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보름 뒤 호남성(湖南省) 형산(衡山).
사귀진과 유향설은 형산파에서 숨겨 둔 사천당문 무인을 죽이고 오십 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있는 조그만 객잔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그다지 내키는 마음은 아니었지만 이미 들이켜고 있는 술병은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일곱 병이 넘어간다.
그때, 객잔의 문이 열리며 흑색의 무복을 입은 남자 셋이 들어섰다.
“단주님, 맡기신 일은 전부 끝냈습니다.”
“수고 많았다. 너희도 앉아서 술 한잔하거라.”
“예.”
몸에 밴 피비린내.
다섯 명의 귀문살은 실제로는 나지 않는 피 냄새를 씻겨 내기라도 하듯 술을 들이켰다.
다 마신 술잔이 탁자 위로 떨어질 때, 귀문살 중 한 명인 황준서가 입을 열었다.
“단주님,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하게 술을 마시고 있어도 됩니까? 임무를 마친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입니다. 추적이라도 오면 저희만으로는 형산파의 기세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괜찮다. 놈들은 오지 않을 테니. 너희들이 임무를 하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쫓긴 적이 있느냐.”
“없습니다.”
“이 일은 무림에서 알려지지도 않고 그대로 묻힐 것이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겠지.”
사귀진과 유향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귀문살이 따로 전국을 누볐다.
그리고 보름 동안 이십의 사천당문 무인들을 죽였다.
그 누가 보아도 떠들썩할 만한 일이지만 무림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단주, 사천당문 무인들은 철저하게 여러 조각으로 잘라 죽이고, 그 외에는 독침을 날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키는 놈들을 독침으로 죽이는 데 그 독이 사혈련의 싸구려 독이고, 사천당문의 무인들은 도법이나 검법을 쓰지 못하는 데 반대로 조각이 나서 죽어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역시 그런 것입니까?”
“그런 거다. 술이나 마시자.”
다섯의 귀문살 무인들은 오늘따라 유난히 쓴 술을 입안으로 가득 넘겼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협과 도리를 저버리는 것은 절대 악이라고 하는 도교의 형산파조차 사천당문의 무인을 빼돌렸으니 어찌 술이 쓰지 않을까.
또한 그들은 이번의 사건을 입 밖에 내지 않고 묻어 버릴 터다.
귀문살은 이번의 임무로 사혈련인 자신들조차 착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어 또 한 번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 * *
천일영은 안과 혜, 그리고 금채홍, 당강용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무공 수련을 하는 안과 혜가 너덜너덜해진 표정으로 밥을 들이켜다시피 먹는 모습.
금채홍에게 두들겨 맞아 온몸이 멍투성이지만, 짧은 시간만으로도 안과 혜의 무공은 일취월장해 있었다.
천일영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고생 많았다. 전에 이야기한 대로 물건은 다 사들인 모양이구나.”
“물론입니다. 산지부터 시장에 나오는 것까지 전국에 있는 것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사들였습니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다면 이제 슬슬 마무리를 지어 볼까.”
당강용은 젓가락을 입에 넣다가 문득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벌어질 일이 얼마나 무섭고도 큰일인데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툭 던진다.
당강용은 내일부터 벌어질 일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종남으로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저도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아직 주문한 물건이 오지 않았구나. 모레쯤 도착한다고 하니 그때부터 준비하거라.”
“공자님, 또 무슨 음험한 생각을 하시길래 그런 표정이십니까.”
당강용의 얼굴이 씰룩거렸다.
천일영이 보이는 얼굴은 나쁜 생각을 잔뜩 할 때 짓는 표정이었기에, 전처럼 그 표정이 또 자신의 얼굴에 옮겨 붙을까 생각한 당강용은 천일영에게 은근한 표정을 내비쳤다.
“공자님처럼 단정하게 생긴 분께서는 악당 같은 얼굴이 어울리지 않으실 거로 생각했습니다만, 제 생각이 틀린 모양입니다.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요. 혹시 나쁜 사람이었습니까?”
