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콰아아아앙!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게냐!”
“장문인! 조금만 진정해 주십시오.”
“진정?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느냐. 이 해괴한 소문이 언제부터 나돌기 시작한 것이냐.”
“정확한 것은 가늠하지 못하나 대략 오 일 전후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오 일이라니. 그동안 무당파의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다 못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구나.”
무당파의 장문인 명선은 탁자를 내리칠 때 일으켰던 몸을 앉히지도 못한 채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 숨결이 얼마나 거친지 곁에 있는 사람들이 눈을 마주치지조차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데만 급급할 정도.
평소 거의 화를 내지 않는 장문인의 화난 모습을 마주한 무당파의 원로들은 나이와는 상관없이 명선을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장문인, 화가 나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요. 허나 지금은 앞으로의 방도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우리도 도울 터이니 조금만 화를 누그러트리시지요.”
“화를 내는 것이 능사가 아닌 것은 압니다. 그러나 우리 무당파가 공동파를 지원하려는 모용세가를 말리고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데 어찌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흐른 소문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이오.”
“누군가가 고의로 흘린 소문이지만 질이 나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말이 나돌면 무당파는 소문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에 감숙성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내 생각도 비슷하오. 이것은 마치 우리를 움직이도록 처음부터 만든 함정 같소이다.”
명선은 이마에 튀어 올라온 혈관이 더욱 튀어나올 정도로 혈압이 올랐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고 진정하기 시작했다.
원로들 앞에서 계속되는 화를 보이는 것도 문제겠지만, 어찌 보면 이런 소문이 나돌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한다.
비록 조금 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공동파에서 일어난 일을 명선 그 본인도 제법 속 깊은 내막까지 자세히 알고 있었음이다.
‘공동파가 도교의 문파임에도 불구하고, 사특한 면이 많아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 오히려 화가 되었구나.’
하지만 과연 무당파와 다른 문파들이 움직이지 않은 이유가 그것뿐이었겠는가.
‘무림맹이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것을 굳이 먼저 나서서 앞장서면 오히려 무림맹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이 아닌가. 무림맹도 가만히 있는 일에 손을 댄다는 것은 곧 남궁천과 척진다는 말이다.’
이번의 공동파의 일은 여러 가지로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그것이 침략의 외압으로 인해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아무리 지금의 무림맹이라 할지라도 분명 움직였을 터다.
그러나 공동파의 일은 비록 녹림의 채주가 되었다고는 하나, 현황우라는 제자가 공동파를 무너트린 내부의 일이었다.
게다가 녹림은 무림에서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산적과 수적의 일은 황실에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여러 가지 일들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가 외면한 것이지.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가 검을 들이대고 피가 흐르는 일이기에 피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소문이 흐른다면.
뿌득.
명선의 턱이 다물어지며 이가 갈려 나갔다.
분명히 이 소문으로 인해 움직여야 할 문파들이 많을 터다.
‘턱도 없는 일을 생각해 냈군. 누구냐, 이런 소문을 흘린 놈이. 게다가 매일같이 공동파의 장로 성운으로부터 지원의 편지까지 오고 있는 이때 형편을 따지는 것조차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구나.’
떨리는 손길이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내보이고 있었지만, 이내 명선은 이를 악물고 검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팔 일이 지나 녹림의 산적들을 납치하기 시작한 지 총 열흘째 되는 날.
천일영은 백에 달하는 산적들이 납치를 당하는 와중에도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는 현황우가 새삼 의심스러워졌다.
천일영이 현황우가 움직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과거 녹림의 채주가 된 이후에도 그것을 숨기고 한동안 공동파에서 지낸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걸로 준비는 다 된 모양이구나.”
“너무 오랜 시간 준비를 한 느낌입니다.”
백유화가 조금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천일영을 바라보았다.
열흘 동안 납치한 산적들을 쌓아 둔 창고가 터져 나갈 듯하여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나마 그 창고는 불에 타 절반만 지붕이 있는 곳이니, 사천당문의 마비독으로 재워 두지 않았으면 납치해 온 산적들이 날뛰어 전부 무너지고도 남았을 정도다.
“이제는 슬슬 알려 주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열흘 동안 납치만 한 것 말이냐.”
