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야, 인마! 사람이 살려 달라는데 어딜 그냥 가! 거기 안 서?”
“유화야,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야, 이 망할 놈이!”
찌이이이익.
그때 여인이 발을 미끄러트리며 천일영과 백유화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에는 광분에 가까운 화를 품고, 입에서는 거친 숨을 토해 내는 여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인간 같지도 않은 놈아. 사람이 말을 하면 대답을 하란 말이다.”
“어디에서 개가 짖는 소리 같은 게 들리지 않느냐?”
“개가 짖는 소리 같은 게 아니라 개소리 맞습니다.”
“야!”
천일영과 백유화는 눈앞의 여인에게서 풍기는 피 냄새로부터 코를 막았다.
나이는 사십쯤 되어 보이지만 속은 아마도 칠십, 혹은 팔십이 넘은 노괴에 가까울 터다.
이 노괴의 경지가 이미 초절정 고수 중에서도 상당한 경지일 터인데 이류 무인과 삼류 무인을 상대로 도와달라고 하면 그 누가 알겠다고 하겠는가.
게다가 몸에서는 실제 비에 젖은 개 냄새와 비슷한 썩은 내가 진동을 하니, 천일영은 눈앞의 여인에게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퉤.”
“야! 이 개놈아!”
천일영이 뱉은 침을 피한 여인의 눈길에 광기에 가까운 살기가 서렸다.
죽음의 냄새가 사방을 덮치고, 또한 여인의 움직임에도 피 냄새가 짙게 맴돈다.
찌거걱.
여인이 기운을 퍼트리자 디디고 있는 땅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며 파여 들어갔다.
“여자가 도움을 요청하면 마땅히 나서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거늘. 네놈들은 어째서 나에게서 등을 돌린 것이냐.”
“퉤.”
“이…… 이 망할 놈!”
여인의 금나수가 뱀처럼 휘며 천일영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천일영은 웃음을 지었다.
심지어 강선을 펼쳐 두고 있는 백유화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까지 한다.
휘이이잉! 촤촤촥!
피 묻은 여인의 손이 천일영의 갈비뼈 사이를 찌르고 살을 파내기 위해 품을 파고드는 순간.
파가가각. 쩌억!
천일영의 동전 이십 냥짜리 검이 여인의 손등을 찍어 냈다.
굳이 검을 뽑아 들 필요도 없다는 듯이 검집으로 때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여인의 얼굴이 황급하게 굳었다.
분명히 이 금나수를 받아 내는 사람이 무림에서 흔하지 않을 테니까.
타다다닥.
여인이 황급히 몸을 빼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이 모르는 고수가 무림에 있을 리는 없다는 듯한 눈길이다.
하지만 천일영은 손에 든 검을 내리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장강수로채(長江水路寨) 채주 요소령. 사람을 물어뜯는 그 버릇은 아직도 그대로인 모양이군.”
“……?!”
요소령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천하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실제 얼굴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이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는가.
황실에서 만든 용모파기조차 흐릿한 인상만을 그렸을 뿐이다.
“네놈 누구냐. 나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보통이 아닌 놈이로구나.”
“무게가 없는 값싼 이름이라 댈 것도 없다. 다만 천하의 요소령이 삼류 무인, 이류 무인을 상대로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한다니. 예전에도 남자들을 조종해서 편안한 삶을 누리려고 하더니만 그 나이가 돼서도 버릇을 못 고치는구나.”
“크윽!”
요소령은 한 번의 침음을 흘린 후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손을 들어 올렸다.
춘풍한빙(春風寒氷).
봄에 부는 바람은 언뜻 따뜻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바람은 얼음처럼 차갑다는 의미.
보이기에는 부드럽고 약해 보이지만, 뼈를 부수고 살을 파낼 만큼 강한 금나수다.
촤촤촤촥!
요소령의 손길이 다시 한번 천일영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의 금나수와는 달리 손날에 스치기만 해도 살이 갈라질 만큼이나 날카로운 기세를 품고 있으니.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살려 둘 수는 없다. 죽어라!”
“아니, 죽으라고 해도 말이지, 이 정도의 금나수에 죽는 게 더 힘들지 않나 싶은데?”
“미친놈! 남자인 네가 금나수의 깊이를 아느냐!”
요소령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공동산에 울려 퍼짐과 동시에 천일영이 웃음을 지었다. 본디 금나수를 남자들도 사용하지만, 그 깊이에서는 여인들이 한 수 위임을 알아들은 것이다.
