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다음 날 객잔 개점일.
제갈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일개 객잔이라는 곳이 황실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은 둘째로 하더라도, 개점일이라는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면면(面面)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절강성과 사천성, 그리고 강서성의 승선포정사사가 와 있는 듯하고, 해남도와 절강성의 도지휘사까지 있는 것 같구나. 또한 근방의 각 고을 현령까지 빠짐없이 모여 있다니. 게다가 어째서 사혈련의 사람들이?’
제갈현의 눈길이 귀문살에게 향했다.
살기를 거두고 기운을 숨기고 있지만 분명 무림에서도 악명 높은 살생인(殺生人) 집단인 저들이 어찌 이곳에 있는지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알 수 없음이다.
심지어 포악하기로 유명한 사귀진과 무림 잔혹의 대명사 같은 유향설이 웃으며 다른 손님들과 섞여 이야기하는 장면은 기묘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객잔 주인인 저 계집 같은 남자가 설마 사파의 인간인가? 아니, 어제 나를 구해 준 남자와 소저는 분명 정파인의 기운이었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며 청초한 여인 한 명이 객잔으로 들어섰다.
달빛을 머금은 듯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제갈현은 심장이 멈추는 듯한 느낌에 잠시의 현기증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 미모에 놀랐지만, 여인의 뒤를 따르는 기운이 심장을 파고든 탓이었다.
‘이 기운은 분명 마교의 사람! 천마신교의 인간 중에서도 보통의 고수가 아닌 듯한데.’
분명 몸에 밴 피비린내에서 풍기는 예기가 귀문살보다는 못하지만, 이 여인도 만만치 않다.
제갈현이 뚫어지게 살피는 동안, 서하린은 천일영에게 다가가 깍듯하게 인사를 올렸다.
“공자님, 별유천지 분점의 개점을 축하드립니다.”
“급히 전갈을 보냈는데 용케 시간에 맞춰 왔구나.”
“그럼요. 감히 누구의 일이라고 제가 오지 않겠습니까.”
마교의 기운을 풍기는 여인이 믿을 수 없을 만큼이나 상냥한 얼굴로 객잔 주인과 대화를 나누자 주변의 사람들도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다.
제갈현은 더욱 심한 혼란을 느꼈다.
‘관과 군의 높은 사람들. 게다가 각 고을의 현령들에 정파인, 사파인, 그리고 마교인까지? 이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끼익.
그때 다시 한번 객잔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한 명의 중후한 중년인이 들어섰다.
그를 본 천일영이 반가운 마음으로 급히 다가갔다.
“어서 오시지요, 훈장님.”
“허허…… 이리 좋은 자리에 나까지 불러 줄 줄이야. 고맙구먼.”
“꼭 오셔야 할 분이 아니십니까. 오늘은 저와 차가 아니라 술을 한잔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네. 바라던 바일세.”
제갈현은 눈앞에서 정성을 다해 훈장을 모시는 천일영에게 또 한 번의 의문을 품었다.
승선포정사사나 도지휘사보다 더 깍듯하게 모시는 훈장이라니?
그런데 이후 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제갈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승선포정사사와 도지휘사까지 훈장에게 깍듯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아닌가.
‘이제 도대체 무슨 일인지. 대체 저 공자와 훈장이 어떤 사람이길래.’
그때, 제갈현의 머릿속에서 몇 가지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과거를 더듬던 짧은 사이, 제갈현은 숨이 넘어갈 듯 헛바람을 들이켰다.
제갈현이 떨리는 눈길로 훈장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기억났다. 저분은 분명 정1품 태사(太師) 어르신! 황제 다음으로 높은 자리에 계신 분이 어째서?!’
간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놀라 술잔을 떨어트릴 뻔한 제갈현이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자신을 향하는 지긋한 눈길을 느끼고 제갈현은 급히 고개를 들었다.
분명 살기나 예기와는 또 다른 위압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든 것이었다.
