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아침 해가 떠오르고 난 이후, 천일영은 같은 자리에서 산채를 내려다보았다.
휘이이잉.
현황우가 세운 산채 중에서도 가장 높은 5층 전각의 지붕 위.
천일영은 한 시진 전에 현황우가 무인들을 이끌고 공동파를 향한 것을 지켜보고 난 이후로도 고정된 듯 가만히 서서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또다시 피가 흐르겠구나. 게다가 간자 역시 예상대로 피를 보는 데 거리낌이 없는 자다.’
아침에 시신이 되어 발견된 녹림 총관 임면택은 천일영이 죽인 것이 아니었다.
이미 숨어 있던 황실의 간자가 현황우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서 저지른 것.
이미 오래전부터 녹림에 잠입하여 산채의 경계 시간과 교대 시간까지 모두 알고 있어 행동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터였으니, 굳이 천일영이 누구인지 파악하지 못한 총관을 제거해 주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군. 움직이려면 아마 지금쯤이겠지.’
천일영이 적절한 때가 되었음을 예감하는 순간.
전각의 5층 문이 열리며 여인 하나가 손을 들어 올리자 새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간자의 정체가 여인이었나. 제법 기척을 잘 죽이고, 무공을 익힌 흔적을 지우는 데 능숙하구나. 황실에서 간자로 선택할 만하군.’
지금 때가 되었다고 천일영이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현황우가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간자가 알고 있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천일영 그 자신을 암살자로 보낸 황실에서 언질이 있었을 테니 간자는 녹림을 집어삼키기 위해 녹림의 총관부터 죽이고 그것을 천일영이나 성운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을 터.
푸드드드득.
일각의 시간이 지난 후 여인의 손길에 의해서 편지를 다리에 끼운 새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 순간.
휘이이잉. 촤아악.
천일영의 신형이 지붕 위의 기와를 밟고 가뿐하게 허공으로 떠올라 검날을 날렸다.
째잭!
한 줌의 피를 뿌리며 새가 날갯짓을 멈추자 천일영은 즉시 편지를 뽑아 들고 땅으로 내려섰다.
그때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산적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일영을 보며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 누구냐! 아니, 어디에서 나타난 것이냐.”
“부인이 있는 남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는 못된 여자가 있어 방해하러 온 것뿐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뭐라고? 남편? 부인? 연애편지?”
“자세한 것까지는 알 것 없구나. 그런데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하니 산적이긴 한데 공동파의 무인인가.”
“……!”
휘이이잉! 촤아아아악!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산적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자신이 죽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날아가는 목에서 뿌려지는 피가 사방으로 퍼진다.
그 모습을 본 산적들이 검과 창을 뽑아 들고 천일영의 곁으로 빠르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부스럭.
하지만 천일영은 산적들이 다가오는 것을 신경 쓰지 않고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조강지처가 있는 남편을 죽이고, 그 집을 집어삼켜 부인까지 죽이려는 것치고는 제법 공을 들였구나. 이 편지가 도착하면 산채를 장악하기 위하여 황실의 무인들이 오십쯤 오는 것인가.’
천일영은 편지를 접어 품 안에 넣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잠시 편지를 읽는 사이에 약 칠십 명에 달하는 산적들이 원형으로 둘러싼 채 천일영에게 검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피식.
천일영의 입가에 씁쓸한 비웃음이 지어졌다.
이미 파악한 현황우의 신중하고 걱정 많은 성격대로, 산채를 벼랑 끝에 지어 방비가 철저함에도 공동파의 무인이었던 산적을 제법 남겨 놓은 것이었다.
“공동파의 기운은 이십 정도인가.”
“네놈이 진정으로 미쳤구나! 적지에 홀로 들어온 것도 제정신이 아닌데, 한다는 소리가 공동파의 무인이 이십? 그만한 수의 공동파 무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웃음이 나와?”
“피는 흐르겠지만 공동파의 무인이라면 느껴지는 죄책감이 덜할 터이니 나오는 웃음일 뿐이구나.”
툭 떨어지는 듯한 비웃음과 함께 천일영의 검이 뻗어 나갔다.
촤아아악. 촤아아악.
“커헉!”
“으헉!”
“크악!”
단 한 번만 검이 날아올랐거늘 머리는 일곱 개가 떠오른다.
그 순간 천일영의 장권이 공동파에서 무공을 배우지 않은 산적들에게 파고 들어갔다.
콰직. 뚜두두둑.
수십 개의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산적들은 순간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빠르게 몸을 빼내어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호? 산적들 주제에 별걸 다 하는구나.”
“네…… 네놈은 뭐냐. 너 같은 고수가 왜!”
천일영은 딱히 산적의 질문에 대답하지는 않았다.
아니,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망자와 다름없는 자에게 대답할 이유는 없다는 듯.
