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생각지도 못한 사천당문의 행보에 남궁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넘겨서는 안 될 전장의 전표 기록을 설의룡에게 넘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을 터다.
분명 지금의 사천당문은 세간의 인식이 극악으로 치닫는 시기.
그런데 어찌하여 그런 사천당문이 움직였다는 말인가.
“오늘 아침에서야 저도 알았습니다만, 사흘 전부터 사천당문이 구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천성을 기준으로 전국으로 넓혀 가고 있는바. 현재 섬서성, 광주성, 호북성 등에 빈민 진료소를 지어 치료에 나섰습니다. 또한 여럿의 사천당문 무인이 의원들과 함께 전국으로 퍼져 나가고 있어 앞으로 이십 일 후를 기점으로 중원 거의 모든 곳에 진료소를 만들 것으로 보입니다.”
“구호 활동? 놈들이 가당찮은 짓을 하는구나. 하오문에 빈민 진료소 위치도 함께 의뢰하거라. 낭인 신분의 무인을 여럿 고용하여 그곳을 급습하고, 사천당문 놈들과 환자들까지 죽여 다시는 사람들이 그곳을 찾지 못하도록 하면 해결될 일이다.”
“불가합니다.”
“뭐라?”
사마정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보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사천당문의 약사들과 의원들은 모두 종남의 호위를 받고 있습니다.”
“뭐라고?! 종남?”
남궁천의 뺨에 잔경련이 일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것도 하오문에게 맡겨 알아내거라. 수백 냥의 금화가 더 든다 해도 상관없다.”
“예.”
사마정이 물러서자 남궁천은 식은 차를 입에 가져다 댔다.
‘미칠 노릇이다. 설의룡이 터트린 사건이 딱 조용해지는 시점이다. 헌데 미리 알고 있는 듯 연이어 터지는 일이 과연 우연인가. 혹 모든 것을 뒤에서 움직이는 자가 있다면…….’
남궁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런 자가 세상에 존재한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일이다.
마치 중원의 가장 높은 산에 올라 천하를 내려다보는 듯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럴 리가 없음을 그 누구보다 남궁천은 잘 알고 있다.
사천당문이 종남을 어찌 회유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변하는 것은 없었다.
전에는 사천당문이 멸문하고 이후 종남이 망했겠지만, 지금은 종남과 사천당문이 동시에 멸문하게 되리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 * *
천일영은 윤의강의 급히 오라는 전구를 받고 하오문 귀주성 지회를 찾았다.
무림맹의 발목을 거의 다 잡은 지금, 어찌하여 윤의강이 천일영을 급히 찾는가.
천일영이 귀주성 지회의 문을 열자 탁자 위에 죽은 것처럼 엎어져 있던 윤의강이 퀭한 얼굴을 들었다.
꽤나 피곤한 것인지 아니면 골치 아픈 일이 있는 듯한 모습이다.
“나더러 오라 가라 하다니, 의강이 너도 많이 컸구나.”
“헉, 천마님. 그게 아니라 드디어 무림맹이 움직였습니다. 하오문에 정보를 팔라고 했다더군요.”
“남궁천도 대단하군. 조금은 더 있어야 정신을 차릴 줄 알았건만.”
“괜히 무림맹의 맹주에 올랐겠습니까. 무공 실력도, 머리도 맹주라는 자리에 어울리는 자입니다.”
“헌데 의강아, 겨우 이 정도의 일로 나를 오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은 예상한 한도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터. 본 목적이 무엇이냐.”
“저…… 그것이 다름 아니라 하오문의 문주께서 천마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하오문의 문주가? 나와 무림맹을 두고 거래라도 할 생각이냐.”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와 함께 산서성(山西省)으로 오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천일영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종남과 사천당문이 손을 잡고 빈민을 구제하는 일까지 진행된 지금, 이제는 천일영이 딱히 나서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하오문이 거래하려고 한다면 별반 아쉬운 것이 없어 거절해도 문제는 없을 터.
이제 슬슬 항주로 돌아가 천이영과 혜령하고 놀 생각으로 가득했던 천일영의 온몸이 귀찮다는 생각으로 살짝 떨린다.
“그렇군. 안 간다고 전해라.”
“천마님? 그럼 저는 죽습니다? 하오문 문주님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의강아, 그동안 만나서 반가웠구나. 그럼 다시 보지 못하겠지만 잘 있거라.”
“천마님!”
순간, 윤의강은 몸을 날려, 느닷없이 등을 돌리고 휙 나가려는 천일영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윤의강은 눈물을 글썽이며 애절한 눈으로 천일영을 올려다보았다.
드르륵!
하지만 천일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집무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윤의강은 천일영의 거침없는 행동에 큰 목소리를 내며 양쪽의 다리를 전부 붙잡았다.
