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 누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백유화의 결단이 자신의 목숨을 건 것이라면 그것은 억만금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
금채홍은 핏물이 가득 말라붙어 있는 백유화의 손을 잡았다.
“사혈련에서는 얼마나 잡혀 있으셨던 건가요.”
“오가는 데 시간이 걸려 닷새 정도 있었구나.”
“그동안 그럼…….”
하루도 견디기 힘들었을 터인데 무려 닷새나 그곳에 잡혀 있었다는 말에 금채홍의 가슴은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무려 중원 십육 대 고수인 백유화를 이 지경으로 만들려면 닷새라는 시간이 걸릴 법도 하다.
그러나 그들의 끔찍한 행태에 금채홍은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분노는 몸을 떨리게 만들고, 눈에는 살기를 머금게 했다.
“도대체 사혈련에서의 닷새 동안 무슨 일을 당하신 건가요. 제가 강해지면 언젠가 그놈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응? 닷새 동안 무슨 일을 당했느냐고? 그건 알아서 무엇 하려는 것이냐.”
“백유화 님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제자 된 사람으로 참아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아니, 참아도 되는 일이다. 별일은 없었으니.”
“별일 아니라고 하시다니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고통……스럽기는 했지. 하지만 그 정도야…….”
백유화의 떨궈진 고개가 금채홍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맞잡고 있는 손도 아직 떨리고 있다. 백유화 정도 되는 사람이 손까지 떨릴 정도라면 분명 고문의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다는 말이다.
“말씀해 주세요!”
“아……. 그게 사혈련의 천주에게 애써 그만두고 나가겠다고 말했더니…….”
“계속 말씀해 주세요.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인가요?”
“갑자기 천주의 얼굴이 확 변했지. 나도 천주의 그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하아……. 백유화 님은 중원 십육 대 고수시니 낯빛이 변할 만도 하지요.”
“그 자리에서 천주의 명이 떨어졌다. 천주의 그런 큰 목소리는 좀처럼 듣기 힘든데…….”
며칠 전의 기억을 더듬는 백유화의 손길이 더욱 크게 요동치듯 떨렸다. 백유화는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천주의 입이 벌어지는 순간 그 자리에서 수백의 사람들이 덮쳐 왔다.”
“설마?”
“그래, 수백의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는…….”
“백유화 님!”
“모두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더구나. 제 발로 걸어 나가 줘서 고맙다고.”
“네?”
순간 금채홍의 눈이 튀어나올 만큼이나 커졌다.
마치 눈알이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백유화는 금채홍의 표정에 조금은 부끄러운 듯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천주는 골칫덩어리인 내가 사라져 줘서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지. 잔악한 사혈련에서조차 악독한 살인귀라고 악명을 떨치고 있어 내 이름을 지워 버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머지 장로들과 사람들은 천주까지 포함해서 닷새 밤낮으로 잔치를 벌였다. 제발 돌아오지 말라고 다들 입에서 침을 튀기며 말하더구나.”
“저기…… 백유화 님?”
“심지어 천주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더라. 오랜 시간 사혈련에 있었는데 천주의 그렇게 밝은 얼굴은 처음 봤지. 희귀한 구경이었다.”
뽀득.
순간 금채홍의 얼굴이 허망함으로 물들고, 앙다문 입술에서는 이가 갈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금채홍은 조용히 내리깔린 목소리를 입에서 내뱉었다.
“사혈련에서 닷새 동안 힘드셨다고 하셨잖아요. 조금 아까 힘들다는 듯이 고개도 떨구셨잖아요.”
“응? 닷새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술을 마셨더니만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것은 그때 마신 술 때문에 아직도 속이 메슥거려서구나.”
“그럼 손은 왜 떨리시는 건가요?”
“술을 너무 마시다 갑자기 안 마시니 계속 떨리네?”
“온몸에 묻은 피는요?”
“오는 길에 산적들이랑 나쁜 놈들 여럿을 도륙했더니만…….”
