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의원은 치료가 끝나자 침통에 사용했던 침을 집어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다리에 부목을 대고 비틀린 뼈가 제자리로 돌아가면 이삼일 후에 운신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칠 일은 누워 계시는 것이 좋습니다.”
“칠 일은 무리일세. 급한 일이 있어 빠르게 움직여야 할 듯하네.”
“알겠습니다. 원하시면 몸에 무리는 가겠지만 더 빠르게 치료하지요. 그럼 저는 일단 격리된 여인에게 가 봐야 할 듯합니다.”
의원이 밖으로 나서자 도철용은 환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의원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왜인지 꺼림칙한 기분이 환단을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열자에 걸리면 그 자신조차도 살아남을지 걱정이 되는 것 또한 사실.
도철용은 눈을 질끈 감고 환단을 입에 털어 넣었다.
우물. 우물.
쓰다. 정말로 입안이 마비될 정도로 썼다.
그러나 쓴맛 이후에 올라오는 약재의 향기에 도철용은 비로소 안심되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인삼(人蔘)에 갈근(葛根), 곽향(藿香)의 향과 맛이 올라오는군. 확실히 이것들은 호열자에 효과를 보이는 약재들이 분명하다.’
꿀꺽.
비록 의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약재의 효능에 대해서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기에 환단을 삼키고 나니 기분 좋은 안도감이 마음에 흐른다.
도철용은 애써 자신이 먼저 탈이 없는지 먹어 봤다는 생색을 내며 천량도사에게도 빨리 먹기를 권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호열자에 있어서는 비약이나 마찬가지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 * *
의원 팽달전.
그는 결코 실력 없는 의원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큰 도시에서 커다란 장원을 짓고 의원을 해도 될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욕심을 버리고 공동산에 자리를 잡은 지 벌써 이십 년.
‘내 목숨을 살려 주신 공동파 장로 성운 님과 인연을 맺은 것이 벌써 이리도 시간이 흘렀구나.’
세월이 흐르고 나니 경험도 쌓이고, 출중했던 실력도 어느새 더욱 좋아져 전국으로 이름이 알려질 정도다.
공동파에서도 의학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에게 전적으로 맡기고 귀를 기울여 주니 실로 의원으로서의 명성은 전국에서 스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어제 성운이 데려온 사람을 만나고는 기쁨과 존경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의학 서적인 체전신도감록(體全身圖鑑錄) 10권을 지은 백예설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다니!’
팽달전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체전신도감록이란 중원에서 가장 인체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한 것은 물론이고, 그림까지 놀라울 정도로 상세하니, 마치 수백 명의 사람을 해체한 것 같은 자세함이 가득한 책이었다.
의원이라면 필독은 말할 것도 없음이요, 읽지 아니한 자는 의원이라고 이야기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유명한 책.
그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데.
“내 백예설 의원을 데려오면서 고민이 많았다네. 하지만 자네가 백 의원의 이야기를 들어 보기라도 했기에 데려왔으니 잠시만 귀를 기울여 주게나.”
“성운 님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것을요.”
어젯밤 성운이 데려온 백예설이 하는 이야기는 팽달전의 가슴을 저미고 썰어 떨어져 나가게 할 만큼이나 분노를 치밀게 하는 것들이었다.
“저기……. 내가 보다시피 체구도 작고 힘도 없어서 여러 가지로 곤란한 일을 겪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찌해도 해결할 방안이 없어서…….”
“무슨 일을 겪고 계시길래 이러한 말씀을 하는 것인지요. 허심탄회하게 말씀해 주시면 제가 돕겠습니다.”
“천량도사와 도철용이라는 사람이 여기 의실에 입원해 있어. 그 사람들이 나를 납치하고 새로 쓰고 있는 의학 서적이 세상에 나오는 것을 방해하려고 하거든.”
“네에? 납치요? 게다가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의학 서적을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다니요!”
“이번에 만드는 책은 혈도부터 기도까지 더욱 상세하게 나오고, 그 역할까지 모두 적혀 있으니까 무공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들만 알고 싶은 모양이야.”
“아니! 그런 천인공노할 이야기가 어디에 있습니까!”
팽달전은 탁자를 손으로 때리며 분노를 사방으로 터트렸다.