“죽어도 못 가십니다. 어찌 이리 매정하십니까.”
“귀찮다.”
“저는 죽을 것입니다. 공자님이 저를 버리셔서 죽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인 것을 어찌하겠느냐.”
“제가 그동안 얼마나 몸과 마음을 바쳐 공자님을 대했는데,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인연이란 게 움직이는 것 아니더냐. 너와의 인연이 끝났으니 다른 인연이 생기는 것이 인생. 그러니 그만하거라.”
“공자님께 은혜를 입고 오직 공자님만 생각하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제가 왜 하오문 지회의 회주 자리까지 올랐겠습니까. 저를 가지고 노신 것입니까? 저를 버리시면 발병이 나셔서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입니다.”
윤의강이 천일영의 양쪽 다리를 잡고 애절한 눈길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원을 토해 낸 그 순간.
천일영은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며 윤의강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윤의강도 천일영의 얼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이상한 느낌이 들어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지회의 마당을 바라보았다.
웅성웅성.
열댓 명의 하오문 지회에 있던 사람들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천일영과 윤의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 남자들은 속이 안 좋다는 듯 비틀린 얼굴로 애써 침을 삼키며 토악질을 참으려 하고 있었고, 여자들은 경악스러운 얼굴로 눈길을 돌리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까지 하는 모습.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느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
천일영과 윤의강은 눈을 위로 들어 올려 저들이 왜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지 대화를 짚어 나갔다.
그리고 천일영과 윤의강이 두 번 눈을 깜박였을 때, 둘은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아니야!”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다!”
천일영은 시뻘게진 얼굴로 윤의강의 머리 위를 향해 내공이 가득 담긴 꿀밤을 날렸다.
* * *
잠시 후.
천일영은 하오문 문주의 수완에 작은 웃음을 지었다.
역시 하오문이라는 곳의 문주답게 보통의 머리가 아니다.
‘내가 가지 않을 것을 알고 하오문의 문주는 이미 귀천명에 와 있었단 말인가.’
누가 오라고 해서 오고, 가라고 하여 가는 천일영이 아니다.
무려 천마의 자리까지 올라 천하를 논했던 천일영이 하오문에서 오라고 하여 움직일 리는 없는 법이니까.
‘하오문은 본문의 위치는 물론이고, 문주의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곳이다. 정보를 팔아 돈을 버는 곳이니 그만큼 비밀도 많고, 무공이 강하지 않은 하오문의 특성상 정체를 숨기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오문의 문주가 직접 천일영을 만나기 위해, 윤의강이 벌게진 얼굴로 오해를 풀고 있는 사이, 상당한 고가의 마차(馬車)를 보냈다.
보통은 우차를 쓰는 법인데 여물도 많이 먹고 유지비가 많이 드는 마차가 온다는 것은 특별한 손님을 모실 때나 보내는 법.
게다가 한 마리가 끄는 것도 아닌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일급품의 마차이니, 천일영은 하오문 문주의 생각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때, 마차의 안에서 나온 자가 천일영에게 편지 한 장을 건넸다.
<술시(戌時)에 귀천명 객잔 여생(餘生)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천일영은 편지를 가져온 남자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이십 대 중반쯤의 나이로 천일영만큼은 아니지만 놀랍도록 단정한 얼굴.
또한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기품이 서려 있는 것이 보통이 넘는 예절 교육을 받은, 비범함이 눈에 보일 정도의 자다.
게다가 젊은 나이에 무공이 이미 절정 고수.
이만한 자를 보냈다는 것은 최고의 손님을 모신다는 의미다.
‘제법 흥미가 생기는구나. 아마도 하오문의 문주가 귀주성까지 오고, 이런 자와 마차를 보냈다는 것은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다는 말이겠지.’
천일영은 오해를 푸는 동안 수치심으로 절박한 표정을 짓는 윤의강에게 입을 열었다.
“의강아, 이제 그만하고 마차에 타거라.”
“윽! 지금에 와서 미…… 밀폐된 공간에 둘이 타는 것은 좀……. 오해도 겨우 풀린 참인데……. 게다가 제가 매달리는 역할이라니 정말로 기분이 나쁩니다. 버리는 역할이라면 몰라도.”
“오호? 남색으로 오해받아 억울한 게 아니라 네가 매달렸다는 부분에서 오히려 기분이 나빴다는 것이냐? 혹시 너……?”
천일영이 슬그머니 몸을 가리며 입을 열자.
웅성웅성.
또다시 윤의강의 뒤로 십수 명의 사람들의 서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기껏 오해가 풀렸는데 모두 허사가 된 윤의강은 있는 대로 화가 뻗쳐 벌게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아니야. 아니라고! 남색 싫다고! 난 여자에 환장한 사람이라고! 여자라면 미쳐 죽는단 말이다!”
