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21화 (122/270)

121화

“원망도 많이 했어. 하다못해 키라도 크고 힘이라도 있었으면 이런 심한 꼴은 안 당할 거라는 생각도 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한참 노리개가 되고 난 후에 쓰러져 있는데 갑자기 화가 나더라.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할까 싶었지. 그래서 잠들어 있는 놈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검을 몰래 빼서 휘둘렀어. 제일 지독하게 군 놈의 목을 노렸는데 말이야. 겨우 열두 살이기도 했고 몸도 워낙에 작아서 검은 목에 닿지도 않고 땅에 떨어졌어. 그리고 그 소리에 놀란 놈들이 일어나서 나를 죽을 때까지 때렸지.”

“흑, 유화 님. 그게 진정 열두 살에 일어난 일인가요? 그런 짐승만도 못한 놈들이!”

“정신을 잃은 채 시장통에 버려졌어. 난 죽었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아직 천명이 다하지 않았는지 오 일 밤낮을 쓰러져 있다가 정신이 들었지. 나는 그대로 사혈련을 찾아갔어. 복수하고 싶었으니까. 몇 달이나 걸리는 길이었는데, 도착한 것은 일 년이 다 돼 갈 때쯤이었지. 사혈련으로 가는 길 동안 내가 당하는 일은 변함이 없었거든. 그리고 사혈련에 도착해서는 무조건 고개를 조아리고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말만 했어.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온몸이 멍들고 찢어져 있는 내가 불쌍했는지 그렇게 사혈련에 들어가게 됐지.”

“그럼 백유화 님이 사혈련 소속이 된 것은…….”

“응, 정파 놈들에게 지독하게 당했으니까. 난 사혈련에 들어가서 무공을 배우면 그놈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근데 내가 워낙에 작잖아? 검도 안 맞고 창도 나에게는 너무 길었어. 물론 소도를 사용하면 어느 정도 해결이 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아도 몸이 작은데 길지 않은 검은 간격에서 너무 불리했지. 몸은 더 이상 자라지 않고 무공도 그냥 그랬던 거야. 그래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어. 길거리를 굴러다니다 그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도 했지. 어차피 잘못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안 되기만 하니.”

“그럼 백유화 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다 포기하고 죽으러 길거리로 나갈까 했을 때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어. 이 작고 가느다란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궁리하다가 인형사라는 것을 생각해 낸 거야. 어렸을 때 아버지랑 시장에서 인형극을 본 적이 있거든. 신기하게도 그 생각이 들어서 여러 가지 시험을 했지.”

“그럼 인형사라는 건 백유화 님이 만드신 건가요?”

“내가 시초이고 유일하지. 하지만 그다지 인정은 받지 못했어. 이상하고 기괴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보란 듯이 나에게 고통을 주었던 놈들을 찾아서 죽이기 시작했지. 어떻게 해서든 놈들을 찾아냈어. 그리고 해체하고 놈들의 신체를 연구했지. 오 년 동안 내가 죽인 놈들이 칠백 명을 넘어섰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그게 바로 나를 노리개로 만든 놈들의 숫자인 거야. 그러다가 내 소문이 퍼져서 나를 잡기 위해 판 함정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었어.”

“아?! 그럼 혹시 공자님이?”

“분명 죽을 거로 생각했지.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근데 난 말이다? 정말로 기뻤던 거다. 남들이 모두 버리고 인정도 해 주지 않는 인생이었는데 나를 구해 준 사람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죽겠다는 생각은 그때부터 안 하게 됐지.”

금채홍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한 번 훔쳐 내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백유화를 조용히 껴안았다.

“저라면 그런 인생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나도…… 다시 살라고 하면 못해.”

백유화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금채홍을 조금 밀어냈다.

그리고 조금은 쓸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강해지는 게 목적이면 인형사 배워 보지 않을래? 너라면 가르쳐 줘도 될 것 같아.”

“그건 백유화 님이 만드신 귀중한 무공 아닌가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사라질 무공이야. 무공을 남길 마음은 없지만, 너라면 내가 살아 있었다는 것을 오래 기억해 줄 것 같아서. 그 흔적을 너에게 새길까 하는 마음으로 묻는 거야.”

“그렇게 소중한 것을 제가 배워도 될까요.”

백유화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데, 무공을 가르쳐 주겠다는 것까지 거절당할까 하는 마음.

그러나 금채홍은 천일영에게 무공을 배우기로 한 터라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아. 네가 거절해도 나는 괜찮아.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금채홍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백유화의 눈동자가 더욱 크게 떨린다.

백유화는 굳은 듯 닫힌 입술을 억지로 떼었다.

