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쿵.
진정으로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감각과 함께, 천일영의 주먹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서가흔도 그렇게 허무하게 보냈는데 너만은 절대 못 보낸다!”
콰앙.
서하린의 가슴으로 다시 한번 주먹이 떨어지자, 이내 서하린의 입으로 숨결이 몰려 들어갔다.
“콜록! 콜록!”
“하아, 정신이 드느냐.”
“어……? 천마님이시다. 천마님이 왜 여기에 계셔요? 정말로 좋아해요. 천마님.”
“이런 바보 녀석. 눈을 뜨자마자 하는 소리가 겨우 그거냐.”
“아……. 이거 죽기 전에 보이는 환영이지만 마지막으로 좋아한다는 말을 전할 수 있어서 다행…….”
스륵.
서하린의 고개가 다시 옆으로 기울었다.
천일영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과 같은 마음에 급히 맥을 짚었다.
“공자님! 서하린 소저가 잘못된 것입니까?”
“아니다. 이번에는 그저 정신을 잃었을 뿐이구나. 다만…….”
분명 정신을 차려야 했다.
오랜 시간 여러 사람의 몸을 고쳐 왔던 경험이 말하기를, 서하린이 지금 정신을 잃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이지?’
천일영은 허공으로 진기의 실을 띄워 서하린의 몸 곳곳에 집어넣었다.
문제가 생기면 바로 알아차리도록 온몸으로 기운을 넣고 기도를 활짝 열어 놓은 것이었다.
당분간은 기도를 타고 수많은 기운이 움직여도 진기의 실에서 나오는 기운이 그것을 감당할 터. 서하린의 몸이 안정을 찾자 천일영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서하린을 이렇게 만든 놈은 어디에 있느냐.”
“모두 죽였습니다. 그러나 상대가 고수이기에 서하린 소저가 이 지경이……. 제가 못난 탓입니다.”
“죽은 자들 말고 이번 일을 일으킨 근원은 누구냐. 무림맹의 놈들이더냐.”
“황실의 금군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군 놈들이 무림맹인지는 모르겠으나, 무인 몇과 함께 일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알았다. 내일 황실로 쳐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리면 되겠구나.”
“네? 그…… 그게 무슨 말씀…….”
“내 소중한 사람을 건드린다면 설사 그것이 황실의 인간이 아니라 황제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못할 뿐이구나.”
천일영의 온몸에서 살기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무공이 만들어 내는 살심이 아닌,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속마음이 만들어 내는 살기.
천일영의 눈에 혈광이 떠올랐다.
‘이 무슨 살기가!’
월영은 그 경지를 가늠하기 힘든 초고수에게서 흘러나오는 진득한 살기가 심장을 옥죄자, 까마득한 공포가 마음을 휘저었다.
하지만 공자가 뿜어내는 살기의 이면에 드러나는 그 표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침통한 표정으로 서하린의 얼굴을 바라보는 공자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으니.
“큰 상처는 대략 치료가 되었구나. 이제 집으로 가서 제대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
“분명 하린이가 살게 된 것은 네 덕이겠지. 고맙구나, 월영아.”
“……”
몇 번의 말이 가는 동안 아무런 대답이 월영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이상함에 천일영이 고개를 들어 월영을 바라보는 순간.
월영이 입을 쩍 벌리고 경악하는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그……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서하린 소저가 공자님에게 천마라고 하였습니까?”
“그러고 보니 너는 몰랐었지. 뭐 별거 아닌 일이다. 천마라는 게 그리 대수인 것도 아닌데.”
“천마가 대수가 아니라니요. 무림 삼 대 고수입니다. 아니지, 그게 아니라! 천마이십니까?”
“그게 그리 놀랄 일이냐. 때려치웠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요. 어쩐지 황제를 죽이느니 하는 농담을 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갔는데 천마님이셨다면 그 정도 말을 할 정도가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것이 농담으로 들렸더냐. 나는 진심을 말한 것인데.”
“네에?”
순간 월영은 아직도 천일영의 눈에 가시지 않은 혈광을 보며 침을 삼켰다.
“너도 그동안 많이 성장한 모양이구나. 예전 같았으면 내가 천마였다는 것을 안 즉시 검을 빼 들었거나 나를 바라보는 눈의 결이 곱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성장이 아니라 천마님 앞에서 검을 뽑으면 시신을 줍지도 못할 만큼 처참하게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게 아닐까요.”
“그새 농담하는 법도 배운 모양이고. 집에 가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려다오. 그리고 하린이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도.”