“네. 천마님의 뜻에 따르는 데 불만은 없지만, 궁금해서 죽을 것만 같습니다.”
“하하하. 매일같이 너와 녹림의 산채를 관찰하러 다녔는데 아직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냐. 그곳이 어찌 변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금방 눈치챌 줄 알았거늘.”
“네? 녹림의 산채요?”
백유화의 눈에 깃들었던 의문의 빛이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이내 서서히 확신에 가까운 색으로 바뀌어 갔다.
“설마 처음부터 그것을 노리시고?”
“일부러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열흘 동안이나 계속 납치했는데도 현황우가 가만히 산채에 틀어박혀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알았습니다.”
풀린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백유화는 이내 또 하나의 의미를 눈치채고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현황우라는 놈의 머리가 이 정도로 좋을 줄은 몰랐네요.”
“아마 놈이 오히려 우리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는 내일쯤 결착이 나겠구나.”
“놈을 움직이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 놓은 것이 있다. 그것을 위해 열흘 동안 납치를 해 온 것이니.”
별것 아닌 납치를 열흘 동안이나 해 온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단순한 계략 같아 보이거나, 혹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인 것만 같이 보였던 이 일에 이만큼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생각에 백유화가 내심 감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나.
“너희는 어째서 중요한 부분은 쏙 빼놓고 말하는데, 왜 서로 이야기가 통하는 거냐.”
“응?”
홀로 알아듣지 못하는 서러움이 폭발 직전에까지 몰린 성운의 입에서 울컥거리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도통 납치며, 일이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는 천일영에게 쌓인 것이 늘어만 가는 성운의 얼굴에는 심지어 울먹일 정도로 눈물까지 고이고 있다.
아마도 혼자만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천일영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성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하구나. 이제 알아듣게 설명해 주마.”
“정말이냐?”
“과거 무명암살대에서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중요한 부분만 떼고 말했던 습관이 너에게 안 좋은 마음을 품게 한 모양이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대로 설명하자면 지금부터 공동파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치워야 한다는 말이다.”
“물건을 치운다? 아직도 알아듣기 힘들구나.”
“아마도 내일이나 모레쯤 결착이 나기 시작할 거다. 만약에 현황우가 산적들을 모아 쳐들어오면 공동파에 있는 서책이나 귀중한 물건들이 망가질 수도 있지 않으냐. 그것에 미리 대비하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알았다. 지금 사람을 시켜 현황우가 찾지 못할 곳으로 모두 옮겨 놓겠다.”
성운은 급히 공동파에서 자신의 오른팔이라 할 만한 사람을 불렀다.
무공이 뛰어나지는 않지만, 인품 하나로 공동파의 중요한 일을 처리해 왔던 사람 운현이다.
성운은 운현에게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고는 천일영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시간이 급박한 것 같으니 나도 물건을 옮겨야겠다.”
“하나도 남김없이 옮겨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하마.”
천일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운현에게 명령을 내리는 성운의 얼굴에는 다정한 웃음이 배어 있었다.
성운처럼 내공이 잘 쌓이지 않는 몸이라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던 듯 운현은 성운을 따르고, 성운도 운현을 챙겨 왔던 세월이 십수 년이니 진심이 가득한 웃음을 지을 법도 했다.
한때 성운도 운현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했기에,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던 백유화는 사이좋게 걷는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일부러 성운 영감탱이가 알아듣지 못하도록 말씀하신 거죠?”
“맞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으면 성운이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조금은 가혹한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가 없구나. 배신하고 산적이 된 공동파의 무인들을 죽이는 것조차 내켜 하지 않는 성운이다. 그러니 내가 계획을 말하면 그가 들을 리 없을 터. 이 정도의 방법이 딱 좋구나.”
아무리 급박해도 몇백 년의 역사가 쌓인 공동파의 물건을 옮기는 데에 거부감이 있었을 성운 때문에 일부러 답답함을 키워 왔다.
천일영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현황우를 움직이게 만든다. 그놈의 성격을 처음부터 파악하고 일을 진행해 왔으니 예상대로라면 분명 내일 움직일 테지. 그리고 유화야, 너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구나.”
“말씀하십시오.”
