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25화 (126/270)

125화

천일영은 눈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는 백유화에게 전음을 날렸다.

[이 녀석, 나한테 그런 표정을 짓기 전에 의강이의 몸에 감아 둔 강선이나 풀거라. 여차하면 죽여 버리는 버릇을 아직도 버리지 못한 것이냐.]

[아으으윽,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놈이 공자님에게 따져 물으니 화가 나서 그랬습니다.]

[이젠 제법 거짓말도 잘하는구나.]

[눈치채고 계셨습니까?]

어젯밤부터 백유화는 강선(鋼線)을 펼쳐 놓고 있었다.

심지어 기루에 있었을 때는 방 전체를 강선으로 연결해 놓고 있었으며, 초야화와 윤의강의 혈도에도 수십 개의 강선을 연결하여 손가락만 까딱하면 죽일 수 있도록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고 있는 객잔 구석구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강선을 펼쳐 놓고, 심지어 객잔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급소에도 강선을 연결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점은 수천 가닥의 강선을 펼쳐 놓고 있음에도 그 누구 하나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신중한 녀석이다. 전에 죽을 뻔했던 경험이 오히려 안 좋은 방향으로 더 치닫게 한 모양이군.’

눈물을 훌쩍이며 윤의강 몰래 강선을 거두는 백유화.

천일영은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백유화가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머리가 지끈거리기도 했다.

‘하아, 도를 넘어선 경계와 살인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만 빼면 참 좋은 녀석인데. 세상에서 제일 갖지 말아야 할 것을 두 가지나 다 가지고 있으니.’

천일영은 통증이 가라앉아 벌게진 눈을 겨우 뜨는 백유화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눈앞의 미소를 따라 하듯 배시시 웃음을 짓는 백유화의 눈을 젓가락으로 한 번 더 찌르고, 새 젓가락을 꺼내 들어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 * *

천일영은 금채홍을 보자 오랜만에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며칠 떨어져 있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게 신기하기는 했다.

‘기묘하구나. 금채홍을 만나는 순간 가슴의 답답한 것이 다 사라지니.’

며칠 동안 백유화를 데리고 다니는 동안 무슨 짓을 벌일까 졸였던 가슴이 확 풀린다.

주변의 공기도 마치 청청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일영은 금채홍의 곁에 있는 것이 유독 편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러한 천일영의 심정을 모르는 백유화는 금채홍을 끌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곁에 있던 금채홍이 사라진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 천일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이 열렸다.

“저기, 채홍아.”

“네? 공자님?”

순간 아무 생각이 없이 금채홍을 부른 천일영은 조금의 곤란함을 느꼈다.

다음에 해야 할 말을 전혀 준비하지 않은 탓이다.

천일영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 백유화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백유화가 이번에도 입만 뻥끗거리며 짓궂은 표정을 짓는다.

[비켜 드릴까요?]

천일영은 백유화의 모습을 애써 무시하며 조금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주…… 죽지 마라.”

“네? 누가 저를 죽이려고 하나요?”

“아니, 그게……. 백유화의 수련은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네, 공자님의 말씀이라면 죽지 않겠습니다. 공자님의 명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따를 테니까요.”

금채홍은 천일영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고 생각했지만 웃음을 지었다.

“그…… 수련은 언제 끝나느냐.”

“네?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백유화 님께서 아시는 일입니다.”

“그렇지. 큼큼.”

금채홍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곁에서 백유화가 배를 잡고 웃는 시늉을 한다.

여전히 소리를 내지 않은 채. 천일영은 더욱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됐다. 어서 수련이나 하거라.”

“네, 공자님. 하루빨리 강해지고 싶어요.”

“그래.”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백유화와 연무장으로 가는 금채홍을 바라보자 천일영은 순간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한 것인가 싶어 뒷머리를 슬쩍 긁었다.

‘근데 나는 왜 채홍이를 불러 세운 것이지? 나중에라도 이야기하면 됐을 것을 뭐가 그리 아쉬웠던 것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이 속을 파고든다.

천일영은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는 저 녀석이 여동생같이 느껴져서 곁에 없으면 서운한 것인가?’

