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서하린은 월영이 젓가락질을 멈추든 말든 관심조차 두지 않고 주변과 점소이의 행동을 살폈다.
점소이가 멀리 떨어졌을 때, 서하린의 느닷없는 목소리가 들으라는 듯 터져 나왔다.
“이놈의 객잔은 음식의 양이 왜 이렇게 적어? 간에 기별도 안 가네. 점소이!”
서하린은 점소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오십의 금군이 떠들고 있는 객잔 안에서 서하린의 목소리가 점소이에게 닿을 리는 없을 터.
서하린은 짐짓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 점소이를 향해 걸어갔다.
“점소이!”
서하린의 제법 큰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금군들이 젓가락질을 멈추고 의아한 눈길을 주었지만, 답답한 표정을 지으며 빠른 발걸음을 하는 여인에게서 금방 시선을 돌렸다.
눈가를 시커멓게 칠한 너구리 같은 여자에게 관심이 갈 리는 없었으니까.
솔직히 조금 정신이 나간 여자 같아서 급히 눈길을 돌렸다기보다는 피했다는 말이 옳을 터다.
그리고 그 순간.
우당탕탕. 챙그랑.
서하린은 바닥에 코를 들이박고 대자로 엎어졌다.
금군의 검에 다리가 걸려 넘어진 것이었다.
“아야야, 아파!”
“소저!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금군의 높은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급히 서하린의 팔을 잡아 올렸다.
땅바닥에 처박힌 얼굴을 서하린이 드는 순간.
양쪽의 콧구멍에서 피가 주룩 흘러내린다.
금군의 높은 사람은 놀라면서도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참았다.
“푸풉, 검을 두기에 자리가 마땅치 않아 탁자에 기대어 놓았는데 사람이 다칠 줄을 생각도 못 했습니다. 푸부붑, 피 묻은 옷과 치료비는 변상하지요.”
“신발값도 물어내라.”
“신발에는 코피가 안 묻었습니다만?”
“알 게 뭐냐. 그리고 이거 비단옷이다. 내놔라, 은자 한 냥.”
“허허, 은자 한 냥이면 무척 큰돈입니다.”
하지만 금군의 높은 사람은 말과는 달리 돈을 꺼내 서하린의 손에 쥐여 주었다.
빠르게 소동을 진정시키려는 것처럼.
서하린은 금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주저 없이 돈을 낚아채고는 소리를 질렀다.
“점소이!”
“예? 예!”
“몇 번을 불러야 오는 게냐! 네놈이 부르는 소리를 못 들어서 찾아가다가 다쳤잖느냐!”
“죄…… 죄송합니다.”
“매채구육(梅采拘肉)하고 향고유채(香姑油菜)를 더 가져와라.”
“네네, 알겠습니다요.”
“네놈! 너 때문에 이렇게나 다쳤는데 설마 음식값을 다 받지는 않겠지?”
“아이고!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값을 어쩌지는 못합니다.”
“술이나 한 병 가져와라. 그럼 용서해 주마.”
“백건아(白乾兒) 한 병 정도라면 제가 드릴 수 있습니다.”
“싸구려 술이군. 뭐, 그걸로 됐다.”
서하린은 패악을 한바탕 떨고 나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코피가 흘러내렸지만 받은 은자의 대가라고 증명이라도 하듯, 닦을 생각을 하지 않자 월영은 도무지 영문이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음을 날렸다.
[지독한 손님이네요. 점소이에게 술을 뜯어내다니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못된 여자인 척을 한 거다. 금군에게 은자를 한 냥이나 뜯어냈는데 점소이한테 아무 소리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볼 것 아니냐.]
[근데 왜 넘어지는 연기를 하신 겁니까?]
[놈이 내 손을 잡을 때 옷과 손에 천리미향(千里迷香)을 발랐다. 그걸 위한 거다.]
[추적향이군요. 보기보다 머리가 좋네요?]
[닥쳐라. 화장을 안 하고도 내 눈처럼 되고 싶냐?]
그때 점소이가 급히 주문한 음식을 들고나왔다.
눈가가 퀭한 것이 객잔 주인에게 그새 한마디 들은 모양이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러지.”
점소이가 떠나자 서하린은 다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전부 다 먹어야 한다. 남기면 의심할 테니.]
[히익! 너무 많습니다.]
[참고로 나는 소식한다. 무슨 말인지 알지?]
[소저의 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 제가 희생해야 하는 겁니까?]
[당연한 걸 자꾸 묻지 마라. 대답하기 피곤하다.]
서하린의 독기 서린 눈빛과 전음에 월영의 표정이 절망으로 물들어 간다.
이 여인과 같이 다니고 난 이후로 제법 고생길이 열린 듯했으니, 언젠가는 공자님에게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 전부 다 불겠다고 다짐하며 월영은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 * *
서하린은 배가 터질 지경이 되어서 방에 대자로 누운 월영을 뒤로하고 창문에 섰다.
