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사…… 사람 살려.”
“주…… 죽겠다. 아니, 이미 죽었을지도.”
바닥을 기는 금채홍과 백유화의 몸에서 흐르는 땀은 마치 달팽이처럼 물기 가득한 자국을 바닥에 남겼다.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것조차 무리인 듯, 기어서 우물가를 향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천일영은 짐짓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 전부 내공을 금지하고 연무장을 뛰게 했으니 과연 땅바닥과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될 법도 하다.
“외공을 가다듬음으로써 내공도 증진이 되는 것이니 엄살 피우지 말거라. 내공의 그릇이 되는 몸부터 수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으냐.”
“알긴 알지만…… 아는 사실이 새삼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중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죽지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경계는 넘게 되겠지만.”
땅바닥에 엎어져서 우물을 향해 기어가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천일영은 객잔으로 내려왔다.
잠시 도와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마지막 과정까지가 수련의 끝맺음이라는 것을 생각하자니 지금보다는 나중을 위해 내버려 두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음이다.
씻고 침상에 누울 때까지가 수련의 마지막이니.
‘다음은 건청인가.’
천일영은 객잔의 마감을 끝내고 나오는 건청과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핥았다.
행복한 백수가 되기 위한 다음 희생양. 아니, 제자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기에 들뜬 마음으로 천일영은 웃음을 지었다.
“벌모세수를 시작하기에 적당한 때인 듯싶구나.”
“오늘입니까. 알겠습니다.”
건청은 천일영의 표정이 뭔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가끔 악당 같은 표정을 짓는 것도 보아 왔기에 의심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 * *
밤늦은 시각이 되었건만 건청은 마음의 떨림을 감추지 못했다.
보통의 무인에게 벌모세수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였기에.
기세가 세상을 덮을 만큼의 힘을 가진 세가가 아니라면 평생 인연이 없을 것을, 벌모세수를 마주한 마음은 이내 떨림보다도 더 강한 긴장을 안겨 주기 시작했다.
“기경팔맥인 임맥, 독맥, 대맥, 충맥, 양유맥, 음유맥, 양교맥, 음교맥. 또한 12경맥인 수태음폐경, 수양명대장경, 족양명위경, 족태음비경, 수소음심경, 수태양소장경, 족태양방광경, 족소음신경, 수궐음심포경, 수소양삼초경, 족소양담경, 족궐음간경까지 모두 타통시키고 탁한 기운을 거둘 것이다.”
“탁기가 이미 고인 지 오래되었을 터입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건청 네 나이 정도 되면 탁기라기보다는 이물질에 가까워지지. 서로 엉켜 있고 뭉쳐서 기가 통하는 길을 가로막는다. 허나 이물질을 뜯어내면 길이 넓어지니 경지가 높아짐은 당연한 일이다.”
“이물질을 뜯어낸다고 하니 왠지 무섭습니다.”
“실제로도 굉장히 아프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실눈을 뜨는 천일영의 표정이 무서움을 더했는지 건청의 이마 위로 긴 땀줄기가 흘러내린다.
실제로 어린 나이에 벌모세수를 받을 때조차 그 통증이 대단하여 정신을 잃는 혈도를 짚어 기절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
“기가 원활하게 흐르기 시작하고 청명한 기운이 몸 안에 차오르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맨정신으로 벌모세수를 받는 것이 좋겠지. 원리를 이해하는 것도 무공의 상승에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공자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옷도 벗거라. 그 편이 훨씬 네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느끼기에 좋을 것이다.”
“네.”
건청이 속옷 한 장만 남긴 채 엎드리자, 쓰다듬는 천일영의 손길이 몸 안 구석구석을 파악한다.
아끼는 제자이니 그만큼의 공을 들이는 것이었다.
“기운을 넣으마.”
“네.”
진기가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건청의 생사현관과 임독양맥을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끄으으윽. 크윽. 으으으윽.”
“내가 기운을 넣는 것이 느껴지느냐. 또한 이물질이 빠지는 것도 느껴지느냐.”
“너무…… 아파서 느낄 경황이 없……습니다. 크으윽.”
“탁기가 청명한 기운으로 바뀌는 것을 느끼는 것부터 시작하면 될 것이다.”
천일영이 건청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양손을 사용하여 벌모세수를 시작하자 건청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생각했던 이상의 고통이 엄습함에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경이다.