“뒤에 있는 우차는요? 사혈련에서 나오시며 가지고 나온 짐인가요?”
“아닌데? 사혈련에서 제발 돌아오지 말라고 잔뜩 선물을 줬다. 에헷.”
뿌드득.
금채홍은 조용히 백유화의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일영을 향해 나직한 목소리를 내었다.
“들어가서 잘래요. 그동안 걱정하느라 못 잤던 잠이 한꺼번에 밀려오네요.”
“잠시만 기다리거라.”
순간 천일영의 손길이 허공으로 내뻗어졌다.
그리고 보이지도 않을 만큼의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백유화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말 그대로 분노의 양만큼 내공이 실린 일격.
콰과과과곽! 빠아아악!
“내 걱정 물어내거라, 이 망할 놈아! 술 처먹다 인제 온 거였냐!”
“꽤애애애애액!”
거대한 내공을 실은 주먹에 백유화는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천일영은 백유화의 뒷덜미를 잡아 금채홍에게 던져 주며 감정이 치미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묶어라. 매달고 닷새 동안 내려 주지 말거라.”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묶을 만한 걸 가져오겠습니다.”
“됐다. 백유화의 품에 강선이 들어 있을 테니 그것으로 묶고 닷새 동안 검기를 흘리는 연습을 하거라. 닷새 안에 검기를 흘려서 백유화를 고문해 내지 못하면 내 손에 혼난다.”
“기꺼이. 시키는 대로. 얼마든지요.”
금채홍은 백유화를 꽁꽁 묶어 나무 밑에 거꾸로 매달았다.
그리고 강선에 검기 흘리기는, 치미는 분노로 인해 불과 하루 만에 성공해 냈다.
* * *
이틀 후.
천일영의 명으로 닷새 동안 매달아 두라는 것이, 죽어 가듯 앓는 소리를 그치지 않은 덕에 하루로 줄어들었다.
손이 묶여 있어 잘못했다고 입으로만 빌기를 천 번쯤.
겨우 자유가 된 백유화는 몸에 감긴 강선을 풀며 신음을 흘렸다.
“아주 온몸이 저리는구나. 나를 상대로 마음껏 검기를 흘리다니…….”
“그나마 공자님이 그만 용서해 주시라고 말씀하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세요.”
“끄응.”
백유화는 기특함과 괘씸한 마음이 번갈아 교차하는 표정으로 금채홍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상대로 강선에 검기를 넣을 때 금채홍의 표정은 분노 절반, 그리고 호기심과 참을 수 없는 재미가 배어 나오는 표정 절반이었다.
저 조그만 입술에 붉은 혀로 침을 발라 가며 검기를 넣던 모습이 생각나자 백유화는 조금 서늘해지는 감각에 뒤통수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예상은 했지만, 채홍이의 무재가 상상을 넘는구나. 강선에 검기를 넣는 것은 최소 육 개월 정도가 걸리리라 생각했는데 한 달도 안 돼서 깨우치다니.’
비록 뻐근한 몸에는 피곤이 가득 남았지만, 백유화의 눈에 웃음기 어린 실선이 그어진다.
해내지 못할 것임을 예상하고 한 달이라는 유예 기간만 준 것이고, 이후 죽도록 굴릴 생각이었는데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니 어찌 웃음이 나오지 않겠는가.
“내일부터는 경지를 올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겠구나. 이제는 검사를 사용해야 할 터이니. 그리고 검술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겠습니다. 헌데 백유화 님? 어제 같이 온 소저들은 누구입니까? 제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대답을 하지 않으시네요.”
“아……. 그 녀석은 내 제자들이다.”
“에엣? 저 말고도 제자가 있었던 건가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금채홍은 조금 서운한 느낌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도 그럴 것이 분명 백유화는 자신에게만 무공을 하사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귀여운 녀석. 그 표정은 무엇이더냐. 서운하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구나.”
“아니…… 그게 아니라…….”
