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하남성(河南省) 무림맹.
남궁천은 이른 아침부터 주변의 시끄러움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기감으로 느껴지는 거대한 기운들이 한결같이 무림맹을 향하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응당 정파의 사람들이라면 무림맹으로 발걸음을 하는 것이 문제일 리는 없다.
허나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은 고수가 무림맹으로 모일 리는 없는 것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에 무림맹으로 오라는 말은 한 적이 없을 터. 헌데 어째서…….”
남궁천은 급히 발걸음을 옮겨 일의 사정을 알아보려 했다.
그때 때마침 급히 복도를 달려오는 발소리가 남궁천의 귀에 들려왔다.
드르르륵.
“무슨 일인데 허락도 없이 문을 여는 것이냐.”
“그…… 그것이 지금 모든 구파일방의 장문인과 오대 세가의 문주들이 오시고 계십니다.”
“그것이라면 기감으로 알고 있다. 비록 모이라고 한 적은 없지만, 소란까지 떨 일은 아닐 것이다.”
“맹주님, 그 정도가 아닙니다.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분들뿐만 아니라 다른 문파의 분들도 오늘 사시(巳時)까지 온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다른 문파?”
급히 남궁천을 찾은 자의 떨리는 손이 들어 올려졌다.
그의 손에는 무려 이십 통이 넘는 편지가 들려져 있었다.
남궁천은 편지를 받아 들고 종이에 적힌 문파의 이름을 살펴보았다.
하나씩 편지를 넘기는 사이, 남궁천의 미간은 조금 전보다 더 깊이 파이기 시작했다.
“흑선문(黑仙門), 북두제검부(北斗帝劍府), 부용검파(芙蓉劍派), 단목세가(端木世家), 신창양가(神槍楊家), 광동진가(廣東陳家)……. 이것이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나는 소집령을 내린 적이 없다. 게다가 이 정도의 무림세가가 전부 모일 정도라면 정마대전이나 일어나야 가능할 일일 터. 누가 감히 소집령을 내린 것이란 말이냐.”
“그…… 그것이.”
“답답하게 굴지 말고 빨리 대답하지 못할까!”
“해남파 문주 설의룡이라고 합니다.”
“설의룡?”
순간 남궁천은 머리를 한 방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다.
분명 평소의 해남파라면 소집령을 내릴 권한도 없고, 또한 무림의 문파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도 없을 터다.
허나 지금의 해남파는 무림에서 그 어느 곳보다 관심을 받는 곳이다.
사천당문이 해남도에서 벌인 사건에 무림맹이 관련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곳.
남궁천의 입술이 크게 비틀렸다.
‘당했다. 설의룡 이놈, 그동안 조용하다 싶었더니만 이걸 노린 것이었나. 하필이면 제갈현도 없는 지금 오다니.’
남궁천은 그동안 설의룡을 죽이고 싶어도 해남파가 무림 전체의 관심을 받고 있던 터라 손을 대지 못했다.
설의룡의 안위에 문제라도 생기는 날에는 무림맹의 맹주인 자신이 설의룡을 노렸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많을 테니.
게다가 제갈현은 맹주인 자신의 허락도 없이 잠시 쉬겠다는 편지 한 장만 보내고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그리고 지금.
설의룡은 이번에도 무림 맹주인 내가 자신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수많은 무림의 문파와 구파일방에 연락한 것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 몰렸다 해도 지금에 와서 설의룡에게 손을 대기에는 보는 눈도 많고 시간조차 없는 형국이다.
남궁천은 머리를 움켜쥐며 비틀리는 마음을 주체 못 했다.
‘망할, 이 지경으로 속수무책일 줄이야.’
남궁천의 이마로 긴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 * *
무림맹의 계면법비별관(系勉法備別館).
수많은 사람이 모인 탓에 무림맹 본문의 건물을 사용하지 못하고, 급한 일이 아니면 그 문이 열리지 않는 별관에 자리한 사람들을 보며 남궁천은 한숨을 쉬었다.
특히나 기나긴 탁자의 끝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설의룡.