천일영의 발걸음이 항주를 향해 돌아섰다.
월영은 문득 서하린을 안고 있는 공자의 손길이 아직도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 떨리는 손길이 오갈 데 없는 분노를 거두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서하린이 죽을 뻔해서인지는 모른다.
‘천마도 사람이었구나. 하도 악독하다 해서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지. 저 손길은 분명 분노 때문이 아니라…….’
월영은 천일영의 뒤를 말없이 따랐다.
정파와 마교, 그리고 사파의 본질을 알아 버린 월영에게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분명 눈앞의 이 공자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으니 따를 뿐이다.’
설사 이 사람이 황제를 죽이고 무림 공적이 아니라 천하의 악당으로 알려진다 한들, 같은 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월영의 발걸음은 천일영과 보폭을 같이 맞추기 시작했다.
* * *
천일영이 월영과 서하린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을 때.
항주에서 약 칠십 리 떨어진 곳의 산길을 걷는 오십 명이 있었으니, 그들은 안휘성에서 절강성의 중심을 거쳐 복건성으로 가는 또 다른 금군들이었다.
그들은 항주가 절강성을 지탱하여 다른 지역보다 큰 발전을 이루었기에 작은 마을이 거의 없어 다른 금군의 무리에 비해 수입이 턱도 없이 적었다. 때문에 복건성으로 빠르게 접어들려고 늦은 밤까지 행군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저희가 가는 길은 마을이 거의 없어서 수중에 들어온 돈이 적습니다.”
“금화를 두 냥이나 받기로 하고도 부수입에 그리 혈안이 되었느냐.”
투덜대는 금군을 향해 지휘관이 비웃음을 지어 보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남들은 절강성에 들어서지 않으려 했지만 이곳과 이어지는 복건성이야말로 산이 많고 외진 곳에서 화전을 일구는 마을이 많다. 그곳은 이동할 거리가 적어 피곤함도 덜하고 돈은 더 벌게 될 것이다. 내가 굳이 이 길을 선택한 이유다.”
“크큭, 그런 한 수가 숨어 있었군요.”
오십 명의 금군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거머쥐고, 마을의 어여쁜 처자를 겁탈하고 싶은 마음에 노숙도 마다치 않고 한밤중에도 산길을 걸을 정도이다.
휘이이잉.
그때 끝에서 걷고 있던 금군 하나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하늘을 바라봤다.
“뭔가 이상한 소리가 안 들리십니까?”
“이상한 소리?”
“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마치 천자뇌포의 대포알이 날아가는 소리 같기도 합니다.”
“어허, 이 밤중에 산속에서 그런 소리가 날 일이 있나.”
“그렇기는 한데…….”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앙!
갑자기 거대한 소리가 하늘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은 곁을 지나고 있는 산의 꼭대기쯤에서 울리는 소리로, 천자뇌포가 터지는 소리의 몇십 배에 달하는 거대한 소리였다.
“으헛,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이냐!”
“그것이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큰일이 생긴 것 같구나. 빨리 걸어서 이 산 아래를 통과한다.”
“네!”
그러나 불과 눈 다섯 번 깜박일 시간이 지난 후.
처음 이상한 소리를 느꼈던 금군의 입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 지휘관님!”
“왜 그러느냐!”
“뭔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뭐…… 뭐라고?”
그때 다급히 산 정상을 향해 시선을 돌린 금군 지휘관의 눈에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바윗덩어리들과 토사(土砂).
그리고 뿌리째 잘려 나간 거대한 나무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빨리 피하거라!”
“네!”
그러나 그 순간 지휘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휘관으로서 해야 할 말을 마땅히 했을 뿐, 온 사방 십 리를 덮을 만큼 쏟아지는 나무와 흙더미를 어찌 피한단 말인가.
“이런 씨X…….”
와르르르르르륵!
엄청난 양의 바위와 흙더미, 그리고 나무가 금군을 덮쳤다.
“크아아악!”
“사람 살려!”
“으아아악!”
순간 코와 입으로 흙이 밀려 들어오고, 이내 몇몇은 바위에 몸이 터져 죽어 나가는 비명을 지른다.
금군의 지휘관은 코앞의 죽음을 목도하며 그 또한 자신의 생명이 다해 감을 느꼈다.
‘금화와 인간의 목숨을 바꾸려 했던 것에 대한 인과응보인가.’
콰르르르르륵!
순간 지휘관의 의식도 끊어지며 오십의 금군들과 함께 흙더미에 쓸려 나갔다.
