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설의룡의 명령으로 탁자 위에 쏟아부은 것은 바로 강철로 만든 비침.
수많은 무림인이 앉을 만큼이나 긴 탁자 위를 한가득 메운 비침의 수는 수백 자루의 검을 만들어도 모자라지 않을 양이었다.
“해남도에 들어와 있던 이천 명의 간자들로부터 압수한 비침입니다. 나지도 않는 강철을 어렵사리 여러 번에 나눠 일부러 사들이는 수고를 천마신교에서 할 이유가 있습니까? 만약에 천마신교가 정말로 이 일과 관련이 있어 사천당문에 누명을 씌울 요량으로 강철 비침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왜 모양은 천마신교의 것을 그대로 썼겠습니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오.”
화산파의 천백도사가 말을 꺼내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설의룡은 장문인과 문주들의 눈빛을 읽고 더욱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강철은 호북성과 사천성 사이에 있는 철광산에서 나오는 것이라더군요. 평소 마교에서도 탐을 내는 강철인지라 친절하게도 갈현평이 산지까지 정확히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갈현평이 무림맹에 위해를 가하기 위해 만든 거짓말이 아니오! 어찌 그가 철의 산지까지 알겠소이까!”
“과연 그럴까요?”
순간 남궁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설의룡의 자신 있는 태도.
그것은 아직도 남궁천이 모르는 한 수가 남아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만큼의 강철은 황실의 허가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황실의 허가가 없이 살 수 있는 곳은 아마도 무림맹 정도겠지요.”
“허허. 설 문주, 설마 그 정도로 증거라 하는 것이오? 모든 것은 그저 정황만을 가리키는 것들뿐 아니오.”
“저도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던 중에 이런 것이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설의룡의 손이 허공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
모든 사람의 눈길이 설의룡의 손으로 모여들었다.
“몇 년 전, 사천당문이 호북성과 사천성 사이에 있는 강철 광산에서 사용한 전표의 기록입니다. 대략 계산하면 이곳에 쌓여 있는 강철의 양과 거의 동일한 양을 구매했습니다. 헌데 강철을 구매한 전장의 전표가 어디에서 발행된 것인지 확인해 보십시오.”
전표의 기록이 비침으로 가득한 탁자 위에 놓였다.
순간 모여 있던 장문인과 문주들은 서로 돌려 가며 전장의 전표를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강철을 사들인 돈이 무림맹에서 나왔다는 말인가!”
“어찌 이런 일이! 그렇다면 하오문에서 판매한 정보가 모두 사실이라는 말이 아니오!”
“맹주께서는 이 일에 대한 확실한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장문인들과 문주들이 토하는 비난의 소리가 남궁천을 덮쳐 왔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을 터.
남궁천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빌어먹을. 죽은 남궁서우에게 명하여 없애려 했던 전표 기록이 어찌 설의룡의 손안에 들어간 것인가.’
남궁천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그것은 바로 새롭게 사천당문의 문주가 된 당강용이 운신을 보존하기 위해 해남파와 손을 잡았다는 것이었다.
‘당강용, 이 개 놈의 새끼. 두고 보자. 내 꼭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니.’
남궁천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밖으로 나서는 설의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천의 시선에 비웃는 듯한 입꼬리를 보였다.
그리고 되돌리기 힘들 만큼의 혼란을 던지고 유유히 나서는 설의룡의 여유로운 모습에 남궁천은 이를 악다물었다.
‘사천당문 다음은 해남파다, 설의룡.’
하지만 남궁천은 기어이 쏟아지는 비난의 말과 책임을 지라는 말에 맹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 *
천일영은 기분 좋은 아침 햇살에 기지개를 켜며 객잔의 입구를 바라보았다.
절강성 승선포정사사 유의선과 도지휘사 척계광이 낸 입소문으로 객잔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손님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뿐인가.
강서성과 사천성의 승선포정사사까지 합세한 덕에 객잔에 오는 손님들은 대부분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
천일영의 곁에 있던 천이영이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객잔이 잘될 모양인가 봐요.”
“네 덕이다, 이영아. 네가 평소 가난한 자들을 돕고 선행을 하니 그 소문으로 이 객잔까지 잘될 모양이구나.”
“어머, 그럴 리가요.”