쿠웅.
요소령은 눈앞의 젊은 남자의 기운이 갑자기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침을 삼켰다.
‘남자인데 극음(極陰)의 기운?’
촤라라라락!
순간 천일영의 손아귀에서 소수마공이 펼쳐졌다.
극음의 기운을 가진 여자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무공을 어째서 남자가 사용하는가.
천일영이 탈마의 경지에 오른 이후, 양과 음의 기운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무공에 따라 극양의 기운만으로 싸우기도 하고, 또한 여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극음의 무공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소수마공은 그것을 알게 된 명천마왕 소초련이 모든 절기를 포함하여 천일영에게 가르친 것.
“으윽! 이런 미친!”
“수공이라는 것은 이렇게 쓰는 것이다.”
촤아아아악!
천일영의 소수마공이 요소령의 춘풍한빙의 얼음같이 차가운 기운을 꺾어 낸다.
뚝. 뚝.
요소령의 오른손이 깊게 찢어져 피에 적셔졌다.
오직 단 한 수.
단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는 금나수였건만, 무참히 패했다.
하지만 충격을 받아야 했을 터인 요소령의 입가에는 오히려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것만은 안 하려고 했는데, 네놈의 목줄을 물어뜯어야겠구나.”
“식인(食人)의 요소령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한 무공인가.”
순간 요소령의 신형이 천일영을 향해 튀어 나갔다.
“식인이라는 별칭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광견이라고 부르거라.”
“미친개라.”
“광견이라고!”
요소령의 입이 한가득 벌어지며 천일영의 얼굴을 향한다.
조금 전 산적들을 상대로 옷에 묻은 피보다 입가를 적신 혈흔이 훨씬 많았던 이유.
바로 요소령의 무공 제제광부공(狾狾狂剖功)이다.
요소령의 벌린 입 사이로 조금 전 산적들을 물어뜯었을 때 들러붙은 살점들이 보인다.
“네놈! 살려서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귀찮구나.”
자신을 향해 입을 벌리고 시뻘건 피가 배어 있는 혀를 날름거리는 요소령을 상대로 한 걸음을 뒤로 뺀 천일영의 신형이 사라졌다.
훅!
그리고 어느새 요소령의 등 뒤에 신형을 드러낸 천일영의 손이 뻗어져 뒷덜미를 잡았다.
“다신 보지 말자, 요소령.”
“어? 어느새?”
부우우웅!
순간 천일영이 요소령의 잡은 뒷덜미로 내공을 모아 공동산 정상의 반대편으로 집어 던졌다.
“까아아아아아아악.”
“잘 가라.”
요소령이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고, 높고 멀리 날아가는 것이 지상으로 내려오기 쉽지는 않아 보인다.
백유화는 그 모습을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이제 안 보이기 시작하네요. 한 삼십 리 날아갈 것 같은데요.”
“삼십 리? 조금 더 힘줘 날릴 걸 그랬군. 한 오십 리는 날릴 생각이었는데.”
“뭐, 이 정도 당했으면 다시 덤빌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그런데 왜 수적이 산적들이 있는 곳에 온 것일까요?”
“글쎄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대 알고 싶지 않다는 거다.”
“혹여라도 다음에 또 만나게 되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천마님의 손을 더럽힐 필요까지는 없을 테니.”
허공에서 하나의 점이 되어 버린 요소령을 뒤로하고, 천일영과 백유화는 다시 산을 올랐다.
쓸데없는 데에 빼앗긴 시간이 너무나 많았기에 조금은 빠른 발걸음.
산의 청명한 공기가 제법 시원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곳에 도착하자, 이내 공동파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천일영은 공동파의 입구를 보고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다만, 생각보다 더 심각하구나.”
“천마님, 이 정도면 거의 멸문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산이 만드는 청명한 공기가 언제나 공동파를 감싸고 있어야 했거늘, 부는 바람은 언제나처럼 그대로이건만 공동파만이 잔재만 남은 듯 무너져 있었다.
거대했을 정문은 불에 타 반만이 남아 있고, 그 뒤로 보이는 전각과 장원들은 피에 얼룩지고 부서진 채 방치되어 있기를 제법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하다.
멸문이 코앞인데 정문 앞에 공동파를 지키려는 무인 셋이 서 있는 것에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쉬어야 할까.
천일영은 정문의 무인 셋에게 말을 건넸다.
“사람을 만나러 왔다. 혹 들어갈 수 있겠느냐.”