“나쁜 사람이라. 뭐, 예전부터 지금까지 여전하지. 그리고 악당답게 기왕 무림맹의 발목을 묶기로 했으면 철저하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과거 무림맹이 사천당문을 움직여 종남을 노린 것처럼 다른 문파에 접근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을 막으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님,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무림맹에 속해 있는 문파들은 모두 선을 가장 먼저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종남을 치는 일에 선뜻 손을 내밀겠습니까.”
“아마 이해관계만 맞으면 그리할 거다. 이번의 일을 못 보았느냐. 사천당문이 멸문할 것 같아지자 가장 먼저 무인들을 빼돌린 놈들이 명망 높은 세가들과 정의를 실천한다는 도교 놈들이었다.”
“…….”
딱히 당강용은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정말로 공자의 말대로 그러했으니까.
형산파를 필두로 상당수의 오악검파, 그리고 모용세가부터 단목세가까지 이름이 높은 곳부터 무인들을 빼돌렸다.
“내 소원이 무엇인지 아는가, 당 문주.”
“소원이요? 이미 다 가지신 분이 욕심도 많게 또 소원이 있으십니까?”
“내 소원은 여동생이랑 조카, 또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놀고먹는 것이다. 마음 편히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것이 내 소원이니, 무림맹도 움직이지 못하게 발을 묶고 이제 백수의 길로 가련다.”
“참 거창한 소원입니다. 그런 소원이 이루어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꿈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러니 내가 그 소원을 이뤄 볼 참이다.”
천일영은 기지개를 켜고 금채홍을 바라보았다.
이제 식사 시간이 끝났으니 다시 한번 안과 혜를 땅바닥에 기도록 만들 시간.
금채홍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안과 혜를 보며 사악하고도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안과 혜가 떨든 말든.
* * *
열흘 뒤 섬서성(陝西省)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종남파.
종남의 장문인 청강은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을 애써 좋은 눈길로 바라보려 애썼다.
속에서는 불과 같은 화가 솟아나고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온몸을 갉아먹듯 파고들었지만, 종남파의 장문인이라는 자가 곤란한 문제를 일으킬 수는 없는 법.
그러나 웃는 표정을 지으려고 할 때마다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청강은 빨리 이 불편하고 화가 나는 자리를 끝내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천당문의 문주 당강용께서 어찌 이리 누추한 종남까지 오셨는지요.”
“과거에 관해 이야기해 볼까 해서입니다.”
“과거?”
청강의 눈매가 위로 솟구쳤다.
사천당문이라면 응당 피하고 싶을 문제를 갑자기 화두로 꺼낸 것이 이해가 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청강과 같은 청자 배를 사용하는 청운이 큰 목소리를 꺼내었다.
“당 문주께서는 과거 사천당문이 무림맹을 이용해 종남을 멸문시키려 했던 일을 다시 꺼내려는 것인가! 사천당문이 무슨 낯짝으로 그 일을 다시 말하는 것이오. 그딴 이야기나 할 것이라면 당장 나가시오.”
“과거에 있었던 일은 제 형님인 당용택이 지은 죄. 그러나 사천당문의 새로운 문주가 된 제가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듭을 지어? 어찌 매듭을 지을 생각입니까? 사과 한마디 하면 죽은 전 장문인 청진과 종남의 무인들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필요 없으니 당장 꺼지시오!”
그때, 청운을 말리는 청강의 손이 올라왔다.
청운은 잠시 한숨을 들이켜고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청강은 씩씩거리는 청운을 뒤로하고 다시 한번 웃음으로 마음을 숨겼다.
“사실 제 생각도 청운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려운 발걸음을 하였으니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보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제가 발걸음을 돌리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청강의 눈매가 당강용의 얼굴을 훑었다.
사과하러 온 사람의 표정이 맞기는 하나, 그 뒤에 뭔가 또 다른 볼일이 있다는 듯한 얼굴이다.
‘아니, 일부러 알아보라고 보이는 표정이다. 뭔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청강은 애써 짓고 있던 웃음을 깨끗이 얼굴에서 거뒀다.
“말해 보시오.”
“먼저 제가 이곳에 온 첫 번째 이유. 사죄입니다. 비록 제가 전 문주께서 저지른 일을 몰랐다 하여도 이것은 사천당문에서 책임져야 할 문제. 부디 용서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당강용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그 모습을 본 청강과 청운, 그리고 방에 있던 종남의 고수들은 크게 놀랐다.