이미 천리미향을 뿌려 놓아 금군의 높은 사람이 있는 방은 파악했기에 서하린의 눈매에 광채가 돌았다.
“너는 잠시 방에서 대기하거라.”
“어디 가십니까?”
“남자만 둘이 있으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졌다.”
“진짜 뜬금없다니까.”
휘익.
서하린의 신형이 경쾌하게 옆 객잔으로 날았다.
타탁.
비록 나이가 어린 탓에 마왕임에도 절정 고수의 경지이지만, 서하린은 독천마왕 가문 특유의 잠복 기술로 소리조차 거의 내지 않았다.
빠르게 창가에 몸을 기대자 희미하게 안에서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휘관님. 아까 그 너구리 같은 미친 여자에게 은자를 한 냥이나 뜯겼는데도 참으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좋으니 은자 한 냥 정도는 괜찮다. 이번 일로 우리가 받는 돈이 지휘관인 나와 부지휘관인 네가 금화 네 냥이지 않으냐.”
“아무리 그래도 멀쩡한 신발까지 물어내라니 돌아도 한참 돈 여자입니다.”
풋.
서하린은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천이영 여주인이 무서워서 신발을 새로 사려 했는데, 뜯어내는 김에 그 값까지 받아 낸 자신의 교활함에 대한 자화자찬인 웃음이다.
“일반 금군조차 금화 두 냥이다. 이 돈 때문에 금의위(錦衣衛)의 인간들까지도 나서겠다고 난리였지.”
“평생을 고생해도 만지지 못할 돈이니 말입니다. 게다가 임무가 수행되는 동안 먹고 입는 것까지 모두 최고 대우라니 누군들 오고 싶지 않겠습니까.”
“빠르게 이동하는 것이 피곤한 일이지만 청해성까지만 가면 끝난다. 이후에 거하게 한번 놀아 보자.”
“하하하. 기대가 큽니다. 내일 사천성으로 가는 길은 산세가 험하니 일찍 주무시지요.”
훅.
방의 불이 꺼지는 것과 동시에 서하린의 입이 다물어지고 눈에는 살기가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서하린은 이내 냉혹한 표정을 짓고 검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 들어가서 저놈들을 고문해 임무가 무엇인지 밝히려 했는데…… 과연 조용하게 넘어갈 수 있을까.’
서하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이내 잡으려던 검의 손잡이를 그대로 두고 몸을 날려 자신이 묶는 객잔의 창으로 돌아왔다.
‘금군. 관무불가침.’
단 두 마디가 서하린의 발목을 잡았다.
같은 무림의 인간이라면 이미 피 칠갑이 되도록 고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금군의 높은 사람을 건드리면 그 일의 규모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커질 터.
서하린은 생각에 잠겨 깨물던 손톱에서 입을 뗐다.
‘저놈들의 몸에서 나는 탄내가 계속 신경 쓰이지만, 일단은 예정대로 하남성으로 가며 놈들의 흔적을 밟는 게 좋을 것 같군. 놈들의 목적지가 청해성이라는 것을 알아냈으니.’
월영은 뭔가 생각을 끝마친 듯한 서하린이 갑자기 자신을 노려보자 몸을 움찔했다.
“야! 이 야심한 밤에 왜 처녀의 방에 있는 거냐. 빨리 안 나가?”
“아니? 대기하라면서요? 도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진짜 뜬금없고 성격 이상합니다.”
“시끄럽고. 나갈 때 문이나 잘 닫고 나가라.”
월영은 한마디만을 툭 던지고는 생각에 잠겨 있는 서하린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뭔가 냄새를 맡은 것인지 이미 자신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모습이다.
월영은 서하린의 집요한 성격에 혀를 내두르며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 * *
아침 일찍 월영을 깨운 서하린은 길을 떠나기 전 잠시 시장에 들렀다.
작은 마을에 어울리는 조그만 시장이지만 먹을거리와 신발, 그리고 옷을 사기에 나쁘지만은 않은 곳이다.
서하린은 길을 지나다 문득 물건 하나를 보고는 눈을 빛냈다.
“주인, 이 봇짐으로 사용할 수 있는 보자기는 얼마인가?”
“등짐으로 맬 수 있는 끈까지 포함해서 철전 오십 냥입니다.”
“하나 주게.”
느닷없이 봇짐을 사는 서하린의 모습에 월영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열흘쯤 후에 냄새를 풍길 이 소저가 드디어 봇짐을 사는 것으로 깨끗해질 터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러나.
“들어라.”
“네? 저는 이미 봇짐을 들고 있는데요?”
“한 개나 두 개나 다를 게 없잖아. 아니면 연약한 내게 기어이 봇짐을 들게 할 거냐?”
“소저가 연약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닥쳐. 들어. 맞기 전에.”
“하아…….”