“누굴 찾으시오?”
“공동파 무명비각(無明埤閣)주 성운이다.”
“아…….”
정문을 지키던 무인 세 명 중 셋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들이 천일영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하찮음이 서려 있었다.
싸구려에 가까운 옷과 겨우 동전 이삼십 냥쯤 될 만한 검을 가지고 있으니, 무명비각주를 만날 만큼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었다.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아니나, 장로님이 지금 매우 편찮으니 나중에 오는 것이 어떠시오.”
“가서 전하기를 천무탁이 찾아왔다고 하거라.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두말없이 돌아가마.”
“에잇, 하필이면 뒤숭숭한 지금 귀찮게. 쯧.”
한 명의 무인이 천일영을 노려보고는 짜증을 부리며 공동파 안으로 들어섰다.
남은 두 명의 무인도 천일영을 바라보는 눈길이 곱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유화를 바라보는 눈길에는 음심마저 넘쳐 날 지경이다.
하지만 천일영은 넓은 마음으로 조용히 기다렸다.
일각이 지난 후.
안으로 들어섰던 무인이 새파래진 안색으로 뛰쳐나왔다.
“장로님께서 어서 모시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모든 예를 갖추라고 하시니 아까의 제 결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결례까지는 아니다.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아라.”
“이쪽으로 오십시오.”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무인에게 천일영이 괜찮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무인은 땅에 머리를 박을 만큼이나 계속 고개를 숙였다.
천일영과 백유화는 안내받은 무명비각 앞에 서서 조금의 한숨을 흘렸다.
온통 부서지고 망가진 것도 모자라 일부는 불에 그을리고 수많은 핏자국이 엉켜 있다.
“이 방입니다.”
“안내해 줘서 고맙군.”
천일영은 들어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불 안에서 몸을 반만 일으킨 채 앉아 있는 성운이 보인다.
성운은 안내했던 무인에게 조용한 목소리를 꺼냈다.
“너를 비롯하여 무명비각 근처에 있는 모든 사람을 물리거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무리 귀한 손님이라고 한들 그렇게까지 하시는 것은…….”
“괜찮다. 오랜 친구의 방문이니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무인이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자 주변에 있는 모든 무인이 물러가는지 잠시 밖이 어수선해졌다.
천일영과 백유화는 성운의 곁에 앉으며 수척해진 그의 몰골에 조금은 마음이 아려 왔다.
육십이 넘어 이제는 노쇠해질 나이이긴 하지만, 지금의 얼굴은 이미 구십은 넘어 보이기에.
“미안하다. 꼴이 영 좋지 못하구나. 그나저나 유화와 같이 올 줄 몰랐다. 천마신교에서 폐관 수련을 하고 있던 것 아니었나?”
“천마는 때려치운 지 좀 됐다. 그나저나 몰골이 엉망이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꽤 좋은 얼굴이었는데.”
지난 세월이 십수 년.
비록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얼굴은 달라져 있었지만, 성운은 보자마자 그가 천일영임을 알아보았다.
다름 아닌 친구가 아닌가.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내었나.”
성운은 다정한 목소리를 내고, 이내 손을 뻗어 오랜 친구의 손을 잡았다. 비록 좋지 않은 몸이라 할지라도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으로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죽을 때가 되니 네 녀석 생각이 많이 나더구나. 마지막으로 보게 되어 다행이다.”
“말해 보아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별거 아닌 일이다. 제자를 잘못 키워 멸문의 길로 들어서는 것뿐이니. 무림에서는 흔하디흔한 일이 아니냐.”
“다른 사람도 아닌 성운 네가 있었다. 그런데도 막지 못했다는 말이냐.”
성운은 눈을 감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현황우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듯이.
이내 성운의 힘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현황우라는 놈이다. 녀석의 인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장문인을 비롯하여 나 역시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막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파문을 하여 밖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보다는 품고 있으며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 했지.”
“장문인도 보통의 사람은 아니었을 터다. 그런데도 공동파가 이 지경이 된 것이냐.”
“신기한 일이 생겼다.”
성운의 감긴 눈이 떠졌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듯 하는 그의 눈길에 지난 세월의 회한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강해졌다. 단 며칠 사이였을 뿐이다.”
“단 며칠 만에 무공이 강해졌다? 그것이 얼마큼이겠느냐.”
“불과 보름 만에 내공이 3갑자가 늘었다면 믿겠는가.”
“……!”
믿기 힘든,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성운의 말에 천일영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