휘이이잉. 촤아아악. 콰아앙!
단 한 번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애써 만든 진형의 가운데가 날아가고, 산적들의 신형이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산적들은 그 모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동안 받은 훈련은 산적들이라 할지라도 빠르게 움직이게 했다.
촤좌좌좍.
산적들은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천일영이 노렸던 순간이었다.
산적들이 움직이는 빈틈을 노려 천일영의 검이 날아갔다.
촤아아악. 촤아아아악.
순간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이 열세 개가 떠올랐다.
그것은 딱 공동파의 무인들의 숫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처음부터 천일영은 그들을 죽이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들만 골라내려고 일부러 진형의 가운데를 날린 것.
‘한 번 배신한 것들은 두 번째 배신할 때 망설이지 않는 법이지.’
덜덜덜덜덜.
순식간에 이십이 죽어 나가자 남아 있는 산적들은 몸을 떨기 시작했다.
천일영은 검을 비스듬히 들었다.
“딱 죽는 게 나을 정도로만 아프게 해 주마.”
“으힉!”
파바바방. 빠악. 뻐억. 퍼억.
천일영의 검이 한 번 바람을 가를 때마다 이십 명의 산적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처음부터 산적이었던 그들은 앞으로 써먹어야 하기에 죽지 않을 만큼만 뼈를 부수는 것이었지만, 어찌 천일영이 때리는 검면이 비명 정도로 끝나겠는가.
“차라리 죽여 줘…….”
“크윽, 뼈가, 근육이……. 이런 개새…….”
“발가락이 전부 으스러진 것인가. 크으으으윽.”
오십 정도의 산적들이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질러 댄다.
하지만 굳이 기절시키지 않은 것도 천일영의 뜻이었으니, 공포를 온몸에 각인시키고 공동파의 무인들처럼 배신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럼 너희들에게 볼일은 끝난 모양이구나.”
“끄으으으윽.”
그때 천일영의 기감에 간자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을 눈치채고 움직이는 것일 터. 천일영이 쓰러진 산적들로부터 등을 돌려 간자에게 가려고 할 때, 앞을 가로막는 신형 둘이 나타났다.
그들은 비웃는 듯한 모습으로 천일영의 검을 바라보았다.
“네놈, 제법 실력이 있는 모양이군. 싸구려 검을 들고 올 정도는 되는가.”
“하지만 여기에 들어온 것은 실수였다.”
그들 역시 공동파의 고수. 나이가 사십이 넘어 머리끝이 희끗거리는 나이만큼 절정 고수의 중간 자락 정도의 실력으로 그들은 날카로운 안광을 천일영에게 토해 냈다.
그러나 천일영은 피가 흥건한 검을 어깨에 걸치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선택권은 주지 않겠다. 길을 비켜도 죽고, 안 비켜도 죽는다. 어찌하겠느냐.”
“뭐라고? 이런 미친놈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휘이이잉. 촤아아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절정 고수 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천일영의 움직임을 순간이나마 느끼고 검을 뽑으려 손을 움직이려 했지만, 그런 노력도 소용없이 그들은 손가락을 까딱하기도 전에 눈앞의 신형이 둘로 갈라져 보이는 착각을 일으키며 그 자리에서 피를 뿜었다.
촤아아악. 주르르르륵.
혈관에서 뿜어져 나와 온통 사방으로 튀어 나가는 피.
천일영은 그들의 피를 보며 표정이 굳었다.
배신자의 혈흔.
돈에 망자가 되어 버린 더러운 피가 너무도 많다.
“젠장.”
천일영의 눈에 혈광이 떠올랐다.
이 정도나 되는 고수들부터 산적이 되었다는 것이 점점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런 지경이 되었는데도 공동파를 살리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아 온 성운의 모습이 눈앞에 겹치자 천일영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렇군. 일단 공동파였던 자들은 전부 죽이고 시작하는 게 맞는 거였군. 어차피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 자들이니.”
천일영의 눈동자에 떠 있던 혈광의 테두리가 점점 짙어지고, 이내 그것이 섬뜩한 느낌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하는 순간.
훅.
천일영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아아아아악!”
“누가 저놈을 막아! 제발! 누구라도!”
“커헉! 어째서…….”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
그러나 대다수는 그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죽어 갔다.
“헉, 허억. 헉.”
국송연은 전서구를 날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친 듯이 뛰었다.
분명 전서구를 날리고 연병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이후, 불과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사방이 온통 피바다가 되고 온 사방에서 비명이 터지는 것에 미칠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고는 뛰고 또 뛰었다.
‘공동파에서 넘어온 고수들까지 전부 일검에 죽어 나가다니, 이 무슨!’
국송연은 조금 전 공동파의 초절정 고수였던 사람의 몸이 수십 조각이 되어 흩뿌려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초절정 고수를 죽이는 사람의 눈동자. 그것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이나 붉고 불길한 것이었다.