천일영은 오랜만에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천이영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오라버니가 손을 잡는 게 창피한 것이더냐.”
“아니에요. 어렸을 때는 그렇게도 오라버니의 손을 잡고 놀았는데, 너무 오랜만이라서 놀랐나 봐요. 하지만 따뜻하고 행복하네요. 오라버니가 오신 이후로 이렇게나 행복해도 되나 조금 무서울 정도예요.”
“나야말로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천이영은 천일영의 과거를 알게 된 이후로 더욱 애틋한 마음을 보이곤 했다.
지금도 천이영은 맞잡은 손이 떨어질까 하는 마음으로 천일영의 곁에 꼭 붙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의 불안감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오라버니가 갑자기 사라질까 하는 왠지 모를 무서움이 가끔은 잠을 설치게 했기에 천이영은 언제까지고 손을 맞잡은 채이기를 바랐다.
“미안하구나. 같이 가지 못해서.”
“어쩔 수 없지요. 혜령이가 많이 보고 싶어 해요. 그러니 빨리 돌아와 주세요.”
“두 달 후쯤이면 시간이 여유로워질 테니 그때를 기약하마.”
“네, 오라버니.”
천일영은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나는 천이영을 우차에 태워 건청과 함께 항주로 출발시켰다.
같이 있어 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마음 한 켠에 걸렸지만, 이미 벌어진 일의 수습이 끝날 때를 생각하며 애써 고개를 저을 때.
평소 같으면 천일영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타났을 금채홍을 대신해 엉뚱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공자님께서는 객잔의 주인이니 이곳에 계속 머무시는 것이겠지요?”
“무림맹의 책사 제갈현인가? 내가 객잔에 있는지 물어보는 것은 목숨을 살려 준 신세를 갚기 위해 술이라도 사려는 것인가.”
“술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인들 못 사겠습니까. 근데 공자, 내가 제갈현이라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어제 객잔에서 네가 제갈현이라고 소리치지 않았더냐. 나의 악행을 밝힌다고 했던가.”
“크윽, 그 이야기는 더 하지 말았으면 하오.”
제갈현은 어젯밤의 실책을 떠올리며 짜증 난 표정을 얼굴에 띠었다.
허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인은 제갈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더욱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그야말로 길가에 구르는 분변을 보는 것보다 더한 눈길이다.
“캑! 아침부터 재수 없게 제갈현의 얼굴을 보다니.”
“아니, 소저! 그 무슨 무례한 말을 면전에 대고 하는 것이오.”
“개똥 같은 무림맹에서 나오는 돈으로 잘 먹고 잘살아서 얼굴에 기름기 도는 것 좀 봐. 밥맛 떨어져.”
“허! 마교의 사람들은 어찌 이리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오.”
“겉으로 예의 차리고 뒤통수치는 게 일상생활인 놈이 뭐가 어째?”
그때, 천일영이 제갈현과 서하린 사이를 가로막았다.
서하린이 악담을 퍼붓는 것은 분명 본심 그대로인 것이 맞기는 하지만, 조금은 올라간 목소리의 높이가 알릴 것이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서하린은 천일영이 자신을 가로막는 사이, 그의 품속으로 재빨리 편지 한 장을 넣었다.
“벌써 가는 것이냐.”
“생각보다 일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출발할까 합니다.”
“언제 또 오느냐.”
“아마 두 달 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오거라.”
제갈현 때문에 짜증이 나 있던 서하린의 얼굴이 밝아진다.
기다린다는 말이 너무도 기뻤으니까.
서하린은 천일영의 곁에 바짝 붙으며 얼굴을 붉혔다.
“약속이 기억나신 거로군요?”
“아니, 기억 안 난다.”
“어째서 기억을 못 하시는 것입니까? 여자의 마음을 가지고 놀면 아니 됩니다.”
천일영은 서하린의 콧잔등을 한 번 튕기고 웃음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보아 와서인지 여자로는 보이지 않는 서하린이다.
“두 달 후에 온다는 약속이나 잘 기억하거라.”
“쳇, 그때까지는 약속을 떠올려 주십시오.”
“생각나면 말해 주마.”
서하린은 천일영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제갈현을 노려봤다.
부드럽던 서하린의 눈매에 표독스러운 살기가 가득 맺혔다.