그때 서하린의 손길이 봇짐을 건네면서도 눈길은 어떤 한 물건에 고정되었다.
대나무를 깎아 만든 바람개비.
봇짐을 던지다시피하고는 한걸음에 달려가 두 개를 집어 드는 서하린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얼마인가?”
“한 개에 철전 닷 냥입니다. 두 개 해서 열 냥 주시면 됩니다.”
“여기 있네.”
급작스럽게 부드러워진 표정의 서하린을 보며 월영은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저 표독스럽고 사악하며 성격 나쁜 안 씻는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정도라니.
“갑자기 웬 바람개비입니까?”
“내가 항주가 있는 절강성에서 나올 때마다 강서성으로 이어지는 마을에 들르거든. 그곳은 시장과 객잔도 없을 만큼 작은 마을인데 항상 나를 재워 주는 집이 있다. 그곳 딸들에게 줄 선물이다.”
아이들을 떠올리는지 서하린의 표정은 월영이 난생처음 보는 행복함에 물들었다.
“그곳에 몇 번이고 들르다 보니 아이들하고 친해져서 말이다. 한번은 아이들이 놀아 달라고 해서 이틀이나 묵은 적도 있다. 온종일 아이들하고 놀다 보니 해가 져 있더군.”
“꽤나 귀여워하십니다.”
“응, 너무 귀엽다. 만옥과 순옥이라는 아이인데 어디에서 들었는지 바람개비 이야기를 하더구나. 나도 파는 곳을 찾지 못했었는데 여기에서 이걸 보게 되다니.”
새하얀 이가 보이도록 웃는 모습에 월영은 툭 떨구듯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봇짐을 제가 들 테니 바람개비 이리 주십시오.”
“아니다. 괜히 망가질까 봐 무섭네. 봇짐은 내가 들겠다.”
서하린은 여분의 옷과 신발, 그리고 육포 등을 챙겨 넣은 봇짐을 멨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마을의 어귀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제 놈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아볼까.”
“흔적을 밟아 가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꽤나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지요. 시간이 오래 걸릴 것입니다.”
“이젠 말해도 되겠지. 한 달이 넘는 동안 네놈이 어떤 놈인지 잘 봤으니.”
“제가 모르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까?”
서하린은 월영의 말에 음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천마신교에는 독을 다루는 마왕 가문이 두 개가 있다.”
“또 뜬금없이 마왕 가문 이야기입니까? 독을 다루는 가문이 두 개가 있다는 것은 저도 압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느냐. 하나의 집단에 두 개나 되는 독을 다루는 곳이 혼재해 있는 것이.”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러긴 합니다.”
“이유는 두 가문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독마왕 가문은 대량으로 독을 터트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곳이다. 하지만 독천마왕 가문은 그와 달리 사람을 추적하여 찾아내고 독살시키는 것을 주로 하는 가문이지.”
“독천마왕 가문은 추적 기술을 가진 살수에 가깝다는 말입니까? 그건 굉장히 무서운 기술입니다. 헌데 소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독천마왕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에?”
“아니다.”
월영은 부정하는 서하린의 얼굴을 보며 의아함이 드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부정할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나.
“나는 독천마왕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 독천마왕 본인이다. 그러니 추적에 관한 걱정은 접어 둬라.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놈들의 흔적을 빠르게 찾아낼 테니.”
“네에? 소저가 바로 독천마왕 본인? 어쩐지 성격이 안 좋다 못해 더럽다고 생각했더니만!”
“호오? 네놈이 기어코 나에게 눈 화장 하는 법을 배우고 싶은가 보네.”
빠악!
순식간에 날아온 서하린의 권에, 월영은 얻어맞아 밤탱이가 된 오른쪽 눈을 연신 문질러 댔다.
“그동안 내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지?”
“그렇군요. 소저의 이름과 성격이 동시에 알려지면 시집도 못 갈 테니.”
빠악.
“크아악.”
월영은 양 눈을 비비며 몸을 떨었다.
독을 다루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손놀림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다.
“흐음, 양 눈이 모두 시커멓게 되니 너구리 같기는 한데 정말로 귀여운 맛이 하나도 없구나. 너에게 화장술을 알려 주는 건 그만둬야겠다.”
“누가 배운다고 했습니까!”
눈물을 줄줄 흘리는 월영이 앞을 못 보는 사이.
서하린은 조금 전, 순옥과 만옥을 떠올렸을 때 지었던 부드러운 표정을 몰래 떠올렸다.
‘외부인에게 내 정체를 알려 준 것은 네가 처음이다. 그만큼 네가 믿을 만하구나.’
하지만 마음과 달리 서하린은 월영의 귀를 잡고 강제로 이끌었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 앞에서 붉어지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빨리 가자.”
“아파! 아프다고!”
월영은 눈물을 흘리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서하린의 손길에 이끌려 하남성으로 가는 산줄기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