그의 눈빛을 읽은 남궁천은 이 일이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중원의 끝자락인 해남도에 박혀 있던 설의룡이 증거를 찾지 못했을 것 또한 사실.
남궁천은 웃음을 지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어찌하여 맹주인 제가 소집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모이신 것입니까. 분명 불미스러운 일이 무림맹에는 없을 것이라고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헌데 해남파의 문주가 보낸 편지에 이리도 화답하듯 모이셨으니 이 자리를 빌려 오늘이야말로 무림맹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그것은 일단 해남파 문주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결정할 일일 것이오.”
나직한 목소리지만 내공이 짙게 깔린 목소리가 남궁천과 계면법비별관에 모인 무인들의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무당파의 장문인 명선.
그가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장문인과 문주들은 동감하듯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순간 남궁천의 이가 뿌득 갈렸다.
‘저 빌어먹을 놈의 늙은이가! 뒈지지도 않고 평소 무림맹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더니만 기어코 일을 벌이는구나.’
남궁천은 자신의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했기에, 화가 끓어올랐지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설의룡은 남궁천의 웃음을 보고 마치 명계(冥界)의 사자(使者)와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부터 남궁천이 겪을 일은 지옥에서나 일어날 일이었으니까.
“비록 무림맹은 아니라고 하나, 참으로 많은 선물을 해남파에 내려 주셨소. 특히 사천당문 당용택의 아들 당추필에게 써 주신 무림맹 지원의 편지는 뜻깊은 선물이었지요. 내 등에 비침을 찌를 것이라고 생각도 못 한 채 편지에 찍힌 맹주님의 인장이 얼마나 믿음직스럽던지.”
“맹주의 인장이 찍힌 편지? 혹 설 문주께서는 그 편지를 이 자리에 가지고 오셨소?”
“편지는 제 손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추필이 그대로 가지고 갔지요.”
모용세가 문주 모세룡의 질문에 설의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는 설의룡의 실책과 같은 말에도 남궁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편지가 없어 증거가 있지 아니한 상황에도 아무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의 신용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말.
남궁천은 평정으로 가장하려고 했지만, 이내 설의룡의 다음 말에 눈썹을 치켜들었다.
“다른 증거라면 몇 개 있지요. 첫 번째는 바로 이것입니다.”
탁.
설의룡은 탁자 위에 여러 개의 비침을 올려놓았다.
그것은 당추필이 편지로 받아 설의룡을 죽이려 했던 비침.
남궁천은 그것을 보고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천마신교의 마왕이 사용하는 비침을 흉내 내 만든 것.
그것은 무림맹과 애써 연결 지으려 해도 무관한 물건에 불과할 뿐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화산파의 장문인 천백도사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설 문주, 그것이 어떤 경로로 들어온 비침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소이까. 설령 그것이 당추필이 가지고 있던 비침이라 할지라도 무림맹과는 무관하오.”
“그렇겠지요.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설의룡은 몇 장의 편지를 탁자 위에 올리고, 그것을 마음껏 볼 수 있도록 힘을 주어 탁자 한가운데로 밀쳤다.
“이 편지는 천마신교에서 보낸 것이오.”
“천마신교? 설 문주께서는 마교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말입니까?”
“평소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겠지요. 허나 이번의 일은 천마신교도 얽혀 있는지라 예민한 사항입니다. 천마신교는 이 일과 상관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유례없는 협력을 해 주었습니다. 그 편지는 사독마왕 갈현평이 직접 쓴 편지입니다.”
“정말로 마교에서 답신하다니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로군요.”
그러나 믿을 수 없다는 말과는 달리 장문인들과 문주들은 하나같이 돌려 가며 편지를 읽어 내렸다.
내용은 천마신교에서 사용하는 비침과 비슷하기는 하나, 형태가 미묘하게 다르고, 또한 길이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특히 천마신교의 비침은 끝에 뾰족한 부분이 조금 파여 있어 독을 머금기 좋게 되어 있는데, 해남파에서 보내 준 비침에는 그런 특성이 없다는 것도 쓰여 있었다.
