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조금은 쓸쓸하고 외로움이 떠도는 객잔의 모습이, 천일영의 마음 한구석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어둠의 감정으로 스며들었다.
수련이 끝난 금채홍과 우물가에 서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다음 날.
백유화는 어쩐지 눈이 붓고 새빨개진 얼굴로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며 나가 버렸다.
아마도 밤새도록 울음을 그치지 못한 얼굴인 듯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오래 걸리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하던 그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금채홍에게 강선에 검기 흘리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말만을 남겼다. 이후.
절망 섞인 슬픈 표정은 불안함을 가득 넘어 불길함이 되어 마음에 남았기에, 천일영은 끝내 계속되는 백유화의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백유화는 이십 일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천일영은 멍하니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혹여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가.’
불안함이 가득해진 마음은 불길함으로 돌변하여 가슴속을 채워 갔다.
쿠구궁. 쿵. 후두두둑.
번개가 내리치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사라진 백유화를 걱정하는 천일영의 마음과도 같은 날씨.
처음에는 백유화를 부르는 데 망설였던 천일영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녀의 빈자리가 크기만 했다.
금채홍의 스승이라든가, 혹은 무공이 강하기 때문에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백유화가 별유천지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졌으니까.
단지 그것뿐이었다.
“공자님, 혹시 백유화 님께서 오신다는 연락이 없었습니까?”
“아직이구나.”
“돌아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죠?”
“결정은 백유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밖에는 할 게 없구나. 그런데 채홍아, 백유화가 주고 간 강선을 제법 소중하게 여기는 듯하구나.”
“하루빨리 성공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검에 검기를 넣는 것은 잘할 수 있는데, 이 얇은 강선은 제 뜻과는 반대이기만 하네요. 너무 힘들어요.”
“쉬울 리가 있나. 그것은 백유화가 혼신을 기울여 만든 무공인 것을.”
“백유화 님의 빈자리가 큽니다. 혹시 돌아오지 않으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되면 강제로라도 데려오실 수는 없을까요.”
어느새 곁에 다가와 천일영과 똑같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금채홍의 말에, 천일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할 수는 있으나 하지는 말아야 할 일.
그것을 내뱉은 금채홍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니 온전히 백유화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내린 마음의 결정조차도, 금채홍의 말에 조금 흔들린다.
만약 강제로 백유화를 마중하러 나간다면, 그녀는 웃으며 따라올까.
‘분명 그렇겠지. 하지만 그것은 역시 안 될 일이지 않을까. 그 사고뭉치를 이렇게나 기다리게 될 줄이야. 내가 생각해도 꽤나 신기한 일이구나.’
그리움과도 비슷한 마음이 계속됐지만, 천일영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며 백유화가 남긴 이십 일 전의 잔상만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끼익.
이른 시간.
손님이 들지 않을 시간에 드물게도 반가운 소리가 들리자, 기감으로 백유화가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천일영과 금채홍은 문을 바라보았다.
천일영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아쉬운 마음이 드러났다.
“건청이구나. 벌써 약속했던 시간이었던가.”
“벌써가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늦었습니다.”
건청은 천일영과 금채홍에게서 풍겨 나오는 무거운 기분을 애써 외면했다.
벌써 며칠째 보아 온 모습이기에 조금은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공자님, 어째서 저를 보자고 하신 것입니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근래에 들어 자주 자리를 비우며 생각이 들었건대 건청 네가 좀 더 강해져야 할 것 같구나.”
“혹여 공자님을 추적할 사람들을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그저 노파심일지도 모르겠다만 제갈현 때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니 강제로 골수를 씻어 내고 기경팔맥을 타통시키겠다.”
“반골세수(返骨洗髓)와 벌모세수(伐毛洗髓)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건청의 얼굴이 의아함으로 물들어 갔다.
오대 세가의 이름을 가진 명문가조차 벌모세수 하나 받기가 힘들다.
그것도 어렸을 때나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노화순청(爐火純靑)에 이른 십수 명이 겨우 매달려서 해야 한다.
그것을 저렇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것에, 건청은 믿기지 않아 얼떨떨한 마음부터 앞섰다.
벌모세수 하나만으로도 힘들고 수백 금이 들어가는 일인데 반골세수까지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하지만 건청은 천일영의 다음 말에 안색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벌모세수와 반골세수가 끝나면 단전을 부수겠다.”
“다…… 단전을 부순다고요? 공자님? 제가 혹시 큰 잘못을 저질렀나요? 어째서 그런 흉악한 말씀을 하십니까. 아무리 요즘 기분이 가라앉으셨다고 해도…….”