싸악.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특히 웅성거리던 여인들의 얼굴이 윤의강을 벌레 쳐다보듯 일그러진다.
또한 여인들이 옷깃까지 다시 한번 잘못된 곳이 없는지 살피며 몸의 구석구석을 가리기까지 하니, 윤의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이젠 나도 모르겠다.’
윤의강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마차에 오르려 하자, 편지를 가져온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다.
예의를 차리고 행동에 과함이 없지만, 부드러우면서도 번들거리는 안광이 살기와는 또 다른 단호함을 내비쳤다.
“전에 보낸 편지와는 달리 이번에는 공자님 한 분만 모시라는 명이십니다. 회주님께는 그동안의 공을 포상하는 편지와 선물을 보내신다고 하니 여기에 계셔 주십시오.”
“하아, 저 마차에 안 타도 된다니 그것참 다행일세.”
천일영은 남자의 안내에 따라 마차에 올랐다.
하오문의 문주가 타는 마차인지 사향(麝香)의 옅은 향이 코끝을 간지럽힌다.
보통은 비싼 사향을 자랑이라도 하려고 떡칠하듯 사용하거나 하는데, 기분 좋게 은은히 풍기는 향이 하오문 문주의 성격을 대략 짐작하게 한다.
천일영은 편안하게 마차에 몸을 기대었다.
제법 재미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에.
* * *
이 각 후.
그르르르륵.
마차가 멈추자 천일영은 남자의 안내에 따라 객잔 여생에 들어섰다.
객잔 여생은 귀천명에서도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곳.
제법 돈이 있다 하는 사람들이나 들어설 수 있는 곳이다.
천일영은 하오문의 문주가 이곳을 전부 다 빌렸음을 바로 알아보았다.
손님들이 꽤 드나들 시간인데 객잔이 휑하다.
“가장 높은 층에 계십니다.”
“현명하군.”
“하오문의 문주는 그 모습을 아는 자가 없어 정체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분입니다. 이 정도는 당연한 입니다.”
천일영이 객잔의 삼 층에 올랐다.
가장 비싼 객실이 있는 곳이자, 객실 안이 하나의 집처럼 되어 있는 곳.
가끔 천일영도 이용을 했던 터라 잘 알고 있는 익숙함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천일영의 눈길을 속이지 못함은 당연지사.
군데군데에 살수와 같은 기운을 풍기는 자들이 숨어 있었다.
“이 객실입니다.”
“알겠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선다는 기별을 넣고 몸을 뒤로 물렀다.
이 남자조차 하오문 문주와는 독대가 불가한 모양.
그러니 천일영이 객실에 들어서자 남자가 날 선 눈빛을 보내며 노려본다.
드르륵. 탁.
천일영이 객실에 들어서자 마차에서 풍기던 연한 사향 향기가 시작되는 부분으로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객실의 가장 안쪽에서 흐르는 향기.
그곳에는 커다란 침상 위에서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은 반라의 여인이 누워 있었다.
이십 대 중후반 정도의 얼굴, 길고 얇은 팔과 다리, 풍만한 가슴, 그리고 하얀 피부. 얼굴 또한 금채홍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미인이다.
가릴 것 하나 없이 모두 보이는 옷차림의 여인은 천일영을 보고도 누운 채 맨발을 까딱거리며 나른한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산서성으로 가지 않으시고 제대로 찾아오셨군요.”
“그대가 하오문의 문주인 모양이군.”
“세하월이라고 합니다.”
세하월은 천일영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의자에 앉았다.
팔랑이는 얇은 옷깃이 스칠 때마다 살을 비비며 미묘하게 야릇한 소리를 냈지만, 세하월의 표정은 여전히 나른한 채였다.
세하월은 요염한 표정을 지으며 붉은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공자님께서 산서성(山西省)으로 가셨으면 그 정도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해를 한 모양이구나. 나는 그 정도의 사람이다. 산서성으로 가지 않은 것은 단지 귀찮았을 뿐이었지.”
“그것으로도 상관없습니다. 귀찮았든지 가기 싫었든지, 혹은 죽을 것 같아서였든지 저는 개의치 않는답니다. 제가 보는 것은 오직 결과뿐.”
천일영은 세하월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세하월이 하는 말은 천일영이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지만 어찌 보면 하오문에는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일영은 그제야 세하월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일단 내 발걸음을 잡는 것까지는 했구나. 그럼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할 것이냐.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요?”
세하월이 천일영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 거리가 불과 5치 정도만 벌어져 있을 뿐이다.
세하월은 검지를 아래에서 위로 들어 천일영의 턱에 댔다.
“공자님은 누구시죠?”
세하월의 붉은 입술이 열리며 단내 나는 숨 내음이 천일영의 콧가로 밀려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