“아니야. 내가 괜한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도 도망가지 않은 금채홍.

더는 이 아이가 난감해하는 것이 싫다고 생각하여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배워 두거라. 내가 장담하건대 인형사의 무공은 무림 최강 중 하나다.”

“공자님, 언제부터?”

“그것이 중요하겠느냐. 최고의 무공을 배울 기회를 놓치지 말거라.”

천일영이 금채홍을 지나 백유화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무극지검을 백유화의 옆에 놓자, 백유화의 눈길이 무극지검을 따라간다.

“오래전부터 검과 인형사의 무공을 같이 쓰면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연구를 해 왔는데 내 몸으로는 무리야. 채홍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네, 알겠어요. 백유화 님의 무공 꼭 가르쳐 주세요.”

금채홍의 손이 백유화의 옷깃을 잡았다.

아직 사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어지기를 바라는 듯.

백유화의 얼굴에 가녀린 웃음꽃이 피었다.

그때, 천일영이 무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근데 혜령이가 결국은 누구하고 혼례를 올릴 거냐고 묻던데?”

“어머,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네요.”

“내일 알아서 잘 이야기하거라. 혜령이한테 골려서 미안하다는 말도 하고.”

“그런데 저 어제 한 말 진심인데요?”

“혜령이부터 이기고 오거라.”

“아……. 그건 너무 힘든데요.”

천일영의 매정한 말에 백유화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언제까지고 내 사람이 되지는 않겠지. 그래도 쫓아가려는 나는 바보일까?’

백유화는 고개를 들어 떠오르는 달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내가 다가가면 그 거리만큼 언제나 멀어지는 달.

그렇게 언제까지나 잡히지 않는 달과 같은 존재를 사랑한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아. 언제까지 도망가도 그만큼의 거리만큼 쫓아갈 거니까.’

백유화는 웃음 대신 슬픈 미소를 지었다.

* * *

오 일 뒤 하남성(河南省).

천일영은 금채홍과 백유화와 함께 오 층 객잔의 가장 위층에 몸을 앉혔다.

“공자님? 어째서 갑자기 이곳으로 오신 건가요? 여기는 무림맹이 한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입니다.”

“괜찮다. 채홍이, 너는 이미 정파의 기운이 흐르고, 백유화는 초고수가 아닌 이상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운을 죽일 줄 아니 딱히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합니다. 백유화 님은 고수이긴 하나 왠지 걱정되어서요.”

금채홍의 말에 천일영은 백유화를 흘끔 바라보았다.

금채홍의 걱정해 주는 진심이 통했는지 백유화의 얼굴이 조금은 붉어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이다.

이 뻔뻔스러운 살인귀가 얼굴이 붉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도착한 모양이구나.”

“누구를 만나시는 것인가요?”

금채홍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명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은 건장하고 잘생긴 얼굴에 검을 양쪽으로 두 개씩 차고 있는 무인.

또 한 명은 얼굴과 온몸을 가린 여인 세하월이었다.

“그동안 뵙기를 고대했습니다, 공자님.”

“그래, 부탁한 일은 잘 처리가 되었느냐.”

“네, 편지로 말씀하신 조건에 적합한 곳을 물색해 두었습니다.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가기는 하겠지만 그만큼 좋은 곳입니다.”

“가 보도록 하지.”

천일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천일영의 날카로운 감각에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잡혔다.

천일영은 날카로운 눈매로 서서히 바뀌는 백유화가 시선의 끝에 걸렸다.

‘백유화는 이미 아까부터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군. 채홍이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하고.’

천일영은 금채홍을 자신의 뒤로 물리고 길을 나섰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반 각 정도를 걸어서 도착한 곳.

제법 큰 장원이 있는 곳으로 한때 거대한 세를 자랑하던 가문의 소유였던 곳이다.

천일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지형적 위치를 가늠해 보았다.

제법 마음에 드는 장원이다.

세하월이 천일영의 표정을 읽었는지 곁으로 다가왔다.

“하오문의 모든 정보를 모아 특정한 곳입니다.”

“마음에 드는구나. 이 정도의 자리를 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십니다.”

세하월은 손수 앞장서 천일영 일행을 이끌었다.

방금 본 장원의 뒤편.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곳에도 상당한 크기의 터가 있었다.

딱히 장원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한 것은 연무장의 크기가 컸지만, 건물은 세 칸짜리에 불과한 작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하월은 웃음을 지었다.

“이곳까지 같이 매입할 수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다. 전부 다 사들이거라.”

“알겠습니다. 저는 빠른 일 처리를 위해 매입을 하러 가겠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보도록 하지.”

