 본 말인데 정말일 줄이야. 녹림 십팔 채 채주 따위 내가 알 리가 있나.’

천일영은 귀밑머리를 한 번 긁고, 건청에게 밧줄로 산적들을 묶으라는 말을 하고는 휘적휘적 객잔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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