이것은 비록 천일영의 다급함이 만들어 낸 우연이었지만, 오직 서하린에게만 기감을 집중하고 방향을 잡았기에 천일영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금군 오십을 흙 속에 파묻어 죽여 버림으로서 복건성에 사는 수천의 마을 사람들을 구하게 된 것이었다.
* * *
서하린이 다시 정신을 잃은 지도 이미 이틀째.
천일영은 서하린의 땀에 젖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몸에 이상이 있지는 않지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구나. 아직도 그 어떤 이유로 이렇게 누워만 있는지 알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눈을 뜨지 못하는 서하린의 앞에서 매일같이 천이영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혹여라도 정신이 들까 하여 자리도 비우지 않은 채 곁을 지키는 천이영의 눈은 부을 대로 부어 항주 제일의 미인이라는 소리가 무색할 지경.
게다가 그다지 친해 보이지 않았던 유향설도 아예 술상을 서하린이 누워 있는 방으로 옮겨 천이영과 함께 곁을 지켰다.
또한 백유화 역시 자신의 의학 제자 애영과 화영을 서하린의 곁에 두었다.
“맥도 정상이고 어디 막힌 곳도 없는데…….”
“백유화 님, 그럼 왜 정신을 못 차리는 걸까요?”
백유화는 의원으로서 한 시진에 한 번씩 서하린의 맥을 짚으러 방으로 들렀다.
금채홍 또한 백유화가 서하린을 진찰할 때마다 서하린을 찾았으니,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아도 모두 서하린의 걱정으로 슬픔이 객잔을 떠나지 않았다.
모두 같은 마음.
하루빨리 서하린이 눈을 뜨기를 그토록 바랐다.
하지만 서하린은 그 뒤로도 계속 눈을 뜨지 않았다.
그것은 숨만 쉬고 있을 뿐, 마치 죽은 것만 같았기에 천일영을 비롯하여 모두가 웃음을 짓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 * *
서하린이 눈을 뜨지 못한지 삼 일째 되는 날이었다.
월영은 봇짐을 챙겨 들었다.
“공자님, 잠시 영기의 땅이 있던 곳에 다녀오겠습니다. 그곳에 있는 마을 사람들과 서하린 소저가 예뻐했던 아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줄까 합니다.”
“수십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의 무덤을 만드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참혹한 모습을 견디기 쉽지 않을 터인데.”
“누군가는 해야 할 일입니다. 원래는 서하린 소저가 눈을 뜨면 아이들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같이 갈까 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 내가 부족했기 때문이구나.”
“공자님께서 미안하실 일이 있겠습니까.”
씁쓸한 표정으로 억지웃음을 지은 채 월영을 배웅하는 천일영의 얼굴에 근심이 배어 나온다.
스윽.
“이 검을 가지고 가거라. 무극지검이다. 전에 쥐어 봤으니 손에 익을 것이다.”
“이런 명검을 저에게 맡기시는 것입니까?”
“혹여 잔당이라도 있으면 어찌하겠느냐. 네가 가진 검으로는 감당치 못할 것이다.”
“감사합니다. 곱게 쓰고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간 김에 아직도 영약이 남아 있으면 가져올까 합니다. 오가는 시간까지 삼사일 정도.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알았다.”
천일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월영은 봇짐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무겁고 힘든 발걸음.
수십의 불에 탄 시신을 옮기고 무덤을 만드는 일이 어찌 쉬울까.
하지만 천일영이 그렇게도 곁에 두고 싶어 했던 월영이라는 사람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일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하는 사람이다.
푸드드득.
슬플 정도로 맑은 날의 하늘을 가로질러 참매 한 마리가 허공을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천일영이 월영의 등을 바라보며 손을 올리자 참매가 오른팔에 앉았다.
다리에 끼워져 있는 작은 연통. 그것을 열자 안과 혜가 보낸 편지가 들어 있다.
[종1품 삼사(三師) 태자태사(太子太師). 정보의 정확도는 약 오 할.]
천일영의 입가에 있는 근육이 굳었다.
월영에게 전해 들은 금군의 배후를 찾으라는 명령에 안과 혜가 찾아낸 정보다.
분명 오 할이라면 절반 정도만 신뢰를 갖는 것이지만 황실을 상대로는 상당히 높은 확률.
천일영의 눈에 혈광이 떠오름과 동시에 눈동자의 테두리로 더욱 진한 핏빛의 고리가 돌아간다.
극살태마신공(劇殺台魔新功).
천일영이 그토록 오래 마음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던 살심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