분명 지금의 의학에서는 혈도는 둘째로 하더라도 기도의 중요성이 이제야 대두되고 있기에 백예설이 쓰는 책은 크나큰 도움이 되고도 남기 때문이었다.
“혈도와 기도의 역할은 무인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것. 이것을 모두 알게 되면 무공의 이해가 더욱 깊어지니 자신들의 문파에서만 알고 싶은 것인가 봐. 그래서 나를 납치하고 정보를 빼 가려고 했는데 성운 님이 도와주셔서 겨우 이번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거든.”
“무인들이 그러한 짓을 한단 말입니까!”
“무인이라서 문제인걸. 성운 님도 저들과 같은 정파의 무인이니 도움을 주시는 것도 이제 한계이고……. 게다가 같이 온 여자는 다른 곳에서 나를 납치하러 온 사람이야. 총 세 명에게 쫓기고 있으니 나 역시도 한계인 거지.”
“이런 사악한 놈들이 있나!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팽달전의 떨리는 목소리에 이어 백예설의 품에서 환단 두 개가 나왔다.
“이것은?”
“호열자에 대단한 효과가 있는 특효약. 하지만 배합을 바꾸어 호열자와 같은 증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환단이야.”
“그런! 호열자에 특효약이 있다는 말입니까!”
팽달전의 손이 떨렸다.
호열자에 효과가 있는 약은 현재 중원에서는 없다.
그러한데 다른 사람도 아닌 백예설이 만든 호열자 약이라니, 손은 물론이고 전신이 떨릴 만한 일이다.
“도와주겠다고 하니 이 약의 배합도 전부 알려 줄게. 그러니 호열자가 돈다고 하고 이 약을 두 사람에게 먹여 주겠어? 이 약이 효과를 발휘하는 동안 내가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이것은 같은 의원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대(大)의원 백예설 선생님의 부탁이 아닙니까.”
“고마워.”
붉게 얼굴을 물들이며 수줍게 웃는 백예설의 얼굴에 팽달전은 가슴이 철렁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이가 오십을 바라보는데 주책맞게도 백예설의 아름다운 미모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것이었다.
팔락.
백예설이 글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을 탁자 위로 올리자 팽달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언뜻 보는 것만으로도 그 내용이 엄청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다.
“이거라면 호열자에 걸린 사람 중에서 칠 할은 살릴 수 있을 거야. 내가 온 힘을 기울여 만든 약재의 배합법. 그리고 뒤에 있는 종이는 배합을 달리하여 약을 독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지. 하지만 이미 눈치챘을 거야. 이 배합이면 응용해서 수많은 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노…… 놀랍습니다. 이런 배합법이 있을 줄은. 역시 백예설 선생님! 헌데 이런 비전을 저에게 알려 주셔도 되는 것입니까?”
“생명의 은인이나 마찬가지니까.”
백예설이 몸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평생의 은혜이니 잊지 않을게. 그리고 새로운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이곳으로 보내도록 하지.”
“저 역시 예설 선생님을 만난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삼겠습니다.”
“나중에라도 부탁할 일이 있으면 성운 장로를 통해 연락해도 돼.”
“그런 영광을!”
백예설은 등 뒤에서 여러 번 고개를 숙이는 팽달전을 뒤로하고 성운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반 리쯤 걸음을 걸은 후, 이내 성운의 입에서 능글거리는 말소리가 튀어나왔다.
“살인귀 백유화가 천하에 이름을 알리는 의원 백예설이라니. 참, 세상이 어찌 이 지경이 되었는지.”
“죽인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렸으니까 된 거 아니냐.”
“뭐, 죽은 놈들도 나름대로 세상에 보탬이 되었으니 그 나름대로 공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성운의 온몸으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올랐다.
수많은 사람을 죽임으로써, 오히려 사람을 살린다는 것이 아직도 언뜻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성운은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뒤로하며 고개를 가로젓고, 이내 또다시 능글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백예설인 것도 놀랄 일이지만, 아까 그 수줍은 미소는 뭐냐. 어우, 속 안 좋아.”
“시끄럽다. 살다 보면 다 필요한 거다. 그 미소로 악당들을 속이고 산 채로 해부한 인간이 몇 명인 줄 아느냐. 복수 때문이기는 했지만, 세상을 좋게 만들기도 했으니 머릿속에서 빨리 지워라.”