금채홍은 호위무사 둘을 데리고 빠르게 신형을 빼는 세하월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남성 찾아온 이유를 여전히 알 수 없었기에 금채홍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 천일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공자님? 어째서 장원을 보고 계신 것인가요?”

“싱거운 질문이구나. 사려고 보는 것이지 뭣 때문에 여기까지 왔겠느냐.”

“하지만 여기는 무림맹의 텃밭과도 같은 곳입니다. 이곳에 장원이 필요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누가 장원이 필요하다더냐. 내가 필요한 것은 땅이다.”

“네에?”

천일영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하는 금채홍에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차차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오리를 먹어 보러 가지 않겠느냐. 이곳에서 삼십 리 떨어진 야산 중턱에 호남(湖南)식으로 알싸하고 맵게 요리하는 곳이 있다. 먹어 보고 별유천지에서도 통할지 이야기해 다오.”

“까다로운 공자님께서 가자고 하시는 요릿집이라면 기대가 됩니다.”

그때, 백유화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삼십 리면 너무 멀어. 특히 나처럼 팔다리가 짧은 사람한테는. 그러니 나 업어 줘.”

“어머? 백유화 님?”

백유화가 금채홍의 등으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때였다.

천일영이 순식간에 백유화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 녀석, 어딜 은근슬쩍 채홍이한테 업히려고 하는 것이냐.”

“하지만 다리 아픕니다.”

“하아, 네 녀석은 정말로 변하질 않는구나.”

천일영은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린 백유화를 옆구리 옆으로 들었다.

몸이 앞으로 축 처진 백유화가 갑자기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거 말고 앞으로 안아 주거나 하는 거 있잖아요.”

“시끄럽다.”

“쳇, 안 통하네.”

천일영은 백유화를 들고 무림맹의 세력권을 벗어나 야트막한 산으로 들어섰다.

백유화는 입이 튀어나온 채 천일영의 오른손에 매달려 삐친 표정을 지었으나 그때.

“이제 슬슬이네요.”

“그런 것 같군.”

날카롭게 변한 백유화의 말에 천일영이 대답을 한 순간, 이 장 떨어진 나무 사이에서 남자 다섯이 신형을 드러냈다.

순간 금채홍은 날 선 검을 들어 올리는 남자들의 앞으로 튀어 나가며 금룡참월하검을 뽑아 들고 백유화를 막아섰다.

“백유화 님은 제가 지켜 드릴게요. 인형도 없으시잖아요.”

“응? 인형?”

“인형사이시니. 게다가 연약하시고요.”

금채홍은 눈앞의 남자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분명 한 명은 초절정 고수, 두 명은 절정 고수, 나머지 둘도 일류 고수의 실력이다.

‘젠장, 큰소리를 쳤는데.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어. 공자님도 계시니까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백유화 님을 지키는 것에만 집중하자.’

금채홍은 다리가 떨려 왔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일류 고수 두 명과 붙어도 분명 질 터다.

백유화가 무기만 가지고 있었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금채홍은 자리를 무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금채홍의 떨리는 다리를 알아본 초절정 고수가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아까 객잔에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다. 최고급 기루에서조차 본 적 없는 미인이 둘이나 있으니 오늘은 운이 좋군. 너희 둘은 나를 기쁘게 해 줘야겠다. 그리고 다음에는 내 부하들도 기쁘게 해 줘야겠지.”

“네놈들, 설마 우리 앞을 가로막은 이유가?”

“이만큼의 미인을 그냥 두고 가는 남자가 있겠느냐. 그런 건 고자나 하는 짓이지. 네년들, 빨리 옷부터 벗거라. 한 삼 일 정도 우리의 수발을 들어주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뭐, 이후에는 팔아 버리겠지만.”

“최악이군요. 이런 게 정파의 무인이라니.”

금채홍의 이가 뿌득 소리를 내며 갈렸다.

“젠장, 어쩐지 객잔에서부터 쓰레기 냄새가 나더니만.”

백유화가 천일영의 손아귀를 벗어나 허리를 주무르며 걸어 나왔다.

손아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더니 허리가 제법 아픈 모양이었다.

백유화는 허리를 펴며 길거리의 오물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작은 입술을 오물거렸다.

“야, 쓰레기.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뭐라고?”

“그건 바로 겁탈이야. 네놈들,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하지 말아라.”

“푸하하핫. 얼굴은 예쁜데, 미친년이었구나. 하지만 더욱 흥분되니 이를 어쩔까. 으하하핫.”

“말하는 쓰레기라. 세상에는 많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을 정도로.”

백유화의 발길이 거침없이 옮겨진다.

금채홍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백유화를 급히 막아서려 했다.

훅.

순간 백유화의 신형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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