‘태사 어르신이 어째서 나를?’
태사와 눈이 마주친 순간, 제갈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빛이 말하는 뜻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차렸기에.
‘자신의 정체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게다가 내가 자신을 알아본 것을 즉시 알아차리고 눈빛만으로 경고를 보내다니, 역시 정1품 태사구나. 무서운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승선포정사사들과 도지휘사들의 태사를 대하는 태도가 이상하기는 했다.
모두 존경하는 눈빛으로 대하고 인사도 했지만, 보통의 행동은 일반 훈장에게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는 건 그들은 모두 태사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제갈현은 자신의 몸 전체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떨림을 주체하지 못했다.
목울대로 일렁이는 침이 한바탕 연속으로 넘어가는 동안, 제갈현은 이 기묘하고 기괴한 자리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지 끊임없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황제가 베푸는 연회가 아니라면 이 정도의 사람이 모일 리 없는 자리다. 그런데 어찌 저 계집 같은 공자의 객잔 개점에 천하를 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인가. 무림맹에서 초대한다고 할지라도 관무불가침을 핑계로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사람들이다.’
끊임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지만, 이내 한숨만 내쉴 뿐 제갈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이상의 것을 알기는 힘들 터다.
자신은 어젯밤 목숨이 구해지고 초대를 받은 처지.
하루 내내 산적들에게 쫓긴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뿐만 아니라 밥과 숙소를 제공해 주고 심지어 객잔의 개점식에 초대까지 해 주었다.
‘파고드는 것은 무리겠지. 하지만…….’
수상쩍은 느낌과 그의 오랜 예감이 계속 속삭이고 있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고. 정체를 숨기고 있지만, 객잔 주인은 분명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어떤 치부(恥部)를 가지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 그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 하는 권력자들과 어찌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응?’
그리고 그 순간, 제갈현은 눈앞을 지나는 사람을 보며 객잔 주인이 숨기고 있는 치부의 일면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어찌 여섯,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숨을 헐떡이고 진땀을 흘리며 음식과 술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의 신형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힘든지 핼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다 먹은 접시를 치우고 새로운 음식을 가져다 놓는 아이를 보며 제갈현은 측은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분노가 치밀었다.
‘어찌 저런 작은 아이한테 이런 힘든 일은 시킨단 말인가. 돈을 아끼려고 하는 짓이지 않은가. 이것이 저 공자의 본질인 모양이구나. 역시 뭔가 수상한 놈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제갈현은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빈 접시를 주방에 놓고 돌아오는 아이의 손을 잡아챘다.
“너같이 어린아이가 할 일이 아니구나. 저 공자가 밥은 제대로 먹이고 일을 시키는 것이냐.”
“밥이요?”
예서란은 제갈현의 말에 문득 어젯밤 기억이 떠올랐다.
일일이 입을 벌리라 하고 먹여 주는 밥.
열일곱인 자신을 일곱 살 취급을 한 굴욕적인 기억이 떠오르자 예서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심지어 일일이 손수 먹여 준 밥은 일어서지도 못할 만큼이나 많은 양이었다는 기억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물마저 핑 돌았다.
예서란은 어젯밤의 기억을 지우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본 제갈현의 가슴속에 불같은 화가 치솟았다.
‘이 망할 객잔 주인 놈이 겉으로는 높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어린아이를 푼돈으로 부려 먹고 밥까지 먹이지 않는구나.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라면 얼마나 오래 굶긴 것이냐.’
그때였다.
제갈현의 곁으로 걸어가는 나이 지긋한 사람 둘.
그런데 한 사람은 허리를 움켜쥐고 또 한 사람은 넋이 나가 뭔가를 중얼거린다.
“아이고…… 공자님의 벌이 가혹하구먼. 이 노인의 허리를 이 지경으로 만드시고 아직도 화가 안 풀리신 것인가.”