뭔가 석연치는 않지만 비슷한 느낌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래도 곁에서 금채홍이 사라지면 아쉬움을 느끼는 감정에 대한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음……. 별건 아니겠지.’

천일영은 생각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이내 한숨 한 번을 내쉬고 천이영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 * *

그날 저녁.

금채홍은 하루가 넘어가기 직전 자시(子時)가 돼서야 백유화의 손아귀에서 풀려났다.

땀으로 얼룩진 몸.

너덜너덜해진 옷차림.

팔을 들어 올리자 여자에게서는 도무지 나지 않을 만큼의 땀 냄새가 훅 올라왔다.

금채홍은 늘어지는 다리를 이끌고 우물가로 향했다.

“으윽, 공자님이 죽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이해가 간다.”

금채홍은 물을 길어 올려 옷을 입은 채 몸 위로 쏟아부었다.

제법 물이 차가웠지만 조금은 정신이 드는 듯하다.

“죽을 뻔했지만, 백유화 님은 대단했지. 어찌 그 작은 몸으로 그렇게까지 움직이는 걸까. 게다가 팔다리가 짧아서 검을 잘 못 다룬다고 했는데 그거 순 거짓말이었어. 나 같은 거보다 몇십 배는 출중한 실력이었지.”

새삼 무공의 깊이와 차이를 느낀다.

금채홍은 오늘 강선을 쓰는 법을 배우기 전 단계로 검법부터 새로이 배워야 했다.

아직 금채홍의 실력으로는 강선에 제대로 된 기를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검에 검강을 넣는 것처럼 강선에 기를 집어 놓고 유지할 수 있는 실력이 되려면 초절정 고수가 되어야만 했기 때문에, 경지를 올리는 동안 인형사의 무공과 함께 사용할 검법의 기초부터 다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공은 금채홍이 오늘 하루 겪어 본 것만으로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실용적이고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것이었다.

하지만 백유화가 보인 무공은 그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검사까지 만들어서 강선의 강도를 늘리다니. 심지어 그 와중에 검사를 응용하여 가짜 강선까지 섞을 줄은 몰랐어.”

금채홍은 백유화로부터 받은 강선 한 줄을 꺼내 달빛에 비춰 보았다.

밝은 달에 비추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이나 얇은 강선은 만년한철을 녹여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백유화는 강선을 가지고 틈이 날 때마다 기를 집어넣는 것을 연습하라고 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강선에 검기가 흐르지 않으면 지금보다 수련 시간을 두 배로 늘린다고도 했다.

그러나 금채홍은 혹독한 수련임에도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강해지기만 한다면! 잃어버린 항주 제일의 미친년 자리를 되찾겠어.”

“응? 미친년이라고?”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금채홍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금채홍은 우물가에 서 있는 천일영을 보고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공자님! 어째서 주무시지 않고 이 시간에 나와 계신 것인가요?”

“네가 돌아오지 않길래 나와 보았다. 오늘 수련은 어땠느냐.”

“죽을 뻔했어요.”

“역시 그랬군. 상처가 난 것 같으니 내가 좀 봐 주마.”

“앗! 잠깐만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천일영이 다가오자 금채홍은 재빨리 발걸음을 뒤로 물렀다.

천일영은 금채홍의 이상한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러느냐. 내가 가까이 가는 것이 불편한 것이더냐.”

“그게 아니라 저…… 땀 냄새 난단 말이에요.”

“혹독하게 수련을 하면 땀 냄새야 당연히 나는 것을.”

“그게 엄청 심해서…….”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증거지.”

“아…… 아무튼 조금 떨어져서 말씀하세요.”

“유별난 녀석이구나.”

천일영이 한 발짝 다가가면, 금채홍은 그만큼의 거리만큼 뒤로 물러섰다.

천일영은 가까워지지 않는 금채홍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화가 났다.

훅.

순간 천일영의 신형이 금채홍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의 팔목이 천일영에게 잡혀 있는 것을 보자 금채홍은 기겁한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까악, 공자님?”

“도망가지 말거라.”

“도망이 아니라…….”

