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24화 (125/270)

124화

어두운 밤하늘에 어스름한 빛이 비치자 은소혜의 마음은 점점 타들어 가는 듯했다.

오랜 시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건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불안 때문에 은소혜는 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맨정신이었다.

“드르렁.”

은소혜는 방을 둘러보았다.

이미 공자님은 제외한 나머지의 사람들은 전부 잠이 들어 있다.

윤의강과 송체란은 구석에서 술병을 껴안은 채 코를 골고 있었고, 백유화는 술을 마시던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뿐인가. 초야화는 단 한마디도 말을 섞어 주지 않은 백유화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여 술을 들이켜다 제일 먼저 뻗어 버렸다.

‘하아, 이제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은소혜는 흐트러진 머리를 한 번 다듬고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말을 꺼내지 않는 이 사람이 참으로 원망스럽다.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은소혜는 자신이 태어난 이래 가장 대담한 짓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고 공자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무릎 위에 올라타 공자의 뒷목을 감싸는 것.

얼굴이 붉어졌지만, 은소혜는 마음을 굳게 먹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이제 반 시진이면 해가 뜰 것입니다. 하시겠다 하셨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제 마음을 찢어 놓는 것이라면 부디 말씀을 멈추시고 저를 품어 주시겠습니까. 아무런 말씀을 안 하셔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접겠습니다. 그러니 오늘만큼은 저를…….”

“어째서 나 같은 놈을 위해 몸을 함부로 하려 하느냐. 그러지 말거라.”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공자님께서는 절대 저를 품지 않으려 하실 것입니다.”

“소혜야, 미안하구나.”

“흑.”

은소혜의 작은 머리가 천일영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은소혜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하듯 텅 빈 눈동자로 허망한 마음을 대신했다.

애써 단장한 머리카락이 흩어져 은소혜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든다.

천일영은 조용히 은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은 너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를 하려 했다.”

“품어 주시지도 않는데 저를 데려가셔서 무엇을 하시려 그러십니까. 저와 혼례를 올릴 생각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길 바랐다.”

“공자님께서 하는 일? 그것이 무엇입니까?”

“너에게 기루의 주인이 되어 달라고 할 참이었다.”

“…….”

잠시 은소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적과도 같은 고요함이 천일영의 곁으로 찾아왔다.

떠들썩해야 할 기루의 방 안은 가끔 한탄 섞인 은소혜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

“억지로 따라오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뿐이구나.”

“제가 기루의 주인이 된다 해도 단 한 번 품어 주는 것조차 하지 않으시는 것이군요.”

“……너를 품는다는 것은 몸이 아닌 마음을 품는 것일 터다. 그러니 나는 그리할 수 없구나.”

“잔인하신 분. 어쩜 이리도 잔인하신지요.”

“미안하다. 일곱 살 이후로 단 한 번도 착하게 살 수 없었다. 그러니 너에게도 이렇게 잔인한 말을 하는 것이겠지.”

은소혜의 텅 빈 눈동자가 점점 더 비워져 간다.

그리고 길고도 긴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은소혜는 어느새 말라 버린 입술을 열었다.

“가겠습니다. 공자님을 따라가겠습니다.”

“괜찮겠느냐. 내 말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알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거절하면 영원히 공자님을 뵐 수 없겠지요. 저에게는 그것이 더욱 큰 고통입니다. 그러니 가혹하더라도 공자님의 곁에 있는 길을 선택하겠습니다.”

“고맙다. 오늘 바로 기루의 주인에게 낙적(落籍) 이야기를 하마.”

은소혜는 힘없이 몸을 일으켰다.

천일영을 바라보는 은소혜의 눈길에 원망의 그림자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허탈함이 가득 차 있었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보다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음에 욕심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이 마음을 갉아먹는 듯.

“저는 짐을 싸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전부 챙겨도 될 것이다. 애써 짐을 줄이지 말거라.”

“기루의 흔적입니다. 또다시 기루로 가겠지만 이곳의 흔적을 가지고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공자님을 연모하는 사람이 아닌 키워지는 사람이니.”