“현황우는 너와 성운, 그리고 당강용 세 명이 맡아 주었으면 한다. 분명 내공이 4갑자라 하였으나 힘든 상대는 아니겠지.”
“뭔가 다른 계획이 있으시군요.”
“황실에서 녹림을 집어삼키라고 보낸 간자를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내일 현황우가 산채를 나서면 분명 간자는 행동에 나설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함이다.”
“그리고 사실은 성운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고 싶으신 거겠죠. 천마님께서 직접 현황우를 친다고는 하셨으나 몸이 나은 성운이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신 말씀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모르는 건 성운 영감탱이 정도 아닐까요.”
“하하하. 역시 유화구나. 그것까지 간파했더냐. 그럼 나머지도 잘 부탁하마.”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그 명령 잘 받았습니다.”
“부탁이라 했거늘.”
조금은 서운한 표정과 타박과도 같은 말을 하며 미안함을 드러내는 천일영에게 백유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고 밝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피 값을 같이 짊어지기로 했는데 그 무엇이든 천마님이 원하시는 것을 못 해 드릴까요.’
아무것도 모른 척 내색하지 않는 표정에 천일영이 더욱 난감해했지만, 백유화는 그런 천일영의 표정이 좋아서 입만 꾹 다물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현황우는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국송연 대신 다섯의 여자를 품에 안았던 즐거운 시간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아직도 자신의 침상에는 야릇한 몸매를 이불 속에서 드러내는 여인들이 있었지만, 이내 밖에서 들려오는 떠들썩한 소리가 그의 귀와 기감을 어지럽혀 꽤 일찍 일어나 버린 것이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왜 이리 시끄러운 것이냐.”
“그…… 그것이!”
“이 망할 놈들은 한 번 물어서 한 번에 대답하는 경우가 없군.”
현황우는 답답한 산적들의 습성에 한숨을 내쉬며 어젯밤 아무 데나 벗어 던진 옷을 걸쳐 입고 밖으로 나섰다.
해가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는 시각에 이토록이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보통의 일이 아닐 터.
드르르르륵.
거칠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현황우의 얼굴을 본 산적이 고개를 급히 숙였다.
“채…… 채주님, 바…… 밖에!”
“말 좀 제대로 해라. 밖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문밖에 서 있던 산적은 현황우의 거친 기색에 몸을 한 번 움찔하고는 이내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연병장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신?”
어찌 된 일인지 잠시 가늠되지 않는 일에 현황우는 멍하니 서 있다가 빠르게 연병장을 향했다.
그리고 발걸음은 서서히 달리기로 바뀌고, 이내 건물 안에서 경공까지 사용하여 밖으로 나서자.
“이게 무슨 개 같은…….”
열흘 동안 한 조에서 딱 한 명씩 납치가 있었다.
그런데도 애써 무시해 왔다. 무시해도 문제가 없었고, 납치당하는 산적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만은 달랐다.
“또 딱 한 명이라는 말인가.”
연병장의 한가운데에 이십 조각으로 잘려 있는 시신 하나.
육신에서 나온 피가 사방으로 퍼져 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얼굴만큼만은 온전히 하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일부러 알아보라고 그렇게 둔 것임을 모르지 않는 현황우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임면택 총관…….”
하고 많은 산적 중에서 딱 짚어 죽인 사람이 총관.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도 방비가 잘 되어 있는 산채 안에서 벌어진 일이다.
밤을 새워 경계하고 서로가 돌아가며 침입자에 대비하는데, 아침에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밤도 아닌 해가 뜨고 난 후에 이런 대담한 짓을 벌였다는 말이었다.
꾸욱.
현황우의 손이 소리가 나도록 접혔다.
부들거리는 손아귀에서 피가 고여 떨어질 것만 같을 정도.
이것은 도발이다.
현황우의 입에서 악에 받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모두 준비하거라. 공동파를 친다. 오늘에야말로 씨를 말리고 멸문으로 몰아넣을 것이니 무림이 생긴 이후로 처음 산적들에게 멸망 당한 무림 문파가 될 것이다.”
현황우의 내공 섞인 목소리가 깊은 분노와 함께 산채의 깊숙한 곳까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