“걱정하지 말거라. 그 녀석들은 무공이 아니라 의학 쪽의 제자니라. 애영과 화영이라고 한다.”
“아!”
금세 표정이 밝아지는 금채홍의 얼굴을 보자 백유화는 속으로 안심하는 미소를 짓는다.
순진하고 깨끗한 마음이 금채홍에게 남아 있는 것이 기쁜 것처럼.
“익숙해지면 그 아이들도 아는 척을 하겠지. 나처럼 낯을 가릴 뿐이니.”
“정말로 백유화 님과 비슷한 느낌이기는 했습니다.”
“느낌이 비슷할 테지. 내 제자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들도 자르는 걸 좋아하니까.”
“예? 설마?”
“요즘 한창 물이 올라서 말이다. 배운 것을 직접 확인한다고 살을 하나씩 저미듯 포를 떠서 보는 것을 어찌나 좋아하던지.”
“우웁.”
“무공도 모르는 것들이 이제는 산적만 보면 먼저 칼을 들고 달려드니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독도 다루기 시작해서 악당들을 보면 마비를 시키고 자르니 스승으로서도 기쁜 일이다.”
“우욱. 그…… 그 정도만 해 주세요. 상상되니까 어쩐지 속이…….”
“흐응? 뭘 겨우 이 정도로? 너는 항주 제일의 미친년이 목표가 아니었느냐.”
“네? 어찌 그것을? 설마 전에 우물가에서 했던 이야기를……? 전부 다 들으신 건가요?”
백유화의 표정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사실 그날의 일로 인해 밤새도록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비록 자신의 과거로 인해 그와 미래를 볼 수 없다 해도, 슬픔을 지우기에는 자신의 마음이 너무도 컸다.
“내가 있는 것도 몰랐다니, 한참 멀었구나. 그런 점도 포함해서 무공을 가르칠 테니 각오하거라.”
“아…….”
“뭐, 내 몸을 상대로 검기를 마구 흘려서 삐쳐 그러는 게 아니다. 그저 네가 빠르게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인 것을.”
“왠지 거짓말의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요? 설마 제가 몇 번이나 검기를 흘렸는지 일일이 세신 것은 아니죠?”
“뭐 삼백칠십팔……. 큼큼, 아무튼 오늘이 행복한 마지막 날인 줄 알거라.”
경악으로 물들어 가는 금채홍의 얼굴이 재미있어 한 번 웃음을 머금었던 백유화가 문득 객잔 주위를 둘러본다.
사혈련으로 잠시 떠나기 전에 봐 두었던 객잔의 터.
그것은 별유천지의 바로 옆에 있는 것으로, 장사를 하지 않은 지 오래되어 빈터로 나온 지 꽤 된 곳이었다.
‘이제야 내가 있을 곳이 생겼구나. 저곳에 집을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나도 모르게 사혈련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오랜 시간을 사혈련에서 지냈건만, 그곳이 집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곳은 불편하고 몸에 맞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공자님의 곁으로 왔을 때는 마치 이곳이 집 같았지.’
백유화는 가는 눈을 뜨고 가슴속을 채우는 기묘한 감정으로부터 안도했다.
‘가족이라는 게 아마도 이런 느낌 비슷한 것이었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백유화는 자신의 손을 펼쳐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수없는 사람의 피를 묻히며 살아온 기괴한 인생이었다.
하지만 그 피 묻은 손이 결국은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굴곡진 삶은 언제나 백유화에게 이를 드러내며 괴롭히기만 하는 불편한 존재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가장 원하는 장소로 길을 인도한 것이었다.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이 백유화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분명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
백유화는 자신의 손을 잡고 금채홍을 바라보았다. 이내 백유화의 얼굴에 비릿하고 잔인한 웃음이 퍼진다.
“채홍아, 생각이 바뀌었다.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시작하자. 일단 연무장을 백 바퀴 뛰는 것부터 시작할까?”