“……알았다.”

은소혜가 발을 끌며 밖으로 나섰다.

천일영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아려 오면서도 잔인한 말을 서슴없이 꺼내는 자신의 모습에 눈을 감고 병째 술을 들이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은소혜의 텅 빈 눈동자를 견디지 못했을 테니까.

* * *

천일영은 기루 주인과 마주 앉았다.

기루 주인은, 주인인 척하는 나이 많은 여인이 아니라 그의 남편인 듯 보이는 오십 대의 남자였다.

그는 가짜 천마가 천혜향루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 천일영이 어떤 사람인지 두 눈을 뜨고 본 기억이 있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가짜 천마라고는 하나 무공이 대단했던 자를 손가락으로 제압했던 사람이 어찌 보통이겠는가.

그는 천일영이 하려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몰라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하면서도 몸을 피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낙적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만.”

“낙적입니까. 하지만 아시다시피 천혜향루는 귀주성 제일의 기루. 그 값이 절대 싸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은소혜와 초야화, 두 사람이다.”

“그 두 사람은 천혜향루에서도 최고의 미인. 또한 길거리에서 굶어 죽어 가는 두 아이를 제가 거두어 딸과 같이 키운 아이입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낙적에는 얼마가 들겠느냐.”

기루의 주인은 잠시 고민에 사로잡혔다.

그가 망설이는 것은 눈앞의 공자가 무공이 대단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가짜 천마가 왔을 때 천혜향루에 있는 사람 중 상당수가 고통을 받았을 터이고 죽는 사람 또한 제법 나왔을 터다.

은인과도 같은 사람.

기루 주인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원래는 한 사람에 금화 삼십 냥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님이 베푸신 은혜가 있었기에 한 사람당 금화 열다섯 냥으로 하여 낙적시키시면 될 것입니다.”

“그런가. 여기 있네.”

천일영은 만금전장의 전표를 기루 주인 앞에 놓았다.

기루 주인은 금액을 확인하려 전표를 받아 든 순간 눈이 나올 만큼이나 깜짝 놀랐다.

만금전장의 전표는 다름 아닌 금화 일백 냥짜리.

“공자님, 어찌하여 이런 큰 금액을 선뜻 내놓으시는 것입니까?”

“나는 저 아이들이 싼값에 낙적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면 저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것이니. 또한 이곳은 은소혜와 초야화에게 집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니 앞으로 한 달 동안 두 아이를 위해 잔치를 열고 성대하게 송별해 주도록 하거라. 그것으로 두 아이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사라진다면 아깝지 않을 돈이다.”

“공자님은 정말로 그릇이 큰 분이시군요.”

“그런 척을 할 뿐이다. 다만 굳이 말하자면 두 아이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불행하게 만들지 않겠다. 약속하지.”

“그런 말씀이라면 저도 안심이 됩니다. 오늘부터 매일같이 송별 연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초야화와 은소혜가 방으로 들어왔다.

초야화는 자신에게는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낙적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에 놀라서 찾아온 것이었고, 은소혜는 짐을 전부 버리고 천일영을 찾아온 것이었다.

천일영은 미안함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지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혜가 혼자 가면 쓸쓸한 것 같아 초야화도 함께 낙적시켰다.”

“공자님! 그리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괜찮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너희 둘의 송별 연회가 있을 것이다. 실컷 즐기고 미련이 남지 않도록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거라. 한 달 뒤에 데리러 오마.”

“공자님, 한 달 뒤에 저희가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시려고요. 원래 낙적을 시키면 감시하는 사람을 보내는 법입니다.”

“도망이라, 괜찮다. 그리해서 너희가 행복해진다면.”

“공자님…….”

그때, 초야화가 은소혜의 팔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아니…… 저기 내 의사는? 나 안 보여?”

그러나 은소혜는 슬픈 얼굴과 함께 얼굴만 붉어질 뿐이고 천일영도 아린 마음 때문에 말없이 앉아만 있을 뿐이다.

