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천일영이 기루를 만들며 생각했던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전각으로 높이 지으면 무림맹의 내부가 훤히 보여 의심을 사겠지. 그래서 장원으로 만들되 그 크기를 키우고, 손님도 하루에 다섯만 받을 만큼 호화롭게 지었다. 마치 황실과 같이 연못에서 술을 마시고, 달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천하를 주제로 시를 짓는 것처럼.’
그리고 또 하나.
무림맹의 무인들을 상대로 정보를 탈취하기 위한 기루이니만큼 일부러 궁금하게 만들었다.
고관대작들이 예약하게 만들어 당분간은 무림맹에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와 달라고 사정하면 반대로 오기 싫어지고,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곳이라면 미치도록 궁금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까.
그리고 은소혜와 세하월의 말에 따르면 금일 무림맹에 속한 무인들이 웃돈을 주고서라도 삼 개월 후의 예약을 전부 잡았다고 했다.
기루의 이름값 그대로 되어 가는 것이었다.
화려한 정문 위 현판에 걸린 이름 목천월향(牧天月香). 달의 향기를 맡으며 천하를 기른다는 뜻이다.
그 이름 그대로 고위 관직이나 크게 성공한 상단을 가진 자가 아니면 들를 수 없을 만큼 고급이라는 의미.
이러하니 무림맹에 속한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높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유의선이 기루에 들어섰다.
“허허, 대단하다고 제가 소문을 냈지만, 화려하고 아름답기가 천하제일이라는 말도 아깝군요. 황실도 이 정도는 아닙니다.”
“승선포정사사께서도 고관대작들이 예약을 할 수 있도록 힘써 줘서 고맙군.”
“별말씀을요. 오늘은 모시고 온 분들이 계시니, 이따 밤에…….”
유의선이 천일영을 향해 눈을 한 번 찡긋거리고 기루의 방으로 들어섰다. 천일영은 그 눈짓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석 달 전에 건청과의 사이에서 생겼던 오해가 떠오른 탓이었다. 그날 이후 여동생과 단옥에게 설명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남자라면 사절이다. 눈 찡긋거리는 것도 무섭다. 제발 부탁인데 그냥 말로 해라.’
천일영은 다시 한번 돋아 오르는 소름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 * *
하루를 넘겨 새벽이 된 기루의 숨겨진 방.
유의선과 세하월, 그리고 탁현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제갈현이 천일영과 밤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지천번회가 미흑천에 자금을 대어 주고 회수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천주 강일택을 고문한 결과 지천번회는 항주의 낙원촌을 원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왜 빈민촌을 원했는지는 강일택조차도 모릅니다.”
“그곳을 노리는 이유는 하나뿐일 터다.”
“하고 많은 곳 중에서 빈민촌입니다. 그곳에 그럴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납치다. 빈민촌은 매일같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지. 굶어 죽든, 병들어 죽든. 그래서 누가 없어져도 알지 못한다.”
“……!”
“조금씩 사람들을 납치해도 새로 들어오는 빈민들이 메우니 티도 안 나지. 사람이 죽어 나가고 사라지는 것은 빈민들에게는 일상이다.”
천일영의 말에 유의선이 눈을 반짝인다. 하나의 실마리.
“빈민들이 지천번회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방지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사천당문과 종남파가 빈민 구제를 하고 있다. 빈민은 삶이 좋아지면 빈민가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지지. 다만 치료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 말씀은…….”
“수저를 얹는 정도는 허락하마. 다만, 공짜로 얹을 생각은 하지 말거라.”
천일영이 실눈을 뜨며 시커먼 속내를 드러내자, 이내 유의선도 능글스러운 웃음으로 맞받아친다.
“사천당문으로 금화 천 냥을 보내고 식량을 따로 지원하겠습니다.”
“금화 천 냥? 분명 수저만 얹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을 터다. 금화 삼천 냥이다. 승선포정사사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금액이겠지만.”
“위에 계신 분들이 내리는 돈이니 액수야 상관이 있겠습니까. 저는 말만 전달할 뿐입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추가로 병력과 다수의 사람을 동원해 줘야겠다.”
“이천 명 정도 준비하겠습니다.”
천일영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서로 얻을 것을 받아 냈으니 더는 엮이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들은 유의선도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천일영에게 거둬지고 나서야 지천번회에 대해 알게 된 제갈현이 보는 시선은 전혀 달랐다.
“지천번회는 모습을 숨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원의 정세에 너무 밝습니다. 놈들은 적재적소(適材適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놈들은 숨을 때와 나설 때를 구별하고 있는 듯하더구나.”
“혹 그들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이유가 정보를 사기 때문은 아닌가?”