나이가 어려 탁기가 얼마 쌓이지 않았을 때나 벌모세수가 가능하다는 말도 이해가 갔다.
성인이 되면 탁기가 이물질로 변질하는데, 그것을 어찌 몸 안에서 꺼낼 것인가.
그야말로 공자나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나 아프다니, 제 몸 안에 이물질이 많은 모양입니다. 이만큼이나 더러운 기운이 쌓여 있다니. 크윽.”
“뭐 더럽다고 생각할 것까지는 없구나. 누구나 쌓이는 탁기이니. 일단 맨 먼저 임맥에 넣은 기운으로 탁기를 거두고, 뭉친 이물질을 거두어 내고 있다. 지금쯤이면 느껴질 때가 되었을 것이다. 기운이 들어가고 탁기가 빠지는 것을 느낄 때쯤 되면 기가 움직이는 것도 느껴지겠지.”
드르르륵.
순간 예고도 없이 거친 기색으로 가득한 기운이 문을 열어젖혔다.
건청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채 기묘하고도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향해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온통 건청에게 집중하고 있던 천일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영아?”
마음속의 슬픔과 거친 기세가 그대로 묻어나는 얼굴.
문 앞에는 천이영이 눈물이 글썽거리며 서 있었다.
“오라버니? 지금 무엇을 하시는 건가요?”
“응? 내가 지금 무엇을 하느냐고?”
기어이 눈물을 글썽거리던 천이영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방 앞을 지나다니면서 다 들었어요. 어찌 오라버니가 그런 짓을…….”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는 것이냐?”
“건청의 옷을 벗기고……. 넣는다고 하고, 뺀다고 하고. 또한 느끼라고 하시니. 게다가 건청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도 멈추시지 않는다니요. 흑. 어찌 오라버니가 그런 짓을 하신단 말입니까. 건청에게는 단옥이 있음을 잊으신 것입니까.”
“단옥? 넣고 빼? 느껴?”
“게다가 더러운 이물질이라니……. 하다못해 씻고라도 하실 것이지. 얼마나 급하셨으면……. 이 무슨 망측한 일이란 말입니까. 흐흑. 오라버니가 이러실 줄 몰랐습니다.”
타다다다닥.
울면서 뛰쳐나가는 천이영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음에, 천일영은 잠시 눈을 끔벅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두 번 눈을 깜박이고 난 후.
“아니야! 절대 아니야!”
천이영의 머릿속에서 그려질 법한 일이 떠오르자 목청 높여 여동생을 불렀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미 밖으로 나가 버린 천이영의 기감이 느껴질 뿐.
천이영을 따라가서 다급히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지금 당장 건청의 몸에서 손을 떼기에도 무리가 있음이다.
이미 건청의 몸 안에 들어간 기운이 기도를 타고 온몸에 퍼지고 있었으니까.
“빨리해야겠구나. 많이 아프겠지만 참아라.”
“공자님?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그러나 다급한 마음도 소용없이 천일영의 판단이 잘못되기라도 한 듯, 이내 눈물을 흘리며 천이영이 단옥까지 데리고 방으로 찾아왔다.
천이영과 단옥의 놀란 표정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어 간다.
“지…… 지금까지 계속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그게! 하던 건 마저 끝내야 해서 지금 멈추면 안 된단 말이다.”
“오…… 오라버니! 마저 끝낸다니요! 저와 단옥이 보는 앞에서까지 기어이 계속한단 말입니까!”
천이영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지려고 하자, 단옥이 눈물을 흘리며 쓰러지는 신형을 받쳐 든다.
이내 단옥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건청 오라버니, 빨리 일어나지 못해요?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나는 공자님의 말씀대로 느끼고 있을 뿐인데.”
“느껴요? 아아아…….”
천이영의 몸을 지탱하던 단옥마저 몸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지자 천일영은 건청의 머리에 내공을 가득 실은 장권을 날렸다.
빠악!
“오해를 키울 말은 하지 말란 말이다.”
“아악, 아픕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요.”
“하아…….”
한순간에 순진한 건청을 데리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이 되어 버린 천일영은 진심으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새삼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무공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며, 백수의 길은 그보다 열 배쯤 더 힘든 길임을.