“네엣? 백 바퀴요? 저 죽을지도 모릅니다. 진짜 제가 스승님을 묶고 강선에 검기를 흘려서 복수하시는 건 아니죠?”
“아니다. 스승으로 제자가 성장하니 기쁜 게 당연한 법. 그러니 네가 더 빨리 강해지면 내 기쁨도 늘어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이백 바퀴.”
“에? 조금 전에 백 바퀴라고…….”
“삼백 바퀴.”
“다…… 달릴게요!”
금채홍이 다급해진 얼굴로 연무장을 향해 달려가기까지 백유화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이곳에 진료소를 만들고 나면 빠르게 경지를 올리려는 방편으로 각종 환단을 만들어 먹일 생각이었다.
그 자신에게 실험하여 이미 검증이 끝난 약. 하지만 약이 잘 받으려면 기초적인 체력부터 외공도 뛰어나야 한다.
‘내공만 죽도록 키운 무인들이 원래 제일 빨리 죽는 법이지.’
새파랗게 질려 있던 금채홍의 얼굴을 보고 내심 제법 즐거운 마음이 들었던 백유화가 추가로 어떻게 괴롭혀 줄지 고민에 빠지는 사이.
‘……!’
느닷없이 허를 찌르고 들어온 날카로운 기색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바로 등 뒤에 천일영이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린 채 살벌한 웃음을 짓고 있다.
“으앗! 천마님? 언제 등 뒤에?”
“이리도 간단하게 허를 찔리다니 너도 멀었구나.”
“아니! 그거야 천마님 정도 되는 분이 기척을 숨기니 제가 알 리가 있을까요.”
“흐음? 중원 십육 대 고수라는 사람이 이렇게 무뎌서야. 유화야, 너도 더 강해져야 할 듯싶구나.”
“여기에서 더 강해지라고요?”
“세상에는 화경이라는 경지가 있단다. 혹시 화경이라는 이름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잊은 건 아니지만 왜 화경을…….”
“돼 줘야겠다, 화경. 채홍이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는 것처럼 나도 네 무공을 손봐 주마.”
“히익! 화경이 무슨 되라면 되는 경지입니까? 그 마음을 깊숙이 넣어 두십시오. 저는 화경에 관심 없습니다.”
“시끄럽다. 너도 빨리 뛰어라, 삼백 바퀴.”
백유화의 표정이 순식간에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다름 아닌 자신이 금채홍에게 삼백 바퀴를 뛰라고 했으니 스승인 그녀도 당연히 뛸 수 있는 양이 아닌가.
천일영의 얼굴은 마치 그렇게 이야기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아니지. 너는 채홍이의 스승이니 사백 바퀴 정도는 뛰어야겠구나. 스승과 제자가 똑같이 할 수는 없는 법이지.”
“처…… 천마님?”
“오늘이 지나기 전에 전부 뛰려면 한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을 시간이 없을 텐데?”
천일영이 싱긋 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들어 올리자 백유화의 얼굴빛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했다.
“짧은 다리로 뛰려면 금채홍보다 두 배는 열심히 해야겠구나. 참고로 사백 바퀴를 뛰는 동안 내공은 사용 금지다.”
“아직 벌이 안 끝난 건가요? 저를 죽이시려고 그러시는 거죠?”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하느냐. 벌이 아니라 수련이다. 순수하게 수련.”
“아니…… 이런 무식한 수련은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 지금 듣지 않았느냐. 오백 바퀴.”
“네엣?! 오백 바퀴요?”
“육백…….”
“으악, 알겠습니다. 당장 뛸게요!”
허둥지둥 뛰어 올라가는 백유화의 뒷모습이 마치 식은땀으로 등까지 젖은 듯한 느낌이다.
짧은 팔다리를 바둥거리는 모습이 제법 우습게 느껴져 천일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뭐, 화경에 이른 사람이 둘이라면 앞으로는 걱정할 일이 없겠지.’
새삼 백수가 되기 위한 천일영의 계획이 이렇게 하나씩 실천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