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신귀환기-163화 (164/270)

163화

공동파의 오래된 잔재를 조금이라도 남기지 않겠다는 듯 화마는 몇 시진에 걸쳐 모든 것을 태웠다.

그동안 사천당문의 문주 당강용은 딸 당양희와 데려온 오십의 무인들을 시켜 기절해 있는 산적들의 단전을 모두 부수어 현청으로 향했고, 공동파의 유산이 타들어 가는 것을 눈물과 함께 바라보고 있던 성운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서러움이 토해졌다.

“으음…….”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사람들은 결국 한동안 성운을 지켜보다 하는 수 없이 산 아랫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곳에 있어 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그들도 각 문파와 세가를 짊어진 사람들로서 화마에 멸문하는 공동파를 바라보고 있기가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타닥. 타닥 타다닥.

불타오르는 소리가 연기와 함께 울려 퍼지는 곳에서 어느새 천일영이 나타나 성운의 어깨를 짚었다.

“인제 그만 울어라.”

“으허허헝, 망할 놈아. 평생을 원망할 거다. 어찌 이리 악독한 짓을 한단 말이냐.”

한이 맺힌 눈에 가득한 원망이 천일영의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천일영은 성운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새로운 공동파의 본문이 기다리고 있다.”

“뭐라고? 공동파의 새로운 본문이라니, 그런 게 어디에 있다는 말이냐!”

“현황우가 남겨 둔 훌륭한 산채가 있지 않으냐. 그곳을 공동파가 사용하면 될 일이다.”

“네…… 네놈, 설마 그럼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현황우가 산채를 완성할 때까지 기다린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아까 공동파의 남은 무인 오십을 데리고 산채의 청소를 해 두었다. 배신자들을 모조리 쓸어 버리고, 공동파의 새 출발을 함께할 새로운 장원이다. 그러하니 지금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멍한 눈으로 천일영을 바라보는 성운의 눈에 당황스러움이 배어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 자신이 천일영이라는 이 못된 책략가에게 휘둘리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었다.

“전에 공동파의 물건을 모두 옮기라 했던 것도 그럼…….”

“현황우를 끌어내기 위함도 있었지만 불을 지르려 했던 까닭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불을 지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구나.”

“그 이유는 내일 알게 될 거다.”

천일영은 성운의 팔을 강제로 잡아 일으켰다.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성운의 눈빛이 대답을 원하고 있었지만, 천일영은 그것에 애써 대답을 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성운은 연기를 잘하지 못하니까 사실을 모른 채 있는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 주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었다.

* * *

다음 날.

남은 불씨가 흰 연기만을 피워 올리는 공동파의 잔재 앞에서 성운이 회한이 서린 눈빛으로 서 있기를 한참.

오십 명의 공동파 무인들이 잔 불씨를 끄기 위해 물을 떠 나르고 있을 때였다.

“어허, 성운 장로님. 큰일을 겪으셨습니다.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요.”

“먼 길을 오셨습니다. 어제는 제가 정신이 나간 통에 추태만 보였습니다.”

“맨정신에 문파가 타들어 가는 것을 어찌 볼 수 있겠습니까. 이해하고도 남음이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오후 해가 저녁노을을 만들려고 할 때.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사람들이 성운을 찾아왔다.

소림의 방장 태사명진은 아직도 시뻘건 채 눈이 부어 있는 성운을 향해 애절한 눈빛을 보였다.

“미안하오. 우리가 너무 늦게 왔소이다. 같은 무림맹의 사람들로서 못 할 짓을 했소.”

“아니! 왜들 이러십니까.”

그들이 누구인가.

하늘을 나는 새도 말 한마디에 떨어트린다는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장문인과 문주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일제히 성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드십시오. 한낱 장로인 저에게 이런 인사는 과분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오셨으니 저는 이미 만족합니다. 늦게 온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저희를 잊지 않으신 그 마음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아닙니까.”

“허허…….”

장문인들과 문주들이 보기에 성운의 표정과 말은 진심이다.

아니, 성운이라는 사람은 예전부터 거짓말 같은 것은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내공이 부족해 초절정 고수가 되었으면서도 그 이름을 날리지 못했었지만, 그 무공 실력이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하여 무림맹에서 선생으로 초청을 했을 정도였지. 그 당시 무림맹에서 십수 년을 보아 왔기에 알건만, 이 사람은 정말로…….’

소림의 방장 태사명진이 고개를 숙였다.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태사명진은 성운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한동안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성운의 만류에 머리를 들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주변에 불씨를 끄는 공동파의 무인이 오십여 명.

그들이 지금은 비록 삼류 무인과 이류 무인뿐이지만, 앞으로 공동파의 미래를 이끌어 나갈 사람들임에는 분명했다.

희망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낀 태사명진은 소매에 손을 넣어 여러 장의 종이 뭉치를 꺼냈다.