한 가문의 문주라는 자가 무릎을 꿇고 고개까지 숙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한 탓이다.
그것도 천하제일 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문의 문주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의 종남 정도는 얼마든지 무시해도 좋고, 또한 실체가 모호한 과거의 사과 따위 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터였다.
“사천당문의 죄를 대신하여 사죄의 말을 올립니다.”
“허허……. 당 문주가 이리도 진심을 가슴에 품고 오셨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고개를 드시고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청강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세가 떨어져 힘이 빠지고 화산파에 밀려 쓰러져 가는 종남파에 고개를 숙일 정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청강은 직접 몸을 일으켜 당강용을 의자에 앉혔다.
“당 문주, 고맙소. 이런 사과를 받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소이다.”
“아닙니다. 사천당문으로 인해 죽은 종남의 무인이 얼마인데 이 정도의 사과로 끝내겠습니까.”
당강용은 고개를 뒤로 돌려 제법 큰 소리를 내었다.
“가지고 들어오거라.”
“네.”
문이 열리고 사천당문의 무인 넷이 커다란 철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
네 명이 들기에도 제법 무거운지 땀을 흘리며 탁자 위에 올린 무인들은 즉시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섰다.
“사천당문의 성의입니다. 받아 주십시오.”
“이것이 무엇입니까?”
“직접 열어 보시지요.”
당강용의 웃음에 청강은 짐짓 함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소한의 인원만으로 종남파를 찾은 당강용이다.
끼이이익.
철로 만든 경첩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열리자 방에 있던 종남의 고수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철로 만든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금화.
그것도 얼마인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의 거금이었다.
“금화 이천 냥입니다.”
“이…… 이천 냥?!”
청강의 입이 쩍 벌어졌다.
작금의 종남은 한 해에 겨우 금화 오십 냥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것도 제자를 받아들이고 섬서성에서 생기는 사건을 해결하여 수고비를 받아 생기는 돈이 아니었다.
무공을 익히려는 아이들은 거의 모두 명망 높은 화산파로 들어가고, 수고비를 받을 일 또한 대부분은 화산파에 빼앗기고 있으니까.
종남파가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은 속가제자들이 조금씩 돈을 보태어 보내 주는 것이 주 수입원이었다.
“이런 큰돈을 어찌 당 문주께서!”
“말로만 하는 사죄 따위 소용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받아 주시지요.”
“이것 참,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녹슨 검으로 무공을 수련하는 제자들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돈이면…….”
“장문인, 그럴 것 같아 사실은 선물을 하나 더 준비했습니다. 저하고 잠시 밖으로 나가시지요.”
청강은 청운과 다른 종남의 어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종남파의 입구까지 당강용과 같이 간 청강은 눈앞에 놓인 정체 모를 것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우차? 그것도 열 대씩이나 있으니 무엇을 가져오신 것입니까?”
“이 역시 직접 열어 보시지요.”
청강은 깨끗한 비단으로 덮여 있는 우차로 다가갔다.
아마도 쌀이나 먹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러나 청색의 깨끗한 비단을 거둔 청강은 떨리는 눈을 주체 못 했다.
“이것은!”
“검과 병장기입니다. 이것 또한 사천당문의 성의이니 받아 주십시오.”
청강은 한 자루의 검을 뽑아 들었다.
햇빛에 반사된 검날의 결을 보니 보통의 검이 아니다.
비록 최고급은 아닐지라도 하나에 은자 열 냥 이상에 거래가 될 만큼의 검.
지금 종남에 있는 검보다 몇 배는 더 좋은 검이었다.
“당 문주,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감사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차에 덮여 있는 비단은 최고급품입니다. 이것으로 장문인을 비롯하여 종남의 어르신들께서는 옷을 해 입으시지요. 오십 벌 정도가 나올 양입니다. 일부러 종남의 도복 색인 청색으로 사 왔습니다.”
“비단옷…….”
청강은 순간 이것이 죽은 청진이 보낸 선물인 것만 같았다.
청강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종남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절절한 감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