그때, 마지막으로 편지를 읽은 소림사의 방장(方丈-소림사에서는 주지라는 이름 대신 방장이라는 이름을 사용함.) 태사명진이 팔락이는 종이를 접으며 말을 꺼냈다.
“천마신교에서 답신을 해 주었다는 것이 흥미를 돋우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증거로는 부족한 듯하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런데 천마신교에서 저희가 모르는 또 하나를 말해 주는 편지가 왔습니다.”
“또 하나의 편지?”
설의룡은 또 다른 편지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편지의 내용은 철에 관한 것입니다. 이 비침은 강도가 강하고 휘기 좋게 유연한 강철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허나 천마신교에서는 오직 십만대산에서만 채굴할 수 있는 흑철(黑鐵)을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바로 이것이 진짜 천마신교에서 사용하는 비침입니다. 이것도 사독마왕 갈현평이 보내 준 것입니다.”
탁.
탁자 위에 올라온 비침.
주로 독을 터트리는 것으로 사용해 온 천마신교의 비침은 오랜 시간 동안 비밀에 싸여 있었다.
그 형태가 구전처럼 소문의 형태가 되어 떠돌아다녀 대략적인 생김새쯤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물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천마신교의 비침은 흑철이라는 이름대로 검은색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것이 마교의 비침이라. 천마신교도 제법 급했나 봅니다. 비급이라 해도 좋을 비침을 보내 주다니요.”
“허허. 소문처럼 생기기는 했으나 그 형태가 많이 다른 것도 사실이군요.”
“설 문주 덕분에 귀한 것을 보게 되었소이다.”
웅성거림이 한동안 지속되고, 설의룡의 눈에는 점점 광채가 떠올랐다.
설의룡에게 자신감이 생길수록, 남궁천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점점 굵어지는 것을 보면서.
설의룡의 시선을 느낀 남궁천은, 마교의 비침에 정신이 팔려 있는 장문인들과 문주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제법 큰 목소리를 내었다.
“천마신교가 쓰는 비침이 어떻든 그것도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일부러 모양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지 않소이까. 철도 아무것이나 사용하면 설 문주가 가져온 것처럼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헌데 여기에서 다음 증거가 나옵니다.”
“뭐…… 뭐라고? 다음 증거?”
설의룡은 긴장하는 남궁천을 바라보며 편지 한 장을 또다시 탁자에 올렸다.
“이번에 사독마왕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천마신교가 있는 땅에서는 다른 종류의 철광이 없다는 것입니다. 강철이란 휘기도 하며 강도가 강하여 연검(軟劍)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 천마신교가 있는 십만대산 일대에서는 바로 이 강철이 나지 않기 때문에 연검도 없고, 또한 연검을 다루는 연검술도 없습니다. 헌데 이 가짜 천마신교의 비침은 바로 연검을 만들 때 쓰는 강철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마교 놈들의 말을 어찌 믿겠습니까. 놈들의 시커먼 뱃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남궁천의 목소리가 계면법비별관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설의룡은 지그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궁지에 몰린 쥐가 할 짓은 덤비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고양이처럼.
“십이 년 전 천마신교가 장강의 수로를 가지기 위해 전쟁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지 잊으셨습니까?”
“뭐…… 뭐라고?”
“물자입니다. 그중에서도 철 때문입니다. 십만대산 인근에는 철이 나는 광산이 거의 없습니다. 나오더라도 흑철 정도입니다. 철은 무기를 만드는 재료라 황실에서 거래에 제약을 걸어 두고 있지요. 따라서 마교는 상단을 거쳐 철을 사기는 하되, 많은 양을 사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귀주성 전투가 일어난 것이고요. 그것을 잊으실 리는 없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것을 모르지 않소. 허나 그것이 이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설 문주!”
남궁천의 발악에 가까운 고함에, 설의룡은 비릿한 웃음을 멈추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고 들어오너라.”
설의룡의 굳은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의 끝에 몇 명의 사람들이 거대한 짐을 들고 왔다.
열 개가 넘는 철 상자.
그들은 설의룡을 지나 탁자 위에 들고 온 것을 쏟아부었다.
촤아아악.
순간 남궁천의 눈에 경련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