초야화는 더욱더 눈물을 흘렸다.

“어제부터 나한테 왜들 이래? 나 살아 있는 사람 맞지?”

초야화는 유령이 된 듯한 느낌으로 은소혜의 팔만 더 세게 잡았다.

더욱 크게 운다 한들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으니까.

잠시 후.

천일영은 한 손에 윤의강을 들고, 또 다른 손에 백유화를 든 채 기루를 나섰다.

천일영은 한쪽 눈을 찡그렸다.

어둠에 길들여진 눈이 강한 햇빛 때문에 조금은 아프게 느껴졌지만 괜찮았다.

자신이 은소혜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이야.

아니, 더 많이 아파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천일영은 천천히 백유화와 윤의강을 땅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철퍼덕.

“아야야.”

“아이고, 허리야.”

천일영은 땅바닥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시침을 뚝 뗀 채 잠을 자는 척이나 하다니 음흉한 놈들.”

“어라? 눈치채셨습니까?”

“어찌나 애절한지 자는 척을 하지 않고는 버티질 못하겠더라고요.”

천일영은 싱긋 웃으며 백유화와 윤의강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게 아니라 은소혜와의 대화를 듣고 싶어서 자는 척을 한 것이겠지.”

“쳇, 다 들통났네.”

백유화는 천진한 미소를 눈에 띌 정도로 보이고, 윤의강은 능글능글한 웃음을 짓는다.

은소혜와 나눈 대화는 어쩐지 조금 쑥스럽고, 아린 마음은 지금의 자리를 피하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뭐라고 하지는 못할 일이다.

알아서 분위기를 눈치채고 잠을 자는 척까지 해 주었으니 일이 어렵지 않게 풀렸다.

천일영은 조금 괘씸했지만 고개를 가로젓고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밥이나 사거라. 배고프다.”

“네, 그러지요.”

하지만 천일영은 아직도 화가 안 풀렸는지 백유화와 윤의강의 머리에 꿀밤 한 대씩을 더 날렸다.

* * *

윤의강은 산니백육(蒜泥白肉)과 어향육사(魚香肉絲), 그리고 우육면(牛肉麵)을 시키고 기다리는 사이, 문득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마음에 담아 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분명 윤의강은 무척이나 억울했던 터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독하게 먹고 입을 열었다.

“공자님, 며칠 전에 하오문의 문주가 산서성으로 오라고 했을 때 저를 버리고 안 간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공자님께서 한 수 미리 보시고 데리러 올 것을 예상하신 것이죠?”

“응? 아니다. 정말로 귀찮아서 안 가려고 한 거다.”

“그럼 제가 죽을 것을 알고도 안 간다고 하신 것입니까!”

천일영은 윤의강이 정말로 화가 나서 제법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슬그머니 웃음을 지었다.

“무림맹과 사천당문의 일을 통해 하오문에 크나큰 돈을 벌게 한 너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쯤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으냐.”

“그런 것이라면 납득은 하겠습니다만 무척이나 서운했습니다.”

“설마 내가 너를 죽게 두겠느냐.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렇지요. 공자님의 성격을 제가 잘 알고 있는데도 순간의 서운함 때문에 이성을 잃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다.”

천일영은 때마침 나온 음식을 한 젓가락 입에 넣으면서 조금은 찔리는 마음을 숨겼다.

‘물론 의강이가 죽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 허나 세하월이 귀천명으로 오지 않았다면 꽤나 심한 질책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하오문의 눈에 띄느니 그편이 나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절대로 말하면 안 되겠지.’

그때, 백유화가 조용한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먹는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이미 천일영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 백유화의 입이 소리는 내지 않고 뻥긋거린다.

[천마님, 연기 되게 못하네요.]

순간 천일영은 약 올리듯 이죽거리는 백유화에게 같은 표정을 지어 주고 젓가락으로 두 눈을 찔렀다.

“아아악, 내 눈!”

객잔에 백유화의 비명이 터졌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