“나에게만 그것을 안 주시다니, 어찌 이토록 악독하단 말인가. 공자님은 정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구먼.”
두 노부의 한 맺힌 소리가 제갈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분명 공자라 함은 객잔 주인을 뜻하는 것일 터.
‘아이에게 밥도 주지 않고 노인들을 학대하기까지 해? 화가 났다고 노인을 때린 모양인데, 저렇게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라면 얼마나 때렸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한 느낌에 천일영을 주시하고 있었던 제갈현은, 평소 협과 도리를 중요시하는 성격까지 포함하여 불같은 화가 치솟았다.
제갈현은 결국 객잔의 개점일이라는 자리도 가리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공자! 당신의 악독한 행위를 더는 참지 못하겠소.”
“악독?”
“나 제갈현의 이름을 걸고 당신의 악행을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밝히겠소이다. 아이에게 밥을 주지 않고 노인을 학대하다니, 당신이 사람이오?”
순간 객잔의 사람들이 일제히 제갈현을 바라보며 굳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이 지난 후, 제갈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트렸다.
잠시 후.
제갈현은 벌게진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했다는 것이 밝혀진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나 하여 주변을 찾아보았을 정도였다.
‘저 망할 꼬맹이가 열일곱 살이고, 밥을 안 준 게 아니라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여서 고개를 가로저은 것이라니. 게다가 노인 둘은 큰 죄를 저질러 기껏해야 술을 안 주는 벌과 허리가 아픈데 약을 안 준다는 것뿐인가.’
일부러 허리를 아프게 했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노병천의 얼굴에 비웃음이 지어진 순간, 제갈현은 그야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애써 좋은 머리를 굴려 겨우 도착한 답이 헛다리라니.
‘되는 일이 없구나.’
제갈현은 애꿎은 술만 들이켜고 또 들이켰다.
끼익.
제갈현이 조금 술이 얼큰해진 상태로 무의식중에 문으로 시선을 향했다.
‘헉! 이건 또 난생처음 보는 미인이!’
제갈현은 하마터면 여인의 미모에 술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그야말로 천하제일의 미인.
제갈현은 술과 함께 여인의 미모에도 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기묘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절강성의 도지휘사와 해남도의 도지휘사, 그리고 절강성의 승선포정사사가 여인에게 달려가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닌가.
‘저 여인은 또 어떤 사람이길래…….’
제갈현은 버릇처럼 궁금한 것을 캐내는 성격 때문에 조금 전의 창피도 잊고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제갈현은 궁금증이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큰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늦게 와서 죄송해요. 객잔에 일이 생기는 바람에 제시간에 못 왔네요.”
“와 준 것만으로도 좋구나. 우리 여동생이 와 주니 정말로 기분이 좋다.”
“저야말로 오라버니가 매일같이 바쁘셔서 같이 있지 못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니 좋네요.”
“미안하구나. 곧 한가해질 테니 그때부터는 같이 있게 될 거다. 조금만 참아라.”
“오호호. 그럼 좋지요.”
그때였다.
곁에 있던 승선포정사사와 도지휘사뿐만 아니라 사파의 귀문살과 마교의 여인, 그리고 객잔에 있는 상당수의 사람이 여인의 곁으로 몰려들었다.
절강성의 빈민가에 막대한 돈을 풀어 구제하는 천이영의 명성을 모르던 제갈현은 그 장면을 보고 여전히 혼란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객잔 주인의 여동생? 그런데 왜 관과 군의 높으신 분들까지 저 여인에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평생을 살면서 이런 해괴한 광경을 본 적이 없는 제갈현은, 무림맹의 맹주인 남궁천조차 이 정도의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을 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군. 저 공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내 끝까지 저 공자의 정체를 파악해야겠구나.’
제갈현의 뱀 같은 눈이 천일영의 몸을 핥듯이 감았다.
이미 제갈현의 머릿속에는 무림맹의 일과 남궁천의 수상한 행동 따위 날아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