“이건 또 꽤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누가 단전을 부수기만 한다더냐. 새롭게 더 큰 단전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기운을 넣을 것이고.”
“아하하하……. 그런 게 가능하다니, 종남뿐만이 아니라 소림사도 기절해서 놀라 자빠질 일입니다. 그건 무공의 기본을 너무 무시하는 일이 아닙니까.”
건청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으나, 이어지는 천일영의 말은 지금까지의 놀라움으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강제로 깨달음을 주겠다. 그리고 내공은 처음엔 삼 갑자에 이르도록 하지.”
“깨…… 깨달음을 강제로 내려 주신다는 게 가능한 일입니까?”
새삼 이어지는 놀라운 말에 건청은 침을 삼켰다.
공자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굳이 무공을 배우는 일도 없이 편안하게 경지에 도달할 테니.
그러나 천일영은 건청의 그러한 표정을 읽기라도 하듯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좋아할 것 없다. 수백 번은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게 될 터이니 말이다. 몇 번이고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겠지.”
“그 정도로 힘든 일입니까.”
“시간이 없으니 과정을 압축하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고민하고 생각해서 찾아낼 깨달음의 단초를 내가 대신 강제로 줄 뿐이다. 그리고 건청아, 너는 최종적으로는 화경에까지 올라 줘야겠구나. 네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화…… 화경이요?!”
건청의 눈이 당황스러움으로 끔뻑거린다.
아니, 당황이 아니라 황당이라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건청은 다급한 마음으로 천일영의 옷깃을 잡았다.
“공자님께서는 종남의 무공을 그 정도로 끌어 올리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다. 무공도 새롭게 배워야 하겠지. 그러나 애써 종남의 무공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전에 말씀하셨던 공자님이 만든 무공입니까?”
“검법 일백칠십 초식, 수공 오십 초식, 그리고 보법 열 개와 신법 열다섯 개다. 물론 내공심법도 두 가지가 있구나.”
“공자님? 보법과 신법이 왜 그리도 많은 것입니까? 다른 문파와 비교해도 두 배가 넘는 양입니다.”
의아함으로 가득 찬 건청의 얼굴이 이해 못 할 표정으로 물들었다.
건청의 경지로는 이해할 수 없음이 당연한 일.
천일영은 자신이 수천 번이나 목숨을 걸었던 대가로 뼈저리게 느낀 것을 담담히 말했다.
“흔히 오해하기를, 검법이 강해야 무공이 강하다고 생각하더구나.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보법과 신법이다. 너의 목숨을 살려 줄 것은 검이 아니라 네 몸이니.”
“……!”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찌 알아듣지 못할까.
공자가 생각하는 무공의 길은 보통의 무인들과 격이 다르다.
건청은 천일영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새삼 스승과 사제 간이 되는 자리.
천일영에게 전부터 무공을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종남의 무공을 손봐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진정으로 새로운 무공을 배우게 된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사람의 목숨을 명부에 올리는 데 특화되어, 세간에서는 악독하고 사특(私慝)한 무공이라 손가락질할지라도 건청의 마음에는 흔들리지 않을 각오가 세워졌다.
“따르겠습니다. 부디 저에게 공자님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도구라니 당치도 않구나. 건청아, 너는 식구다. 그것을 언제나 잊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공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건청이 천일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공자님께 여쭙습니다. 귀한 무공을 하사받게 되었으나, 그 무공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부디 이제는 이름을 알려 주시지요.”
“응? 이…… 이름?”
천일영의 얼굴에 난감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건청도 천일영과 같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이름 말이지. 그게 말이다. 음…… 소오비천(㔅悟飛天)이었지! 그런 이름이다.”
“조…… 좋은 이름……입니다.”
건청의 목소리가 마구 떨리며, 천일영의 애를 쓴 답변에 화답하면서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분명 방금 지었다!’
절을 올리고 나서 고개를 들자 천일영의 새빨개진 얼굴이 보인다.
건청은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터지는 웃음을 이를 악물며 견뎌야 했으니까.
‘앞으로 수공이랑 보법, 그리고 신법에까지 이름을 붙이려면 고생 꽤나 하시겠구나.’
천일영이 머리를 싸매고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는 모습이 상상되자 결국은 건청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온다.
푸풉. 푸부풉.
사제 간이 되는 기쁜 자리가 왜 이렇게 웃긴 자리가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청은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흘렸다.