그것이 일만의 인간을 도륙한 사람이 만드는 살기라는 것을 모르는 국송연은 하마터면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었다.
‘일단은 도망을 가야 해.’
국송연 자신도 살수로 황실에서 키워지고 나이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절정 고수다.
그만큼 여러 가지 힘들고 괴로운 임무를 하며 더러운 꼴도 많이 보고, 돌이켜 생각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을 만큼 끔찍한 것도 보았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전부 별것 아니었다.
오늘 보고 있는 광경에 비하면.
“헉헉헉헉.”
평소에 가장 자신이 있었던 경공으로 도망가는 길.
이미 눈앞에 정문이 보인다.
저곳만 빠져나가면 산길을 통해 도망갈 수 있으리라.
국송연은 주변에 널려 있는 팔과 다리, 그리고 찢긴 몸통 사이를 헤집으며 겨우 정문에 도달했다. 그리고 걸쇠를 풀어 헤치며, 있는 힘껏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도망가기 직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나가는 것을 허락한 기억은 없구나.”
“으…… 으힉! 제발 살려 주세요. 부탁입니다. 그 무엇이든 다 할 테니!”
“신기한 일이구나. 네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분명 황실에서 가르치는 무공의 흔적이거늘.”
“어…… 어째서 그 사실을…….”
국송연은 떨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눈을 끔뻑였다.
산채에 있는 수백 명을 도륙한 이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면 결론은 단 하나. 그러나 국송연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신이 이곳에 숨어들었다는 것이 비밀이라는 것을 잊은 채 입을 연다.
“공자님이 바로 현황우를 죽이기 위해 항주에서 온 사람!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계신 것입니까? 현황우는 이미 죽이셨습니까?”
“내 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가 죽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나는 분명 황실에서 간자를 숨겨 뒀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구나.”
“……!”
천일영의 눈동자가 더욱 붉어지며 국송연의 심장을 더욱 옥죄어 온다.
“대답에 따라 네 명운을 결정하도록 하지.”
“그…… 그것은! 단지 현황우의 동태를 바로 곁에서 파악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것치고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편지를 전서구로 날렸다. 그럴듯한 거짓말이었지만 아깝게 되었구나.”
천일영이 품 안에서 편지를 꺼내 국송연에게 보인다.
국송연의 얼굴에 식은땀이 배어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전서구를 날려 황실의 무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산채의 문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그들과 합류하여 살아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수가 얕으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황실에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 모양이군.”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시는 것입니까. 말씀대로 저는 황실에서 파견한 사람입니다.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모르지 않으실 것입니다.”
“괜찮다. 너의 존재를 처음부터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상관없지 않겠느냐.”
“그런!”
검날에서 떨어지는 붉은 피에 국송연의 눈길이 고정되었다.
수백의 사람을 도륙하면서 그 날에 상함이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흔해 빠진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았다.
국송연은 그것이 뜻하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 고개를 숙였다.
“어찌하실 것입니까. 저를 죽이시는 것으로 일의 마무리를 지으실 것이라면 최소한 고통은 없도록 해 주십시오.”
“일단은 네 목숨에 값어치가 있는지부터 보지. 숨겨 놓은 화약이 있다고 들었다. 어디에 있느냐.”
“그것을 어찌…….”
“항주에서 그것을 터트려 금군을 죽이지 않았더냐.”
천일영의 말에 국송연의 눈동자가 위로 올라가며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그런 적이 있었던가? 아무래도 없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기꺼이 국송연은 화약이 있는 곳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화약이 들어 있는 상자를 열어 본 천일영의 입에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황실에서밖에 다루지 못하는 화약이 이곳에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네가 현황우에게 준 것이겠군. 이것으로 현황우에게 신임을 얻었나. 게다가 유의선도 모른 척하고 산적이 화약을 가지게 되어 큰일이라고 너스레를 떨다니.”
“그…… 그런 게 아니라…….”
“됐다.”
처음부터 화약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유의선은 수상했었다.
하지만 천일영은 화약의 존재가 확실해진 지금 웃음을 지었다.
계략의 끝에는 화약을 사용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천일영의 웃음이 순간 얼굴에서 지워졌다.
‘뭐지. 이것은?!’
천일영은 성운과 백유화. 그리고 당강용이 있는 공동파의 본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감에 잡힌 지금의 상황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으니.
‘아…… 안 돼! 유화야, 성운, 그리고 당강용!’
천일영의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그리고 있을 수도 없는 일.
그것이 기감에 느껴지자 천일영은 국송연의 목줄을 움켜쥐고 밖으로 나와 피 웅덩이 가운데에 섰다.
‘현황우! 네놈, 도대체 무슨 짓을!’
콰아아아앙!
천일영은 땅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라 급히 공동파의 본문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