“지워야지. 생각날 때마다 토할 것 같으니까.”
“이 망할 놈 봐라? 너 술 숨겨 둔 데 다 찾았거든? 돌아가서 전부 다 술병을 깨 버려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건 또 언제 찾았냐. 잘못했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러마. 한 번만 용서해 다오.”
성운은 진심으로 백유화에게 사과했다.
이 무서운 여자는 진짜 한다면 하니까.
하지만 그보다 깊숙이 숨겨 놓은 술병을 어찌 찾아냈는지 백유화의 치밀함에는 혀가 내둘러진다.
수줍은 표정을 짓는 백유화의 내숭 뒤에는 이런 모습이 숨어 있다.
아무래도 천일영에게 전부 다 일러야겠다.
아니, 백예설의 이름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야겠다.
술병을 들키지 않을 만한 장소에 숨겨 놓으면 그때 말이다.
* * *
다음 날.
천일영은 성운에게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실로 자신의 인품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시키려는 것을 모르지 않음에 성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친구라고는 하나, 그 표정은 정말로 적응이 안 되는구나.”
“괜찮다. 나쁜 짓은 안 시킬 테니. 그냥 무림맹에 편지 한 장 쓰면 되는 일이다.”
“편지? 무슨 내용을 쓰라는 것이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다. 구구절절하게 지금의 공동파에 대한 설명을 적어 보내고 지원을 요청하거라.”
“전에도 무림맹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만…….”
성운의 어두운 표정에 천일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남궁천은 아마도 지원을 보내기 싫거나 고의로 지원을 끊은 것이 아닐 터다.
다만 그동안의 일의 실패로 인해 다른 문파를 움직이기 힘들어서 지원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동파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는 것은 남궁천에게 다른 뜻이 있다고 봐도 좋을 테지.’
이제는 남궁천을 끌어내야 할 때. 천일영은 잠시의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무림맹으로 하루에 한 통씩 매일 편지를 전서구를 통해 보내고, 같은 편지를 구파일방에도 매일 똑같이 보내라.”
“구파일방에도?”
“나쁜 짓이 아니니까 투덜거리지 마라. 진짜 나쁜 짓은 조금 나중에 할 테니.”
“결국 나쁜 짓을 하기는 하는 거냐.”
성운이 조금은 불편한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몸을 일으켜서 먹을 갈기 시작했다.
씰룩거리는 입에서는 한 소리가 나오고 싶지만, 지금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동파의 재건에 전력해야 하기에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는다.
천일영은 성운의 마음을 헤아린 듯 웃음을 지었다.
“공동파를 배신하고 산적이 된 자는 얼마 정도 되느냐.”
“아마도 3할 정도는 되는 듯하구나.”
“정파와 사파의 중간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의 숫자가 반대파인데 용케 구파일방에 이름을 올렸구나.”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공동파를 나간 놈들을 나중에 어찌할지부터 말해 주면 대답해 주지.”
“가장 약한 처벌은 파문. 그게 아니라면 산적이 되었으니 관부에 넘기는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공동파를 멸문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했으니 죽여야 하겠다만.”
“그거라면 됐다. 죽여도 된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서…… 설마 나쁜 짓을 한다는 게 그것이냐?”
“아니다. 설마 산적이 된 무인들을 죽인다고 나쁜 짓이겠느냐. 산적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것을.”
“그렇다면 그보다 더한 짓을 한다고?”
천일영은 딱히 성운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져 성운의 입을 막을 뿐.
“혹시 해서 묻는데, 사람을 납치하는 일에 재주가 좀 있었던가?”
“납치?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기왕에 죽을 놈들, 죽기 전에 써먹을 데가 있을 뿐이다.”
“그게 도대체 무슨…….”
“별거 아닌 일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더 쉬운가, 아니면 문을 열고 나온 놈을 만나기가 더 쉬운가의 문제이니.”
천일영의 말에 성운의 심장이 떨어져 내리는 듯하며 이내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하아, 망할 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네. 쉽게 말해 주면 누가 때리냐?’
성운은 먹을 벅벅 갈고 이내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