“받으시지요.”

“이것이 무엇입니까.”

“늦게 온 것에 대한 사죄입니다.”

성운은 얼떨떨한 마음으로 종이 뭉치를 받아 펼친 순간 헛바람을 들이켜며 놀라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태사명진이 건네준 종이는 다름 아닌 전장의 전표.

“이…… 이것은!”

“문파마다 돈을 걷었습니다. 이 돈으로 공동파의 건물을 다시 지으시고 재건을 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렇게나 큰 도움을…….”

한 장에 적게는 금화 이백 냥부터 많게는 오백 냥까지.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 적인 전표에 성운은 침을 삼켰다.

전부 다 하면 아마도 금화가 삼천에서 사천 냥에 이를 터다.

하지만 거금을 건네면서도 태사명진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남아 있었다.

“무림맹으로 가서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할 생각입니다. 아마 금화 천 냥 정도는 지원을 받도록 해 보지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 돈이면 충분한 것을…….”

“녹림의 채주를 제거하고, 그 과정에서 크나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중원은 공동파에 큰 신세를 진 것입니다. 그러니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겠지요.”

“하지만 녹림의 채주는 다름 아닌 공동파의…….”

“배신자는 그 어디에서나 나옵니다. 따지고 보면 문파마다 골칫덩이가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이런 감사할 데가…….”

성운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린다.

그러나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의 장문인을 비롯하여 문주들은 오히려 마음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히려 성운 장로가 돈을 받아 주어서 체면을 구기지 않고 넘어갈 수 있게 되었군.’

그들은 자칫 웃음거리가 될 뻔한 상황이 무마되어 넘어가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성운이 돈을 받지 않았다면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는 물론 무림맹의 이름마저 땅으로 떨어져 십수 년은 웃음거리로 전락했을 터다.

“우리는 이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하여 무림맹으로 가야 합니다. 부디 빨리 떠나는 것을 용서해 주시오.”

“용서라니요, 멀리 못 나가서 죄송할 뿐입니다.”

성운은 빠르게 공동파를 떠나는 사람들의 등 뒤에서 그들의 속내는 모른 채 한동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 * *

그날 저녁.

성운은 현황우가 쓰던 방에서 천일영과 당강용, 그리고 백유화와 술잔을 기울였다.

새로 지어 놓은 산채에는 천일영이 직접 나무를 베고 깎아 공동파라는 이름의 현판까지 걸었고, 현황우가 지은 산채는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불타 버린 공동파의 본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이나 훌륭했다.

그러나 성운은 산채에 기거하는 것에 왜인지 죄책감을 느꼈다.

스윽.

성운은 오늘 받은 전표를 탁자 위에 올렸다.

“이것 때문에 공동파에 불을 지른 것이더냐.”

“이제야 눈치챈 모양이구나.”

“하여간에 네놈의 머리는 정말로 당해 낼 재간이 없구나.”

성운의 얼굴에 허탈함이 번졌다.

성운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천일영은 술잔을 채우며 입을 열었다.

“이미 절반은 불타고 부서진 본문이었다. 그러나 멸문에 가까웠던 공동파로서는 수리는커녕 당장 먹고사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상태였지 않더냐. 그래서 대신 지어 줄 생각을 했을 뿐이다.”

“하아, 고작 납치 하나로 몇 가지를 얻은 것이냐. 현황우가 산채를 빨리 짓게 만들고, 우리가 이곳을 임시 거처로 쓸 수 있게 만든 데다가 구파일방과 오대 세가, 그리고 무림맹에게 새로운 공동파의 본문을 세울 돈까지 전부 받아 내다니.”

하지만 그것뿐이겠는가.

사천당문의 이름을 정파 명문 중에서도 의와 협을 아는 최고의 문파로 만들어 버렸다.

“하여간에 나쁜 짓을 한다고 하더니만 내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이나 악독한 짓이었다.”

“나쁜 짓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뭐라고? 시작도 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천일영이 성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은근한 표정을 지었다.

“채주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지요.”

“뭐라고? 콜록, 콜록. 왜 나한테 채주라 하는 것이냐.”

“그거야 앞으로는 네가 녹림십팔채의 채주니까 하는 말이 아니냐.”

“야! 이 미친놈아!”

사레가 들린 채로도 자신을 향해 크게 눈을 뜨는 성운에게 천일영은 시침을 뚝 떼고 말을 이어 갔다.

“여자 간자를 살려 둔 이유가 무엇이겠느냐. 녹림을 삼키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게 내가 채주가 될 이유는 아니지 않느냐.”

“산적은 양민을 죽이고 표국을 괴롭히며 가난한 사람들의 푼돈을 빼앗기 위해서 도끼를 휘두르지. 한 해에 산적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팔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느냐.”

“그건…….”