유의선의 말에 세하월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하오문의 문주. 지천번회가 정보를 요구했다면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개방 또한 아닐 것입니다. 개방은 분타주와 총타가 각각의 지역을 운영하는 터라, 천하를 아우르는 정보가 개방 내에서 이동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들이 세간의 동향을 알고, 또한 정체를 교묘히 숨긴단 말인가.”
유의선의 한탄 섞인 답답한 심경에 제갈현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가장 불길한 생각을 입으로 꺼냈다.
“누군가 정보를 대 주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천하를 아우를 만큼의 거대한 정보를 뛰어넘는, 모든 세상의 이야기를 말입니다.”
제갈현의 말에 유의선은 얼어붙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이미 유의선이 생각하는 지천번회의 규모를 훨씬 상회하는 이야기가 되어 버린 까닭이다.
그러나 천일영은 유의선의 놀란 표정을 앞에 두고, 잠시의 생각을 거친 후 이내 입을 열었다.
딱히 내키지는 않는 일이지만 더 피곤해지기 전에 두세 수를 앞서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제갈현은 하오문과 개방. 그리고 천마신교와 사혈련. 또한 무림맹을 이야기하는 것인가. 황실은 예외로 두더라도 말이다.”
“맞습니다.”
“그렇다면 함정을 파 보도록 하지. 천마신교와 사혈련, 그리고 무림맹을 상대로.”
“함정이라니 어떠한 것입니까?”
“딱히 새롭지 않아도 된다. 지금 사천당문과 종남파가 실행하는 빈민 구제만으로도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빈민 구제로 말입니까? 공자님의 한 수는 제법 어렵군요.”
“제갈현이라면 모를 리가 없을 테지. 너라면 장기판의 말을 어떻게 움직이겠느냐.”
“아!”
제갈현은 천일영의 생각을 알았다는 듯이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장기 말만 움직여서 상대편의 목줄을 졸라매는 계획.
황실에서 개입한 이때라면 더할 나위 없는 책략이다. 이것이야말로 지천번회를 넘어서는 적재적소가 아닌가.
제갈현의 얼굴에 음흉한 기색이 떠올랐다.
* * *
한 달 후.
안과 혜는 오랜만에 사천당문을 떠나 자유가 된 몸인 듯 기지개를 켜며 하남성의 한구석을 바라보았다.
“빈민촌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저, 혜도 마찬가지의 생각입니다. 무림맹과 멀리 떨어지지 않고, 빈민 또한 많은 곳입니다.”
안과 혜의 말에 천일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천마신교를 상대로 귀천명에 빈민 구제를 빌미로 사람들을 보냈고, 사혈련의 주변으로도 상당한 규모의 인력을 배치했다.
그리고 지금, 무림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슬슬 쉴 준비를 해야겠구나. 천마를 때려치우고 더 바쁘게 살았으니. 안, 그리고 혜야, 뒤를 부탁한다.”
“사천당문을 관리하며 하오문과 협력하고, 유의선에게 정보를 넘기는 일 말입니까?”
“잘 알고 있구나. 나는 이제 진정으로 여동생과 조카와 조용히 살고 싶다.”
“뜻이 그러하시니, 저희는 따를 뿐입니다.”
천일영은 진심 어린 눈으로 안과 혜를 보며 웃음을 지었다.
“너희도 내 곁으로 올 날이 빨라지도록 준비하거라. 내가 원하는 삶은 너희도 함께 있는 것이니.”
“아……! 알겠습니다.”
“오래 걸렸구나. 이제 너희에게 겨우 아비 노릇을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천일영의 쓸쓸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보자 안과 혜의 가슴이 울컥거린다.
분명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었으나, 어느새 앙금과 마음의 찌꺼기가 모두 사라진 지 오래인 듯.
안과 혜는 고개를 숙였다.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믿으마.”
천일영은 빈민들의 거친 삶 속에 자신이 지나온 것만큼의 슬픔이 배어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빈민의 삶이란 눈으로 보고 마음에 닿는 만큼의 슬픔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빈민들은 이 빈궁한 삶에 납치까지 당해야 하는가. 놈들은 분명 자신들의 거처 근처를 납치하는 장소로 정했을 것이다. 먼 곳에서 납치하면 이동하고 관리하는 동안 발각 날 우려가 크다. 한둘이면 몰라도 많은 사람을 납치할 때는 더욱.’
천일영이 생각한 계략은 사천당문과 종남파가 시행하는 빈민 구제를 각 삼 대 세력 코앞으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구제받은 빈민들을 납치하기 힘들어지면 뭔가 반응을 보일 것이기에.
천일영은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은퇴할 각오를 굳히면서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덫에 걸리는 것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가만두지는 않을 것이었으니까.
* * *
보름 후.
똑똑.
“사마정인가? 들어오거라.”
“네.”