금채홍은 천일영의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너무도 창피해서 죽고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하지만 천일영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정면으로 금채홍을 응시했다.

“네가 도망가니 왠지 화가 나는구나.”

“저도 공자님 곁에 있고 싶어요. 하지만…….”

“다시는 도망가지 말거라.”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천일영은 붉어진 금채홍의 얼굴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내 부드러운 얼굴로 천일영은 웃음을 지으며 금채홍의 머리를 잡고 시선을 자신에게 돌렸다.

“땀 냄새가 난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은데?”

“놓아주세요. 땀에 푹 절은 모습 같은 거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요.”

“그동안 많이 봐 왔는데 이제야 창피하다고?”

“여자는…… 그…… 그런 게 있어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네가 땀 냄새가 난다고 해서 내가 너를 싫어하겠느냐.”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오늘 고생 많았다. 이 말을 하려고 기다린 것뿐이다.”

천일영의 손이 금채홍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물과 땀에 젖은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

금채홍의 얼굴이 터져 나갈 것 같다.

“손 더러워져요. 하지 마세요.”

“오늘따라 바보가 된 것 같구나. 백유화 밑에서 수련을 하더니만 바보가 옮은 건가?”

“모…… 모릅니다, 그런 거.”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의 신형이 바닥에 흐릿한 물 사이로 비친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백유화가 한숨을 지었다.

‘도무지 저 두 사람은 왜 저렇게 둔한 건지.’

백유화는 금채홍이 강해지길 바라는 마음의 원류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금채홍은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분명 있을 테지만, 그보다는 자신보다 아득히 앞서 있는 공자의 곁에 서지 못할까 하는 불안함에 강해지고 싶은 것이다.

‘나야 천마님을 좋아한다고 해도 진짜로 혼례를 올리고 싶은 마음도 없고, 소란을 떠는 것도 천마님이 나를 잊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일 뿐인 것을. 그런데 저 두 사람은 보통의 마음이 아닌데도 눈치조차 채지 못하다니.’

백유화는 과거의 기억 한 자락을 떠올렸다.

과거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을 때, 백유화는 백이 넘는 무인들을 도륙했지만, 그 자신도 심하게 다쳐 있었다.

베인 발목과 남아 있지 않은 내공, 그리고 비틀어진 팔.

수천 개의 강선이 사방에 뻗어 있었지만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수만 방울의 피만이 강선에 매달려 허공에 떠 있을 뿐.

주저앉아 있는 백유화는 웃으며 죽음을 기다렸다.

눈앞으로 날아오는 검.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정파의 초절정 고수가 날린 검이 목을 찌를 때였다.

그 순간 천마님이 검을 막아 주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 마교의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사혈련인 나를 구하는 게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그때는 또 내 몸을 노리는 사람이 아닐까 했다.’

그러나 천일영이 주저앉아 있는 백유화에게 했던 첫마디는 너무도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네 무공은 정말로 아름답구나.]

그 순간이었다.

백유화가 천일영을 따르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그 누구도 기괴하다고만 했던 무공이었다.

모두에게서 손가락질받고 뒤에서는 욕과 비아냥을 날렸다.

‘또한 천마님은 나를 의원에 보이고 치료가 끝날 때까지 곁에 있어 줬다. 이런 분이 세상에 또 있을까.’

백유화는 자신의 몸을 감쌌다.

천일영을 사랑한다 한들 미래를 꿈꿔 본 적은 없다.

‘수없이 겁탈당하고 살아온 더러운 몸이다. 그 누구보다 깨끗한 공자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하니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백유화는 안절부절못하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 쓸쓸한 마음을 감추며 등을 돌렸다.

‘채홍아, 네가 나를 지키려 했던 것처럼 나도 너를 지켜 주마. 네가 잘못되면 천마님이 슬퍼하실 테니.’

백유화는 쓰리고 아픈 자신의 마음 따위 얼마든지 무시했다.

자신의 마음보다 천마님의 마음이 중요했으니까.

‘그래도 채홍이와 천마님이 서로 좋아한다는 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아야지. 그게 내 마지막 자존심이다.’

백유화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