“산적은 없애고 없애도 끊임없이 계속 생긴다. 그러니 차라리 없애지 못할 것이라면 네가 관리를 하라는 뜻이다. 사람을 죽이지 못하게 하고, 팔지도 못하게 하며 돈은 적당히 갈취하도록 말이다. 표국이 주는 금액을 반감해 주고, 새로운 산적들이 활개를 못 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사람이 살아남게 될 터. 이 때문에 황실에서도 녹림을 집어삼키려 했었다.”

“하아. 결국 나쁜 짓이지만, 나쁜 짓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냐.”

“언제나 옳은 길을 가는 너라면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니, 꼭 너여야만 한다, 성운.”

“이 망할 놈, 처음부터 이리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구나.”

“늦게 눈치챈 네가 잘못한 거다.”

천일영은 술잔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나머지는 잡아 온 간자와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지.”

“너 설마 막 고문 같은 거 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육신의 고문은 하수나 하는 짓이다. 심리적인 고문이 가장 효과가 좋은 법이지.”

“뭐라?”

천일영은 성운의 팔을 강제로 잡아끌어 산채 한편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점혈을 당하여 꼼짝도 못 하는 국송연이 의자에 묶인 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당양희는 여러 가지 고문 도구를 펼쳐 놓은 채 손가락을 푸는 중이었다.

파바바밧.

천일영은 국송연이 입을 움직일 수 있도록 혈도의 일부를 풀었다.

그러자 국송연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비록 제가 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기는 하나, 황실에서 파견 나온 사람입니다. 그러한데 이렇게 대우를 하는 것은 안 될뿐더러, 황실에서 이 사실을 아는 순간 수만의 금군이 몰아닥칠 테니 저를 풀어 주셔야 뒤탈이 없을 것입니다!”

“괜찮다. 너는 이미 황실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뭐…… 뭐라고요?”

“너를 찾으러 온 황실의 무관들은 이미 돌아갔다. 수십의 잘린 시체 중에서 네 흔적을 찾으라고 하니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지.”

“그…… 그럴 리가.”

급작스럽게 서러움이 폭발하듯 국송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겨우 그렇게 쉽게 돌아갔다고? 시신의 확인도 하지 않고?’

분명 그 끔찍한 연무장의 광경은 기억에 선명하다.

하지만 그냥 돌아가서는 안 될 일이다.

죽음의 확인을 포기하고 돌아갔다는 것은 버림받았다는 말.

“그럼 저는 이제 어찌 되는 것입니까.”

“네가 선택하거라.”

“그게 무슨 말…….”

망연자실한 국송연의 눈길이 천일영의 목소리를 좇아 이내 그 얼굴에 도달한다.

눈앞의 공자가 살기 대신 포근한 목소리를 울리며 입을 열기에 국송연은 귀를 열고 소리를 마음에 담기 시작했다.

“고문을 받고 아는 것들을 실토하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그 말씀은 저를 죽인다는 것입니까.”

국송연의 절망 섞인 말에 천일영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두 번째 방법은 황실로 돌아가도 되겠지. 하지만 그리하면 너의 죽음을 보고한 무관들은 큰 실책으로 육형(肉刑)을 받게 될 것이다. 더욱이 너는 살아 돌아온 이유에 대해 의심을 받고, 성공할 수 없는 극히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겠지.”

“그것도 제가 죽는 것이군요.”

“세 번째로는 도망을 가도 좋다. 말리지는 않으마. 그러나 도망 생활이 어떠한지는 네가 더 잘 알 듯하구나.”

“선택은 할 수 있되, 결말은 모두 최악이라는 것입니까.”

천일영은 대답 대신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이어지는 말에는 안심을 시키듯 더욱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네 번째는 여기에 남아서 녹림을 이끄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겠지. 현황우가 죽고 옆에 있는 이 바보 놈이 채주가 될 것인데 그것을 돕는 일이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산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스르르릉.

천일영이 현황우의 검을 뽑으며 살기 섞인 눈을 국송연에게 내비쳤다.

“다섯 번째는 죽음을 선택하는 길도 있다. 그리고 기억하거라. 여섯 번째 선택지는 없다는 것을.”

“……!”

국송연은 묶여 있는 동안 물조차 마시지 못했지만, 타들어 가듯 침이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눈동자를 떨었다.

‘다섯 가지의 선택지 외에 다른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 공자는 선택지가 딱 다섯 개가 되도록 처음부터 만든 것이구나. 실로 무서운 일이지만…….’

국송연은 허탈하기도 했지만, 내심 웃음이 지어지기도 했다.

이 정도의 계략을 짜는 사람이라면 앞으로는 죽음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만 같았기에.

어차피 황실의 임무는 언제나 죽음이 곁에 머무는 생활이었다.

“네 번째입니다. 허락된 길이 그것뿐이니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음입니다.”

“앞으로 우리 멍청한 채주를 잘 부탁하마.”

국송연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멀어진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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