* * *
삼 개월 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하남성(河南省)에 지어지는 기루는 그 어떤 곳보다 화려하고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다고.
그것은 안과 혜가 고의로 낸 소문이다. 그러나 결코 내용까지 조작한 것은 아니었다.
기루는 소문을 뛰어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천하에 이름을 알려도 모자라지 않을 곳이었다.
기루가 지어지는 동안 외관만으로도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많은 사람이 하남성으로 몰려들었다.
풍류(風流)와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라면 천하의 호색가(好色家)가 모이는 것이 인지상정.
수없는 사람들이 기루를 찾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이내 헛물을 켜고 고개를 숙이며 돌아서야 했다.
이미 천하를 논할 정도의 고위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예약하여 석 달이 지나도 들어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남성에 지어지는 기루는 그 덕에 더욱 부풀어진 소문과 관심의 대상이 되어 중원에 이름을 알려 갔다.
그리고 금일 기루의 개점식.
그러나 개점 준비로 분주하고 활기차야 할 기루에는 온통 살기등등한 기운만이 가득했다.
그 기운을 퍼트리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백유화. 그녀는 장평택을 노려보며 이가 보이도록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따라오시지요? 고운 말로 할 때.”
“안 간다. 아니, 죽어도 못 간다.”
“저, 목수님을 삼 개월이나 기다렸거든요? 제 진료소를 지어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기루의 공사가 끝난 지 벌써 열흘인데 왜 오지 않고 계신 거예요!”
“누가 짓지 않는다고 하더냐! 하지만 기녀와 술을 대접받기로 해서 남아 있었다. 미인들을 두고 어찌 남자가 등을 돌린단 말이냐. 그러니 닷새 뒤에 간다. 죽어도 닷새 뒤다.”
“미인? 그거라면 해결되었네요.”
“해결?”
백유화는 은근한 표정을 지으면서 치맛자락을 슬그머니 걷어 올렸다. 내보이는 하얀 종아리가 자신 있는지 백유화는 입술에 침을 바르며 짐짓 요염한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이런 미인 정말로 드문데? 원하시면 하루에 한 번 정도는 살짝 종아리를 보여 드릴 수 있어요. 기녀보다 낫죠?”
“흥! 난쟁이 똥자루만 한 게 새 다리 같은 것을 보인다 해서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뭐라고요? 난쟁이 똥자루? 새 다리?”
순간 난폭한 기운이 백유화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장평택 역시 흉흉한 기운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기어이 뜻을 굽히지 않고 백유화와 맞섰다.
하지만.
피이이잉. 피잉.
백유화의 손끝을 통해 날아든 강선이 장평택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 한 번 깜박일 시간이 지난 후, 장평택은 온몸이 강선으로 꽁꽁 묶여 끝내 운신하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거 안 푸느냐! 기녀가! 술이! 내 인생의 행복이란 말이다! 이 악독한 것아!”
“흥, 난쟁이 똥자루가 얼마나 성질이 더러운지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백유화는 강선에 묶은 채로 장평택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살아오면서 지금만큼이나 집과 진료소를 가지고 싶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호한 의지를 꺾지 않을 표정이다.
백유화는 장평택이 항주를 향해 걸을 수 있도록 몸을 조종하며 입을 열었다.
“공자님, 저는 먼저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알았다. 헌데 유화야, 장평택을 너무 구박하지 말거라.”
“세상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 난쟁이 똥자루. 이 말을 꺼낸 이상, 더 이상의 자비는 없습니다.”
“장 목수가 왠지 불쌍하군. 무척이나 기대했던 모양인데.”
“뭐, 술 정도는 주도록 할게요. 병아리 눈물만큼만.”
백유화는 고운 표정을 천일영에게 남기고는 장평택을 앞세워 밖으로 나섰다.
구슬프게 울려 퍼지는 ‘기녀’와 ‘술’이라는 말만이 잔물결처럼 기루에 울려 퍼질 뿐.
“하아.”
천일영의 곁에 서 있던 은소혜가 태풍과도 같았던 백유화의 뒷모습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공자가 전에 이야기했던 흉포한 사람이라는 말이 딱 맞다.
그러나 여전히 귀여운 것도 사실. 은소혜는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녀가 주인이 된 기루의 첫 시작이다.
“객잔의 개점입니다.”
“네.”
기루의 문이 열리자 이내 고관대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