이미 기감으로 사마정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남궁천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의자에 몸을 고정했다.
“어쩐 일이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라 판단이 되는 일이 생겨 찾아뵈었습니다.”
“급한 일?”
남궁천의 가슴속으로 불길함이 찾아들었다.
한동안 조용하기를 몇 개월. 그동안 그를 괴롭히던 평지풍파(平地風波)도 가라앉았거늘 무슨 일이 생겼단 말인가.
허나 사마정은 의아함으로 물들어 가는 남궁천에게 꿈이라도 깨라는 듯 강경한 어조를 이어 갔다.
“사천당문과 종남파가 하남성에 들어왔습니다.”
“빈민 구제를 하는 놈들인가?”
“그러합니다.”
남궁천은 잠시 불길했던 마음을 지우고 웃음을 지었다.
큰일이라고 하기에는 소소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번에 하남성으로 들어온 자들은 황실에서 파견된 사람들과 함께입니다.”
“황실?”
“빈민들에게 약을 지어 주는 것만이 아니라 밥도 같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민의 약자에게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역할까지 하고 있으니 급한 일이라 판단이 된 것입니다.”
“뭐라고!”
순간, 남궁천의 서슬 퍼런 기운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또다시 방해가 들어온 것에, 남궁천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동안 숱하게 당해 왔는데 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에, 남궁천은 분을 참아 내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콰아앙!
순간 가루가 되다시피 박살이 나 버린 탁자 사이로 나무 분진이 피어나는 가운데 남궁천의 목소리가 나직이 뱉어졌다.
“보고는 이제 됐다. 해결할 방도는?”
“현재로서는 없습니다. 황실에서 보낸 사람들이 섞여 있으니 비록 사천당문과 종남파가 있다 한들 관무불가침으로 관여하지 못합니다.”
“그따위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다.”
“…….”
사마정의 묵묵부답이 남궁천의 속을 더욱 태웠다.
남궁천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앞으로 납치해야 할 사람들의 수가 어찌 되느냐.”
“간신히 일천 명, 넉넉하게는 일천오백 명 정도가 더 필요합니다. 허나 근래 빈민의 삶이 좋아지니 날아갈수록 사람들을 납치하기가 힘든 것 또한 사실. 이번에 황실의 개입으로 인하여 저희의 일이 더 늦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해결할 방도가 없느냐. 그 무엇이라도 좋으니 이야기를 해 보아라.”
“그리 말씀하신다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제는 더는 일을 미룰 수 없으니 피를 보시는 것이 어떠하실까 합니다.”
고개 숙인 사마정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뜻을 어찌 알아듣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남궁천의 얼굴로 수십 마리의 뱀이 꿈틀거리는 듯한 주름이 지어졌다.
“암살대 천살천(天殺千)을 부르거라. 하남성에 들어온 종남과 사천당문, 그리고 황실에서 보낸 놈들까지 모조리 죽인다.”
“천살천이 하남성으로 오기까지는 대략 칠 일. 실패가 없도록 모든 준비를 끝마치겠습니다. 그러나 굳이 하남성에 들어온 사람들을 칠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차라리 조금 떨어진 호북성은 어떠십니까.”
“호북성을 치는 것이 더욱 오해를 키울 것이다. 무림맹이 있는 곳에서 일이 벌어진다면 오히려 작위적으로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처럼 보일 터. 우리는 그것을 이용하면 될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리하면 눈에 보이지 않게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사마정이 물러나자 남궁천은 술병을 찾아 열기 시작했다.
‘젠장, 천살천은 지금 쓰면 안 되는 자들이건만. 미래를 위해 키워 놓은 살수들이란 말이다.’
총수가 오백에 달하는 거대한 살수 단체.
그들의 실력은 하나의 세가와 대등한데, 이런 일에 사용했다가 정체라도 탄로 나는 날이면 여러모로 곤란할 터다.
하지만 남궁천은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 냉정함은 머리를 식혀 새로운 것을 보이게 만드는 법이니까.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터. 이번에 하남성에 들어온 당이 놈들과 종남을 몰살시킨 후 소문을 내면 될 것이다. 누군가가 빈민 구제를 하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어 근처에 갔다가는 죽는다고. 아무리 빈민들이라 해도 목숨은 아까운 법. 종남과 사천당문도 큰 타격을 입고 손을 떼겠지.’
위기가 기회가 된다고 했던가.
전에는 빈민을 구제하는 사천당문과 종남을 건드렸다가는 자신을 의심하는 눈초리가 생길 것을 우려하여 참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기회는 무림맹이 있는 하남성이다.
자신의 앞마당에서 큰 사고를 칠 바보는 없다는 생각이, 오히려 의심의 눈초리를 벗어나게 해 줄 터다.
남궁천은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천운은 아직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