“무좀에 치질도 걸리고, 온갖 피부병에 시달리다가 계단에서 굴러 팔이나 부러져라.”
“뭐! 뭐라?”
훅.
천일영은 서하린이 신형을 날린 방향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한결같고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악담을 입에 달고 살지만, 낯을 가리는 성격도 변함없어 할 말만 하고 재빨리 도망가는 것이 서하린답다.
‘하지만 아무리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봇짐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 것까지 변하질 않는다니. 그러다간 제갈현보다 네가 먼저 무좀에 걸릴 거다.’
천일영이 서하린의 잔상을 바라보다 이내 몸을 돌리자 식식거리며 분노에 가득 찬 제갈현의 얼굴이 보인다.
천일영은 제갈현과 과거 얽혔었던 악연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귀주성 전투 때 사천당문이 가장 앞장서고 뒤에 종남파가 따라왔었지. 그때의 진형은 제갈현이 만든 것일까? 제갈현이 사천당문의 일과 관련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듯하군.’
하지만 천일영은 제갈현을 떠보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수나 하는 짓.
또한 제갈현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바다.
천일영은 제갈현에게 조금 깐깐한 표정을 지었다.
딱 객잔 주인의 가면을 뒤집어쓴 얼굴.
“근데 제갈현께서는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 것인가? 어제까지 먹고 잠잔 돈을 받을 생각은 없지만 이제 슬슬 나가 줘야겠군.”
“아!? 공짜로 계속 있을 생각은 없소이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도 있는데 어찌 내가 날로 먹겠소. 다만 당분간은 여기에 거하며 공자에게 은혜를 갚을 방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 싶군요.”
제갈현은 서하린 때문에 화가 난 얼굴을 숨기고 천일영에게 웃는 얼굴을 비췄다.
그야말로 끈질기게 달라붙어 천일영의 정체를 파악할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노련한 제갈현이 겉으로 드러나게 행동을 할 리는 없었다.
허나 그것이 오히려 천일영이 노리던 것이었다.
‘당분간 이곳에 있다는 말은 무림맹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구나. 무림맹은 지금 사달이 나 있다. 그것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인데.’
천일영은 짐짓 장사꾼과 같은 얼굴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은자 10냥짜리 객실과 동전 2냥짜리 객실이 있다. 어디에 묶을 것이냐.”
“은자 10냥짜리 객실이 좋을 것 같군요. 머리도 식힐 겸 여기에서 좋은 경치를 둘러보며 생각에 잠길까 합니다.”
“그렇군. 나는 볼일이 있어 밖으로 나갈 것인데 한 달 후에나 올 것이다. 그때까지 제갈현께서 여기에 있지는 않을 테니 지금 보는 것이 마지막이겠구나.”
“허허……. 아쉽습니다. 목숨을 살려 주신 은혜도 갚지도 못했는데. 나중에 반드시 갚겠습니다.”
천일영은 자신이 한 달 후에나 온다는 말에도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짓는 제갈현에게 고개만 한 번 끄덕이고는 등을 돌려 금채홍을 찾으러 발길을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천일영이 평수찬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는 제갈현이 동전 2냥짜리 객실을 숙소로 정했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잘 먹혔구나. 감이 좋은 제갈현이 내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할 것은 알았지만 설마 한 달을 기다릴 생각까지 한다니. 당연히 한 달을 기다리려면 은자 10냥짜리 객실은 부담이 되겠지. 이걸로 일단 남궁천과 제갈현의 사이가 틀어졌다는 것은 알겠다. 그리고 아마도 제갈현은 사천당문과 아무런 관련이 없겠군.’
천일영은 금채홍과 사천성으로 나가기 전 평수찬에게 짧은 말을 남겼다.
“두 달 뒤에 돌아올 것이니 노병천과 함께 객잔의 운영을 잘하거라.”
“그리 오래 자리를 비우십니까? 객잔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 평수찬,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
“맡기마.”
천일영은 일부러 제갈현에게 한 달 뒤에 온다고 말했다.
그러니 한 달이 지나고도 다음 달까지 내내 자신을 기다릴 제갈현을 생각하며 한 번의 웃음을 짓고, 천지일축공으로 금채홍과 함께 사천성을 향했다.
제갈현은 자신을 기다리느라 무림맹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에 비틀린 남궁천의 얼굴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