그때 새빨갛게 물이 들다 못해 터져 나갈 것만 같은 얼굴이 된 천일영의 입에서 마치 사신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호? 제법 재미있나 보구나?”
빠악!
건청의 눈에 찔끔하고 물기가 맺혔다.
진짜 죽을 만큼 아팠다.
아직 무공을 배우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살라 달라는 소리가 나올 지경이라니.
* * *
다음 날.
천일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가라앉은 기분을 떨치기 힘들어 창밖만을 내다보았다.
언제까지고 들지 않은 찻잔의 향이 식어 버린 지도 오래.
과거 무명암살대에서 단주의 자리에 있었을 때, 불귀의 객이 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이 백유화와 겹쳐 보이기 시작하여 천일영은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이 불편한 심정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기에.
‘어제 채홍이에게는 백유화의 뜻에 맡긴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적어도 무사한지만이라도 알았으면 하니 하오문에 의뢰라도 넣어 볼까. 이 망할 녀석에게서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으니.’
걱정과 쓸쓸함으로 문을 열고 한 발자국을 옮기자, 어느새 금채홍이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보폭을 맞춰 갔다.
걱정스러운 표정의 아래에는 천일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얼굴로.
금채홍은 천일영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피고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배시시 웃음을 짓는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전서구 하나 날리러 가는데 같이 갈 일이 무엇이냐. 여기에서 기다리거라.”
“그게 아니라 어제와 다른 말씀을 하는 공자님의 표정이 재미있는걸요.”
“큼큼, 자꾸만 이상한 버릇이 생기는구나. 그리도 재미있더냐.”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바라보는 눈길을 응시하고 있으니 날이 섰던 마음의 한 귀퉁이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다.
천일영은 금채홍과 함께 전서구를 날리러 밖으로 나섰다.
손을 들어 올리자 주변을 맴돌던 참매 한 마리가 오른팔에 앉은 순간.
천일영은 문득 얼굴이 밝아지며 의외의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전서구는 필요가 없을 듯하구나. 반가운 기척이 느껴지니.”
“반가운 사람이요? 설마?”
“백유화가 돌아왔다.”
약 삼십 리 떨어진 곳에서 문득 나타난 기운에 화색을 달리한 천일영은 참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에 다시 부르마. 날아가거라.”
참매가 햇살이 내려앉는 빛줄기 사이로 날아오르고 한 시진이 조금 넘게 흐르자, 오랜 시간을 기다린 백유화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차에 몸을 기댄 백유화의 모습이 보인 순간, 금채홍은 안도의 한숨을 퍼트려 나갔다.
하지만 뭔가 조금 이상함이 가득함을 느낀 금채홍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백유화는 혼자가 아니라, 본인이 타고 있는 우차 외에도 짐을 가득 실은 또 하나의 우차와 함께였다. 어디 그뿐인가. 그 뒤에는 조용히 백유화를 따르는 가녀린 여인 두 명도 함께였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무사하기만 하면.
“백유화 님!”
“내가 오는 것을 느끼고 기다린 것이냐.”
백유화가 금채홍의 미소에 화답이라도 하듯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백유화가 웃음을 지을수록 금채홍은 점점 기겁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갔다.
백유화를 향해 흔들던 손길이 점점 잦아들고, 이내 금채홍은 손을 내리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다름 아닌 백유화는 지칠 대로 지친 표정으로 우차에 늘어져 있었고, 몸 또한 온통 피를 칠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곁에 서 있던 천일영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가운데 금채홍이 경공술을 쓰듯 백유화에게 뛰쳐나갔다.
“어떻게 되신 건가요!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이런 모습이신 거예요. 게다가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시다니, 걱정으로 잠도 못 자는 나날이었습니다.”
“아, 미안하다. 사실은 사혈련에 다녀왔다.”
“사혈련이요? 그곳에는 왜…….”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너를 가르치려면 사혈련에서 발을 빼야 하는 것을.”
“그렇다면 이 피는 사혈련에서?!”
익히 들어 본 적이 있는 일이다.
사혈련이라는 곳은 들어갈 때는 쉬워도 나올 때는 목숨을 내놔야 한다고.
운이 좋아야 뼈마디가 부러지고 단전이 폐쇄되는 형벌로 그칠 뿐, 대부분은 죽어서야 사혈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러 사파의 단체가 모인 사혈련이라는 조직은 구심점이 약하기 때문에 이러한 형벌을 둠으로써 조직 간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백유화 님, 저 때문에…….”
금채홍의 붉어진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